<일요연재> 대통령의 뒷모습 (55)과거에 머무는 빨간 체제

  • 김영권 작가
  • 등록 2023.11.06 09:22:51
  • 호수 1452호
  • 댓글 0개

김영권의 <대통령의 뒷모습>은 실화 기반의 시사 에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을 다뤘다. 서울 해방촌 무지개 하숙집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당시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작가는 무명작가·사이비 교주·모창가수·탈북민 등 우리 사회 낯선 일원의 입을 통해 과거 정권을 비판하고, 그 안에 현 정권의 모습까지 투영한다.

말이 나온 김에 나라꽃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북조선의 국화를 우리는 대개 진달래로 알고 있는데 뜬소문이 아닌가 싶다. 아마 소월이 노래한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으로 인한 영향일 수도 있고, 남한 사람들 역시 진달래를 좋아해 맘속으로 은근히 우리 민족의 꽃이라 느끼다가 무심결에 당연히 진달래라고 지레짐작해 버렸기 때문인지 모른다. 

김일성의 꽃

섭섭하게 진달래는 아직 한 번도 나라꽃으로 지정된 적이 없다. 그저 우리 마음속에 피어 있을 뿐. 북한의 국화는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무궁화였다고 한다. 그 후 목란으로 바뀌었는데 여기엔 일화가 있다. 

1964년, 김일성 주석은 황해도의 산길에서 함박꽃나무를 보곤 ‘아름답고 향기도 좋으며 생활력이 강해 꽃 가운데 왕’이라는 이유로 목란(나무에 피는 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국화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라꽃보다 더 귀중하게 대접받는 꽃이 있으니 바로 김일성화이다. 


무궁화에도 세뇌성은 들어 있을 것이다. 영원 무궁한 꽃, 성인 군자와 같은 품격, 인의예지신의 5덕을 지닌 꽃 중의 꽃….

한 송이의 꽃에 너무나 거창한 상징들이 가득 들어 있어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누가 그 덕목들을 꽃에 넣어 놓았을까? 아마 민중들의 가슴속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느낌이기보다 양반 유학자들의 관념적 소망이 반영돼있는 게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무궁화의 아름다움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며 자만하지 않고 겸허한 자태이다. 길을 가다가 문득 그 꽃을 있는 그대로 보면 한국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좀 궁금하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어차피 통일 나라꽃을 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땐 남북의 지도층 인사 몇 명이 앉아 결정할 게 아니라, 무궁화든 목란이든 진달래든 또 다른 어떤 꽃이든, 아무런 세뇌 없이 온 민중이 정녕 사랑하는 꽃을 통일 국화로 삼아야 하리라. 나라 노래를 통일하는 건 좀 쉬워 보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3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남한의 애국가와 북조선 애국가는 초등생이 봐도 꽤 유치하고 구태의연해서 부르기가 싱겁다.

새로운 통일 애국가는 활력이 넘치고 홍익인간의 정신이 현대적으로 잘 표현된 노래라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정서가 살아 숨 쉬는 아리랑을 활용해도 좋으리라. 

나라 이름과 국기를 통일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울 수도 있다. 건국의 이념뿐만 아니라 아집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한민국. 이름은 그렇게 지어 놓고 과연 정말 인민과 민중이 주인으로서 생활하는 나라였는지, 뒤돌아보며 모두 함께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세뇌, 우상화와 신격화, 우민화, 특권층의 향락과 독재, 민중들의 억울한 고난과 죽음은 이 순간에도 남북 양 체제에서 뻔히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의 악과 공산주의의 죄를 이 땅에서 동시에 몰아내고, 진정한 자유와 민주가 생동하는 새로운 나라에 어울리는 이름….

순우리말로 지어도 좋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코리아도 괜찮겠지만, 다만 이번에야말로 꼭 국민의 뜻을 받들어 공명정대하게 정해야 하리라. 국기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꽃 가운데 왕’ 이유로 목란 국화로 삼아
공산주의 통제 가장 고도화된 도시 평양

태극과 주역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나 작은 별을 넣어 놓은 붉은 깃발은 둘 다 너무 철학 사상적이고 이념 편향적이다.

