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필자의 칼럼을 읽은 친구가 한마디 했다. “현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좋지만 아직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나.” 집에서는 아내도 비슷한 말을 했다. “대통령 된 지 1년 조금 지났는데 벌써 그렇게 평가해요? 좀 더 지켜봐요.”
그런데 뜻밖에도 평소 현 정부에 비판적인 보수 성향의 지인까지 같은 말을 했다. “나도 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직은 좀 지켜봐야 한다고 봐.”
서로 정치적 생각도 다르고 이재명 대통령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른 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하자 필자도 생각해봤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도대체 얼마만큼의 시간을 주고 평가해야 할까? 취임 100일이면 충분한가, 1년이면 되는가, 아니면 임기 절반은 지나야 하는가.
이 대통령의 5년 임기를 정치의 시간표가 아니라 자연의 시간표 위에 올려놓아 봤다. 그랬더니 지금 이재명정부가 어디쯤 와 있는지가 의외로 선명하게 보였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6월4일 임기를 시작했다. 대통령 임기 5년은 60개월이고 이를 4등분하면 15개월씩이다. 첫 15개월을 봄, 두 번째 15개월을 여름, 세 번째 15개월을 가을, 마지막 15개월을 겨울이라고 해보자. 물론 달력의 계절이 아니라 대통령 임기의 계절이다.
그렇다면 지난 9월3일 이정부의 봄이 끝났고 9월4일부터 정치의 여름이 시작됐다.
대통령 임기는 흔히 1년 차부터 5년 차까지 나누거나 전반기와 후반기로 구분한다. 그러나 필자는 4계절로 나누는 방법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자연 역시 씨를 뿌리고, 키우고, 거두고, 다음 농사를 준비하는 순환을 반복한다. 무엇보다 봄·여름·가을·겨울은 국민 누구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국정도 농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첫 15개월인 봄에는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린다. 두 번째 15개월인 여름에는 씨앗을 키우면서 장마와 폭염, 병충해를 견뎌야 한다. 세 번째 15개월인 가을에는 정책의 열매를 거두고 마지막 15개월인 겨울에는 수확물을 국민 앞에 내놓고 평가받는다. 이렇게 보면 대통령의 5년이 훨씬 이해하기 쉬워진다.
지난 15개월 동안 이정부는 봄 농사를 지었다. 정부 조직을 정비하고 장관을 교체했으며 정책 방향을 정하고 여러 씨앗을 뿌렸다. 동시에 농사짓는 방법 자체를 바꾸는 작업도 밀어붙였다. 3대 특검을 가동하고 검찰개혁을 비롯한 권력기관 개편에 속도를 내면서 이전과 다른 국정 운영의 틀을 만들려고 했다.
어떤 씨앗은 기대를 받았고 어떤 씨앗은 처음부터 논란을 불렀다.
농사 방법을 바꾸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함께 농사지을 사람을 제대로 고르는 일이다. 최근 이정부가 호되게 비판받는 대목도 ‘일꾼을 잘 뽑았느냐’는 인사 문제다. 김승원 법무부 장관 후보자와 용혜인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논란도 결국 같은 질문으로 모인다.
대통령이 아무리 좋은 씨앗을 골라도 장관과 참모라는 일꾼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농사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다만 이정부가 잘 정돈된 밭에서 농사를 시작한 것은 아니다. 새 정부가 출범한다고 전임 정부가 남긴 경제와 민생의 숙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국정을 맡을 일꾼도 많이 교체됐고 정부 조직과 정책 방향을 다시 정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곧바로 씨앗부터 뿌릴 수 있는 깨끗한 옥토를 물려받은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 과정에서 봄에 뿌렸어야 할 씨앗 가운데 일부는 아직 제대로 뿌리지 못했거나 이제 막 싹을 틔우는 단계일 수도 있다. 일부 개혁과 제도 정비가 늦어졌다면 여름에 들어서야 씨를 뿌리는 경우도 생긴다. 그렇다고 모든 책임을 전임 정부에 돌릴 수는 없다.
출발 조건이 어려웠다는 것은 설명은 될 수 있어도 앞으로 농사를 못 짓는다는 변명은 될 수 없다. 여름부터는 물려받은 밭을 얼마나 옥토로 바꿔놓느냐까지 현 정부의 실력이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농부에게 실제로 힘든 계절은 씨를 뿌리는 봄보다 그것을 키우는 여름이다. 장마가 오고 폭염이 닥치며 잡초와 병충해도 생긴다. 봄에는 씨를 잘 뿌렸다고 박수를 받을 수 있지만 여름부터는 말보다 실력이 필요하다. 이정부 역시 이제 무엇을 하겠다는 약속보다 무엇이 실제로 달라지고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공교롭게도 이 대통령은 정치의 여름을 민심의 폭염 속에서 시작하게 됐다. 한국갤럽의 9월 첫째 주 조사에서 대통령 직무 긍정 평가는 40%, 부정 평가는 51%로 취임 후 각각 최저와 최고를 기록했다. 취임 초기 60%대였던 긍정 평가가 이제 40%까지 내려온 것이다.
