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법정 영화에서 젊은 변호사는 단 한 번도 패하지 않는다. 의뢰인의 범행을 알고 있지만, 화려한 말솜씨와 치밀한 증인신문으로 배심원과 재판부를 설득해 결국 무죄를 이끌어낸다. 영화가 서늘한 이유는 악마 같은 범죄자가 등장해서가 아니다.
법률가의 화려한 언변이 어느 순간 ‘승소’와 ‘진실’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및 재산분할 분쟁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제기된다. 법정에서는 증거와 법리가 판단의 기준이지만, 법정 밖에서는 때때로 강렬한 숫자 하나가 사실상 판결문처럼 소비된다.
그 숫자가 대중의 분노와 결합하면 사법적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여론이 먼저 결론을 내려버릴 수 있다.
논란의 중심에는 노 관장 측 법률대리인 이상원 변호사의 발언이 있다. 지난 2023년 11월 법원 앞에서 이 변호사는 취재진에게 최 회장이 김희영 티앤씨재단 이사장에게 쓴 돈과 관련해 “2015년 이후만 봐도 1000억원이 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취지의 주장을 내놨다.
이 발언은 강렬했고 수년간 이어져 온 이혼 및 재산분할 소송의 복잡한 법률관계보다 ‘1000억원’이라는 숫자가 훨씬 빠르게 대중의 기억에 각인됐다. 소송 당사자들의 재산 형성과 혼인관계, 재산분할 대상 여부 등을 따져야 하는 법적 분쟁이 어느 순간 ‘1000억원을 쓴 남편’이라는 프레임으로 단순화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짚어봐야 할 문제가 있다. 당시 법원이나 수사기관이 최 회장이 1000억원 이상을 증여했다고 확정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최 회장 측은 두 사람의 공동생활비 등을 약 20억원 수준으로 주장해 왔다. 또 별건인 유튜버 사건 항소심 과정에서 검찰이 실제 증여로 확인된다고 밝힌 금액은 23억4000만원이었다.
물론 각 사건의 사실관계와 판단 대상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금액을 단순 비교하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양측이 제시한 숫자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최 회장 측이 이 변호사의 1000억원 발언에 대해 실제 확인된 금액보다 50배 이상 부풀려진 수치라고 반발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핵심은 결국 1000억원이라는 숫자의 근거가 무엇이었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법원에 제출된 증거에 근거한 합리적인 추정이었는지, 아니면 소송 당사자의 일방적 주장에 가까운 수치였는지에 따라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변호사가 의뢰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거액의 재산분할이 걸린 이혼소송이라면 양측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관계와 법리를 최대한 부각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불리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 역시 변론의 일부다.
문제는 법정 밖에서 대중을 상대로 어떤 방식으로 사건을 설명하느냐다. 재판은 원칙적으로 제출된 증거와 법률에 따라 판단한다. 법정에서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고, 증거의 신빙성을 다투며, 법률적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 변호사의 본래 역할이다.
하지만 언론 브리핑이나 기자회견 등에서 강한 표현과 거액의 숫자를 제시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대중에게는 법원 기록 전체가 공개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수많은 쟁점 가운데 가장 자극적인 한 문장만 확산되기 쉽다. 특히 1000억원이라는 숫자는 설명이 필요 없는 강력한 메시지다.
그 돈이 실제 증여인지, 생활비인지, 다른 재산관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법적으로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되는지 등은 복잡한 법률적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대중의 기억에 남는 것은 1000억원이라는 숫자 하나일 가능성이 높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법정에서의 변론과 여론을 상대로 한 메시지의 괴리가 발생한다.
이상원 변호사를 둘러싼 논란이 단순히 한 차례의 발언에만 머물지 않는 이유는 그가 노 관장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박철언 전 정무장관의 사위다. 박 전 장관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와 고종사촌 관계로 알려져 있다. 또 이 변호사의 배우자인 박지영씨와 노 관장은 6촌 관계로 알려져 있다.
즉 이 변호사는 노 관장의 법률대리인이면서 동시에 인척 관계에 있는 인물이다.
여기에 또 다른 연결고리가 있다. 박지영씨는 노 관장이 중심이 된 봉사단체 미래회의 대표이사로 등기돼있었다. 미래회와 관련해서는 과거 최 회장을 겨냥한 댓글로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를 받은 전 회장의 사건도 논란이 됐다. 당시 해당 사건의 변호를 이 변호사가 맡았다.
정리하면 노 관장의 소송 대리인인 이 변호사가 노 관장과 인척 관계에 있고, 배우자는 노 관장과 연결된 단체의 대표이사를 맡았으며, 자신은 그 단체의 전 회장이 최 회장을 겨냥해 작성한 댓글 사건의 변호를 맡은 것이다.