별은 선입견 때문인지 왠지 창공에 뜬 별 같지 않고 날카로운 느낌이다. 차라리 보름달과 해님과 무지개를 잘 활용하여 우리 한민족 민중의 아름다운 꿈을 형상화하는 게 필요할 듯싶다. 

태극기엔 심오한 우주의 철리가 깃들어 있어 아깝긴 하되 꼭 고집할 일은 아니다. 국기엔 지식인의 철학보다 국민의 소망이 담겨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태극의 모양을 두고 삼팔선 같다느니 빨갱이와 파랭이 같다느니 하는 소리도 솔직히 마음에 걸린다. 물론 그 때문에 이렇게 분단돼 싸우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북조선 인공기는 우선 우리 민족의 심성에 맞지 않는다. 고정된 심성이 따로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싶진 않으나 아무리 봐도 친밀감이 들지 않고 어색한 느낌이다.

내포된 뜻은 차치하고 디자인 자체가 한민족의 예술적 감각을 구현하고 있지 않다. 구 소련의 스탈린이 만들어 준 것이라는 풍문이 사실인지 유언비어인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걸 통일 국가의 깃발로 삼느니 그냥 순수의 상징인 하얀 천을 푸른 하늘 아래 펄럭이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민중들이 저마다 자신의 꿈을 그 기폭에 수놓을 수 있도록…. 또는 쌍무지개나 색동저고리 문양을 잘 활용하면 통일국의 멋진 국기가 나오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남북통일을 말하기 전에 각자 지역감정 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고 핀잔을 주는 사람이 있다. 맞는 얘기다.

그런데 이건 함께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남한의 경우 해묵은 경상도와 전라도 간의 반목은 이제 꽤 누그러든 성싶은데, 다른 지역 간에도 이해관계에 따라 자주 다툼이 벌어진다.


북조선의 상황은 과연 어떨지 궁금하다. 잘 모르긴 해도 아마 속으로 곪아 더 심할 수도 있다.

아무리 일당 독재 체제로 일사불란하게 다스린다고 해도 도리어 그 때문에 지역 간 불평등이 고착화됐다는 불평·불만도 나온다. 

서울을 자본주의적 자유가 가장 방만한 도시라고 한다면 평양은 공산주의적 통제가 가장 고도화된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서울처럼 알짜배기는 모두 몰려 있는 건 비슷하나 그곳엔 아무나 제 맘대로 가서 살 순 없기에 불만이 더욱 속으로 깊어질 것 같다.

물론 서울도 아무나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일단 자신이 선택할 가능성은 주어졌으니 설령 죽을지언정 불평하긴 어렵다. 

어색한 인공기

하긴 서울의 지나친 방만함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평양의 엄격한 통제를 좋아하는 사람 또한 존재하리라.

어쨌든 유람하러 온 평양 사람이 얄미워 묻지 마 식의 살인이 벌어지기도 한다니 북쪽 지역감정의 깊은 억하심정을 추측할 만하다.

더구나 수도 평양뿐만 아니라 남포, 함흥, 신의주 등등 모든 도시 또한 공화국 권력의 선별에 의해 차등 배치돼 살아가는 판국이므로 소외된 인민들은 옛 조선시대의 백성들처럼 속으로 붉은 울음을 울지 않겠는가.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상)

