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기의 시사펀치> 호르무즈 앞에 다시 선 광해군

2026.09.16 07:57:20 호수 0호

명의 파병 요구와 후금의 보복 위협 사이서

대한민국이 호르무즈 해협 앞에서 어려운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오는 11월까지 호르무즈 해협에 한국군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세계 원유 수송의 핵심 통로에서 선박의 자유롭고 안전한 통항을 보장하자는 명분이다.

그러나 이란은 한국이 병력을 주둔시키거나 군사작전에 참여하면 침략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으로 간주하겠다며 보복 가능성을 경고했다. 미국의 파병 요청과 이란의 보복 위협 사이에 선 한국의 모습에서 400여년 전, 광해군이 떠오른다.

정부는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조현 외교부 장관은 지난 11일 이란 측의 요청으로 아바스 아라그치 외교 장관과 약 15분간 통화했다. 조 장관은 호르무즈 해협에서 한국을 포함한 모든 선박의 자유롭고 안전한 통항이 보장돼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파병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재명 대통령도 같은 날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우리의 힘과 외교 지평을 키우고 국제사회와 긴밀히 공조해야 한다고 밝혔다. “오직 국민과 국익에 더 나은 내일을 생각하겠다”는 말에는 파병을 국익 중심으로 판단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그러나 국내 반대 여론은 커지고 있다. 한국갤럽이 최근 전국 성인 1000명을 조사한 결과 파병 반대는 55%, 찬성은 32%였다.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69%가 반대했고 국민의힘 지지층에서는 찬성 50%, 반대 36%였다. 지난 주말에는 참여연대와 자주통일평화연대 등 540여 개 단체가 서울 도심에서 파병 반대 행진을 벌였다.

여당 중진 의원과 진보 성향 정당들도 명분 없는 전쟁에 우리 군을 보내서는 안 된다며 파병 불가 선언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과 가장 닮은 조선시대 사건은 1619년 광해군 때의 심하 파병이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권국이던 명나라는 급성장한 후금을 제압하기 위해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다.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사를 보내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준 나라였다.

조선으로서는 나라를 구해준 명분을 내세우는 명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당시 후금은 조선의 국경을 위협할 만큼 강해지고 있었다. 명을 따르면 후금이 두렵고, 후금을 의식하면 명을 배신했다는 비판을 받을 처지였다.

광해군은 명의 파병 요구를 피하거나 규모를 줄이려 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의 재정과 군사력이 회복되지 못한 데다 후금과 전쟁을 벌이면 조선이 보복 대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 황제의 직접적인 요구가 이어지자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약 1만3000명의 조선군을 보냈다. 조선군은 명군 지휘체계에 편입돼 후금 정벌에 나섰지만 명군이 심하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고립됐다. 수많은 조선군이 전사했고 고립된 주력 부대는 결국 후금에 투항했다.

광해군의 선택을 무조건 비겁한 중립외교였다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군사를 보낸 결과까지 성공적인 실리외교라고 평가할 수도 없다. 명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려 했던 광해군의 절충은 명의 신뢰를 충분히 얻지 못했고 후금의 의심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은 명과 후금의 패권 경쟁에 휘말렸고 그 대가는 전쟁터로 간 조선군이 치렀다. 심하 파병이 주는 교훈은 강대국의 요구를 무조건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라 목적과 지휘권, 임무와 철수 조건이 불분명한 파병은 돌이키기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미국을 명나라에, 이란을 후금에 그대로 대입해서는 안 된다. 조선과 명은 책봉·조공을 바탕으로 한 사대관계였지만 대한민국과 미국은 조약을 맺은 동맹국이며, 대한민국은 파병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는 주권국가다. 또 호르무즈 해협의 자유 항행을 보호하는 활동과 이란 본토를 공격하는 전쟁은 성격이 다르다.

한국 선박과 에너지 수송로를 보호하는 것은 우리 국익과도 연결된다. 중요한 것은 자유항행 보호라는 이름 아래 우리 군이 미국의 대이란 군사작전에 편입되는지, 독립적인 방어 임무만 수행하는지를 명확히 구분하는 일이다.

정부는 미국에 파병 요청의 목적과 범위부터 구체적으로 밝히라고 요구해야 한다. 한국군의 임무가 상선 호송과 구조, 기뢰 탐색에 한정되는지, 이란군과의 교전이나 보복 공격에도 참여해야 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지휘권은 누가 갖고 공격을 받으면 어디까지 대응할 것인지, 전쟁이 확대되면 언제 철수할 것인지도 사전에 정해야 한다.

“일단 파견한 뒤 상황을 보자”는 방식은 가장 위험하다. 파병보다 출구를 먼저 정하고 임무와 기간이 달라지면 다시 국회의 동의를 받도록 해야 한다.

전투병력 파견만이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길도 아니다. 정부는 외교적 중재와 해상정보 공유, 선박 구조, 의료와 인도적 지원 등 비전투 방식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인장비나 정찰정보를 지원하더라도 이란 공격을 위한 표적 선정이나 군사작전에 이용되지 않도록 제한선을 설정해야 한다.

동시에 이란과 고위급 소통을 이어가 한국의 활동이 이란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선박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을 설명해야 한다. 미국에는 동맹의 책임을 다하되 이란에는 적대 의사가 없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국회와 국민에게 판단 자료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헌법은 국군의 외국 파견에 국회의 동의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기존 청해부대의 작전구역을 넓히는 방식으로 사실상 새로운 파병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법적 근거와 예상 비용, 병력 규모와 작전구역, 교전 가능성, 장병 보호대책과 철수 조건을 국회에 제출해야 한다. 이란과 중동 지역의 교민, 한국 선박과 기업, 원유 도입과 해상 운임에 미칠 영향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안전이 걸린 결정일수록 속도보다 절차와 설명이 중요하다.

한미 국방 당국은 오는 16일부터 18일까지 부산에서 제29차 한미 통합국방협의체(KIDD)를 열어 호르무즈 파병 문제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최근 아랍에미리트에 현지조사단을 보낸 데 이어 해상초계기와 폭발물 처리반, 무인 기뢰 탐색·제거 장치 등 투입 자산도 검토하고 있다. 파병 시점과 규모, 임무가 구체화될 수 있는 이번 회의에서 정부가 어떤 원칙과 조건을 제시할지 주목된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구를 거부하지도, 후금과 정면으로 맞서지도 못한 채 두 강대국 사이에서 좁은 길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충분한 통제권 없이 파견된 조선군은 명군의 패배와 함께 참혹한 희생을 치렀다. 2026년의 대한민국은 1619년의 조선보다 훨씬 강하고 외교적 선택지도 많다.

미국의 요구에 무조건 따를 이유도 없지만 국내 반대 여론만 보고 동맹의 책임과 해상 안보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이 대통령은 파병 여부보다 먼저 대한민국 군인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하게 되는지를 국민 앞에 분명히 밝혀야 한다.

호르무즈 해협 앞에 선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강대국 사이의 모호한 줄타기가 아니라 원칙이 분명한 국익 외교다. 자유 항행에는 기여하되 명분 없는 공격에는 참여하지 않고, 동맹을 존중하되 우리 장병의 생명과 지휘권은 양보하지 않아야 한다.

국회의 동의와 국민의 이해 없이 전쟁의 문턱을 넘어서는 일도 없어야 한다.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서 우리 군인이 대신 희생돼서는 안 된다. 400년 전 심하 파병의 교훈을 기억한다면 정부는 호르무즈 파병의 명분보다 귀환의 조건부터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skkim596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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