물론 이 같은 관계 자체가 위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척 관계에 있는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는 것은 아니며 가족이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댓글 사건의 피고인에게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이런 관계만으로 이 변호사의 소송 수행이나 발언이 부당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관계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특히 한쪽 당사자의 법률대리인이면서 인척이고, 배우자가 그 당사자와 연결된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자신이 같은 상대방을 겨냥한 별도 사건의 변론까지 맡았다면 법정 밖에서 나오는 발언에는 더욱 높은 수준의 사실 확인과 설명 책임이 요구될 수밖에 없다.
변호사의 말이 일반인의 말보다 항상 진실한 것은 아니지만, 사회가 변호사의 발언을 상대적으로 무겁게 받아들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변호사는 법률과 증거를 다루는 전문가다. 사건 기록을 검토하고 법적 판단을 거쳐 의뢰인에게 조언하는 직업이다.
따라서 변호사가 특정 사건과 관련해 언론 앞에서 구체적인 숫자와 사실관계를 제시하면 일반 대중은 이를 단순한 개인의 추측보다 무겁게 받아들이기 쉽다. 바로 이 지점에서 법률가의 사회적 책임이 발생한다. 변호사가 법정에서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과 법정 밖에서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사실인 것처럼 전달하는 것은 동일한 문제가 아니다.
특히 명예훼손 문제가 제기될 정도로 구체적인 사실을 외부에 공개했다면 그 표현의 근거와 정확성은 당연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변호사법 역시 변호사의 직무 수행과 관련해 진실을 은폐하거나 거짓 진술을 하는 행위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다.
다만 이것이 변호사가 의뢰인에게 불리한 사실을 모두 공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하고, 정당한 범위에서 의뢰인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가 정당한 변론이고 어디부터가 사실에 대한 부정확한 전달인지다.
이번 논란은 수사기관의 판단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9일 이 변호사의 명예훼손 혐의에 대해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불기소 처분했다. 하지만 최 회장 측은 이에 불복해 15일 항고했고, 이 변호사의 발언이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여부는 향후 항고 절차에서 다시 검토될 가능성이 있다.
검찰이 형사 처벌할 정도로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고 해서 1000억원이라는 수치가 법원이나 수사기관에 의해 사실로 확정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로 불기소 처분이 내려졌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발언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도 없다.
형사 책임의 성립 여부와 발언의 사실적·사회적 적절성은 구분해서 봐야 한다. 무엇보다 이번 논란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여론 재판으로 사법부의 판단은 느리다. 수많은 서류를 검토하고 증거를 비교하며 양측 주장을 듣는 과정이 필요하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 있는 반면 여론은 빠르다.
자극적인 문장 하나와 거액의 숫자 하나면 몇 시간 만에 수많은 사람에게 퍼진다. 문제는 여론이 빠른 만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1000억원이 실제로 어떤 성격의 돈인지, 어떤 시기에 지급됐는지, 법적으로 증여인지 생활비인지, 재산분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재판부가 증거를 통해 판단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에 대중이 먼저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이 다시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확산된다면 사법절차 자체가 여론의 영향을 받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 더구나 이혼과 재산분할 사건은 당사자들의 사생활과 재산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한쪽의 주장만으로 상대방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법률적 판단과는 거리가 멀다. 결국 이번 사건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1000억원이 사실인가’에 그치지 않는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변호사는 의뢰인의 승소를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다.
의뢰인의 주장을 최대한 강하게 펼치는 것은 변호사의 역할이지만 그 과정에서 사실관계가 과장되거나, 검증되지 않은 수치가 확정된 사실처럼 유통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상대방의 사회적 평가를 심각하게 떨어뜨릴 수 있는 내용이라면 더욱 그렇다.
법정에서 증거와 법리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과 법정 밖에서 대중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의 싸움이다.
전자에는 재판이라는 절차적 통제가 존재한다. 상대방에게 반박할 기회가 있고, 재판부가 증거의 진위를 따지지만 후자는 다르다. 한번 대중에게 퍼진 주장은 나중에 정정되더라도 처음의 인상을 완전히 지우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사가 법정 밖에서 하는 말에는 오히려 더 높은 신중함이 요구된다.
법률가는 의뢰인을 위해 싸운다. 그러나 법률가의 최종 목적이 단순히 ‘이기는 것’에만 있을 수는 없다. 재판은 승패를 가르는 절차지만, 법치주의는 그 승패가 증거와 법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 위에 서 있다. 그 믿음이 무너지면 법원에서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사법제도 자체를 신뢰하기 어려워진다.
노 관장 측 변호사의 1000억원 발언을 둘러싼 논란 역시 이 지점에서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 발언이 형사 처벌 대상인지 여부는 앞으로의 법적 절차가 판단할 문제다. 최 회장 측의 항고 결과 역시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형사 처벌 여부와 별개로 “법정에서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실을 법정 밖에서 강력한 숫자로 제시해 대중의 판단을 먼저 이끌어가는 것이 과연 정당한 변론의 범위 안에 있느냐” “그 숫자가 사실과 다르다면, 나중에 내려질 법원의 판결은 이미 형성된 대중의 인식을 되돌릴 수 있느냐”는 질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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