[창간특집 단독기획] 26년 만에 다시 꺼낸 산업증권 파산의 비밀(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1997년 말 국가부도 상황이 벌어졌다. 기업이 줄줄이 도산했고 수많은 근로자들이 길거리에 나앉았다. 자본금 수천억원, 국책은행을 뒷배로 둔 대형 증권사들도 고꾸라졌다. ‘절대 망할 리 없다’던 회사의 붕괴는 30여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피해자의 마음에 상흔으로 남아 있다. 산업증권 ‘파산의 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2008년 10월21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공성진 의원이 한국산업증권(이하 산업증권) 파산 문제를 언급했다. 당시 공 의원은 “산업증권이 IMF 위기 시에 불·탈법적으로 강제 파산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산업증권은 한국산업은행(이하 산업은행)이 자본금을 100% 출자해 설립했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의 1인 대주주였던 셈이다. 망하지 않는다 이날 국감에서는 산업증권이 파산에 이르는 과정서 일어난 일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공 의원은 ▲산업증권 해산 과정서 이사회와 재정경제부의 허가 여부 ▲산업증권을 파산으로 끌고 간 1041억원 ▲개인명의의 계좌 ▲개인 계좌를 통해 한국산업선물로 흘러간 54억원 등에 대해 질의했다. 1998년 산업증권 해산 이후 10년 만에 당시 상황이 국감에 언급되면서 각종 의문이 제기됐다. 특히 개인명의의 계좌를 통해 오고 간 자금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됐다. MB(이명박)정부 들어 처음 열린 국감서 산업증권 파산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자 일부 언론은 이전 정부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당시 국감에 증인으로 참석한 이충현 전 산업증권 채권관리팀장은 여전히 사건을 추적하고 있다. 현재 서울 강서구의원으로 활동 중인 그는 “외환위기 당시 좌파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기업과 금융기관에 대한 범죄적 구조조정과 부정부패로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고 나라와 국민에게 회복 불능의 상처를 남겼다”고 일갈했다. 이 구의원은 산업은행에 근무하다가 산업증권 설립과 동시에 이직했다. 그는 산업증권이 파산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피해자이고 ‘강제파산’ ‘사기파산’ 의혹을 제기한 제보자, 산업증권강제퇴출피해대책위원장이자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원고로 26년을 보냈다. 그사이 소송서 패소했고 법적 시효는 끝났다. 그럼에도 이 구의원을 비롯한 피해자들은 산업증권 파산 사건을 놓지 못한 상태다. 산업증권에 근무했던 직접 피해자와 가족 등이 일한 간접 피해자들은 “IMF 사태였다고 해도 산업증권이 망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개인을 고객으로 하는 일반은행이 아니라 산업자본 조달을 위해 설립된 국책은행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산업증권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망했다. 400여명의 근로자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다. 문제는 1997년 12월 IMF 사태 이후 1998년 해산, 1999년 파산 선고 때까지 석연치 않은 의문이 여럿 나온 점이다. 특히 청산 절차가 시작된 이후 개인명의 계좌를 통해 자금이 움직인 증거가 나왔다. 이 구의원이 가지고 있는 71개의 이른바 ‘비밀 통장’의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산업증권은 ‘산업은행이 발행하고 있는 산업금융 채권의 원활한 소화 및 국제업무 특화’를 목적으로 1991년 4월 설립됐다. 산업은행이 100%를 댄 초기 자본금은 1500억원에 달했고 1992년 11월 1000억원, 1998년 3월 1500억원을 증자해 1998년 7월25일 해산 당시 산업증권의 자본금은 4000억원에 이르렀다. IMF 사태로 증권사 강제 퇴출 산업은행 1인 대주주로 안정성↑ IMF 사태로 휘청이긴 했지만 산업증권은 명예퇴직, 임금 반납 등 고강도 구조조정을 통해 상황을 개선하려 했다. 산업은행 역시 산업증권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증자하는 등 위기 타파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산업증권 본사에서 근무하던 이 구의원과 지방 지점에 있던 김영수(가명)씨는 “회사에 큰 문제는 없었다”고 입을 모았다.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998년 5월 산업은행에 새 총재가 부임하면서부터다. 특히 언론을 통해 ‘산업증권 연내 폐쇄’가 발표되자 내부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객과 채권자들은 동요했고 예금인출을 서두르는 등 대혼란이 일어났다. 당연히 신규영업도 줄어들었다. 영업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2개월 뒤 1998년 7월 산업은행은 산업증권 임시주주총회를 열고 해산결의를 진행했다. 이후 1999년 2월 산업증권의 청산인은 ‘부채 초과 및 지급불능’을 이유로 파산선고를 신청했고 같은 해 3월13일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산업증권은 파산했다. 연내 폐쇄 발표부터 파산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은 셈이다. 이 구의원에 따르면 산업은행의 산업증권에 대한 해산결의는 노동조합과의 퇴출 위로금 규모를 합의하는 사이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산업증권의 노조위원장과 산업은행의 대표이사, 부총재 등이 퇴출 위로금으로 24개월치 임금을 지급하기로 구두 합의를 진행하는 과정서 해산이 결정됐다. 당시 산업증권 대구지점서 근무하던 김영수씨는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서 “명예퇴직으로 나간 직원들은 20개월치 월급을 받은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산업증권이 망한 이후 나간 직원들은 퇴직금 수준의 돈만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산업증권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명예퇴직을 신청하지 않았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말했다. 이 구의원은 2010년 5월 산업증권 파산으로 직장을 잃은 피해자를 모아 산업은행, 금융감독원, 전 산업은행 총재와 부총재, 산업증권 청산인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산업증권 파산 과정서 피고들의 불법행위가 자행됐고 이로 인해 피해자(직원)가 생겼으니 이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해달라는 취지다. 수장 바뀌고 급변한 기류 이 구의원은 “먼저 산업은행의 산업증권에 대한 해산결의가 적법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또 파산 신청의 원인이 된 자본잠식 상황은 조작됐고 1041억원의 대지급도 실제 진행됐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무엇보다 산업증권 해산결의 이후 만들어진 수십여개의 개인명의 계좌와 이를 통한 자금흐름은 사기파산, 강제파산의 가장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1999년 2월 산업증권 청산인 명의로 서울지방법원에 제출한 파산선고신청서를 보면 ▲지급불능 ▲채무초과를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1500억원에 달하는 산업은행의 유상증자, 대규모 인원 정리, 조직 슬림화 등 자구 노력에도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또 회계법인의 실사 결과 부채가 자산보다 많다는 점도 명시했다. 반면 이 구의원은 결산보고서와 회계법인이 청산 가치 기준으로 작성한 조사보고서를 근거로 해산일 기준(1998년 7월25일) 자산이 부채보다 약 100억원가량 많다고 주장했다. 일반 채권자에게 변제해도 돈이 남는 만큼 파산이 아니라 청산 형태로 종결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산업은행은 청산이 아닌 파산의 방식을 택했다. 청산은 재산관계를 정리해 이를 분배하는 절차를 뜻한다. 파산은 회사의 총 재산을 총 채권자에게 공평하게 나눠주는 절차다. 파산은 법원의 결정에 따라 진행된다. 산업증권이 청산으로 마무리됐다면 산업은행은 유일한 대주주로서 손해를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법원이 파산 결정을 내리면서 산업은행은 대주주이면서 채권자가 됐다. 산업증권의 파산과 관련해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1041억원’의 존재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에 빌려준 단기자금으로 파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돈이다. 산업증권은 1998년 7월28일 ‘1998년 7월25일자로 회사 해산을 결의하고 청산 절차를 진행하던 중 1998년 7월27일 교환에 회부된 어음(금액 1041억원)을 결제하지 못해 1차 부도 조치를 당했다. 자체 자금 조달도 어려우니 추가 자금 지원을 부탁한다’고 산업은행에 요청했다. 의문점 많아 국감서 다뤄 산업은행은 이 돈을 산업증권 대신 갚았다(대지급). 다시 말해 산업증권이 산업은행에 빌린 돈을, 산업은행이 산업은행에 갚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산업은행이 대지급한 1041억원은 산업증권의 채무로 잡혔다. 이 과정서 부채가 자산보다 늘어나면서 산업증권 파산의 원인, 채무초과 상태가 됐다. 실제 회계법인이 작성한 1998년 10월31일 기준 산업증권의 부채는 2190억원, 자산은 1950억원이다. 부채가 자산보다 240억원 많다. 법원은 이를 근거로 산업증권의 파산을 선고했다. 240억원이 산업증권 파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그 후폭풍은 400명이 넘는 산업증권 직원에게 미쳤다. 이 구의원은 산업은행이 대지급했다는 1041억원이 실제 거래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산업증권은 대지급 요청문서 ‘산업증권 청산 절차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라고 기술했고 현금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돼있지만 실제로 산업은행은 산업증권에 1041억원을 신규 지원한 사실이 없고 내부 문서에도 신규 추가지원이 없다”고 강조했다. 이 구의원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파산 절차 과정서 ‘사후관리대지급금’으로 1041억원을 파산채권으로 신고해 2009년 5월 기준 파산채권의 100%를 돌려받았다. 산업은행 입장에서는 단 한 푼의 손해도 없이 대신 지급한 돈을 전부 회수한 것이다. 1041억원의 진실은 현재로선 알기 어렵다. 법원의 허가로 산업증권 메인 전산 서버가 파기된 상태기 때문이다. 다만 산업증권 청산 절차 과정서 개설된 통장은 실물로 존재한다. 이 구의원은 71개의 통장을 산업증권 전 직원에게 전달받아 보관해 왔다. 이 구의원은 해당 계좌들을 통해 수천억원에 이르는 자금이 움직였고 일부는 사용처도 불분명하며 최후의 사용처를 알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비자금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문제가 제기된 부분은 또 있다. 산업증권과 같은 날인 1998년 7월25일 청산 절차에 들어간 한국산업선물(이하 산업선물)에 송금된 54억원의 성격이다. 산업선물은 산업은행의 자회사로 금융 선물거래를 위해 설립됐다. 파산으로까지 이어진 산업증권과 달리 산업선물은 1998년 정상영업이 시작되기 전에 청산 종결 처리됐다. 그런 회사에 1998년 8월11일 개인 명의의 계좌서 54억원이 이체된 것이다. 이 구의원은 “산업선물은 자본금 100억원의 회사로 산업은행 해산 당시 정식으로 영업개시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1998년 5월 산업증권 연내 폐쇄 발표가 난 상태서 산업선물에 54억원이라는 거액을 입금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1998년 7월부터 시중은행에 개설된 통장은 모두 개인 명의로 돼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계좌 명의자 가운데 2명이 산업증권에 대한 특별검사(1998년 7월25일~8월11일)에 투입된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 검사역이었다는 점이다. 직원 400여명 한순간에 길거리로 법적 판단 끝났어도 문제 제기 중 이 구의원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서 피고 측은 “1998년 당시 고객예탁금은 한국증권금융주식회사에 별도로 예치 관리되는 현행 제도와 달리 증권회사의 고유재산과 구분해 관리되지 않았다”며 “금감원(피고)은 특별검사 기간 중 고객예탁금을 안전하게 고객에게 반환되는 것을 보장하는 적법한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IMF 사태로 금융회사 파산이 일어난 것은 1998년 이전에 없던 일로 제도가 미비했고 방법을 찾던 중 금감원 검사역의 개인 명의를 이용, 계좌를 개설해 이를 고객예탁금 관리 용도로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당시 계좌를 개설했던 2명의 검사역 가운데 1명은 금감원에, 또 다른 1명은 증권사 감사로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 명의 계좌와 관련해서는 2008년 국감서도 다시 한번 언급된 바 있다. 국감서 공 의원은 2명의 금감원 검사역 외 계좌를 만든 또 다른 개인 명의자에게 “누구의 지시로 개인명의 계좌를 개설했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해당 인물은 “금융감독검사국 직원들 지시로 그렇게 했다”고 답했다. 공 의원이 거듭 “산업증권의 자금을 개인, ○○○(명의 당사자)의 이름으로 관리하게 된 것은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해당 인물은 “감독 당국의 지시에 의해서 한 것이다. 개인적인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11년 이 구의원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서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며 피고 측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총 주식을 한 사람이 소유하는 이른바 1인 회사의 경우에는 주주총회 소집 절차를 밟지 않거나 총회를 개최한 사실이 없다고 하더라도 1인 주주에 의해 의결이 있었던 것으로 주주총회의사록이 작성됐다면 그 내용의 결의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결의는 유효하므로 해산결의가 무효라거나 위법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산업은행이 산업증권의 해산을 결의하는 과정이 절차적으로 하자가 없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해산결의 절차가 적법하고 유효한 이상 근로자에 대한 해고도 위법하지 않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또 소송을 제기한 시기가 사건 발생일 이후 10년이 경과된 상황이라 손해배상채권 시효가 소멸됐다고 봤다. 항소심 재판부 역시 이 구의원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법적인 판단은 끝난 셈이다. 정치적 이유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구의원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나섰다. 이 구의원은 2012년 법적 판결이 확정된 이후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해왔다. 현재 이 구의원이 용산 대통령실에 넣은 청원은 경찰청 중대범죄수사과, 반부패공공범죄수사과 등을 거쳐 금감원으로 이송된 상태다. 이 구의원은 “회사 사정이 좋지 않았다면 인수합병, 매각 등의 방식을 써도 됐을 일이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1인 대주주라는 점을 이용해 산업증권을 없애버렸다. 산업증권의 파산이 정치적인 목적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정부가 산업증권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고르면서 429명의 직원과 그 가족들은 지금까지도 고통받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