여름의 첫날부터 뜨거운 햇볕을 맞고 밭으로 나가는 농부의 처지가 됐다.
이런 현상이 이 대통령에게만 나타난 것도 아니다. 역대 대통령들도 취임 초기의 기대가 걷히고 1년을 지나면서 민심의 온도가 낮아지는 경험을 했다. 한국갤럽 자료를 보면 취임 1년 무렵 긍정 평가는 노태우 45%, 노무현 25%, 이명박 34%, 박근혜 56%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 직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83%를 기록한 예외에 가까웠다. 대통령에게 정치의 여름은 기대만으로 버티기 어려운 시간인 셈이다.
따라서 지금은 단순히 임기의 두 번째 15개월이 시작되는 시점이 아니다. 취임 초기의 기대라는 봄바람이 잦아들고 정책의 성적표를 요구하는 민심의 무더위가 시작되는 때다. 지지율 40%는 농사를 포기하라는 신호는 아니지만, “아직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말만으로 넘길 수 있는 숫자도 아니다.
여름에는 희망만 이야기할 겨를이 없다. 비가 많이 오면 물길을 내고 가뭄이 들면 물을 대야 한다. 경제와 민생, 부동산과 일자리, 외교와 안보에서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나타날 때 얼마나 빨리 대응하느냐가 정부의 실력을 결정한다.
특히 권력에 익숙해지면서 생기는 오만과 독선, 듣기 좋은 이야기만 올라가는 보고 체계, 지지층만 바라보는 정치는 정치의 여름에 번성하기 쉬운 병충해다. 이 대통령이 가장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그렇다고 여름이 시작되자마자 농사를 실패했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국민은 투표를 통해 이 대통령에게 5년 동안 대한민국이라는 농사를 맡겼다. 씨앗을 뿌린 뒤 매일 땅을 파헤쳐 뿌리가 얼마나 자랐는지 확인한다면 제대로 자랄 작물이 없다.
봄 농사가 끝났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키울 시간을 줘야 한다. 친구와 아내, 보수 성향 지인이 말한 “좀 지켜보자”가 새삼 다르게 들린 이유다.
물론 ‘지켜본다’는 것은 아무것도 묻지 말고 기다리자는 뜻이 아니다. 잘못하면 지적하고 방향이 틀리면 바로잡으라고 요구해야 한다. 야당이 벌레가 생겼는데도 말하지 않는다면 직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지만, 아직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고 밭을 갈아엎으라고 하는 것도 책임 있는 정치가 아니다. 정부에는 일할 시간을 주고 야당은 제대로 견제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의 역할 분담이다.
우리 국민이 이정부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이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대통령이 실패하면 그 대가를 국민 전체가 함께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실패해야 야당이 성공하는 나라보다 대통령이 성공해 국민이 잘살고, 그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야당이 다음 선거에서 선택받는 나라가 훨씬 건강하다.
이 대통령 자신도 여름을 날 체력을 준비해야 한다. 여름에는 농부의 얼굴에 땀이 흐를 수밖에 없지만 지쳐 쓰러질 듯한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표정과 건강도 국민에게는 국정의 신호다. 대통령이 정치의 더위를 먹으면 대통령 한 사람만 힘든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농사 전체가 흔들린다.
필자에게 “좀 더 지켜보자”고 말했던 친구도 요즘 대통령의 얼굴이 부쩍 피곤해 보인다며 걱정했다.
현재 이 대통령은 프랑스를 국빈 방문 중이다. 정치의 여름에 들어선 직후 이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과 함께 국제 영화·영상 정상회의인 ‘뤼미에르 서밋’의 공동 의장을 맡았다. 두 정상은 한국과 프랑스가 2027년부터 5년간 각각 5억유로, 약 8000억원을 자국 영화·영상산업에 투자하는 ‘글로벌 영화·영상산업 투자협력 이니셔티브’, 이른바 ‘뤼미에르 파트너십’을 선포했다.
이를 양국의 공동투자와 공동제작으로 확대해 K콘텐츠의 세계 진출을 뒷받침하겠다는 구상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의 여름에 필요한 외교다. 봄의 외교가 정상끼리 악수하며 협력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었다면, 여름의 외교는 그 약속을 투자와 일자리, 수출의 열매로 키우는 과정이어야 한다. K콘텐츠가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로 성장하려면 대통령의 외교가 창작자와 기업이 진출할 밭을 넓혀줘야 한다.
이번 파트너십도 실제 투자와 공동제작, 해외시장 확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사진이 아니라 국익을 남기는 외교가 될 것이다.
청와대도 이번 기회에 5년 국정을 네 계절로 나눠 관리해보면 어떨까. 봄에는 무엇을 심었는지, 여름에는 무엇을 키울 것인지, 가을에는 무엇을 수확할 것인지, 겨울에는 무엇을 국민의 평가에 맡길 것인지를 정책별로 분명히 하는 것이다. 경제와 부동산, 복지와 산업, 외교·안보 정책에 계절별 시간표를 부여하면 정부는 결과를 무한정 미루기 어려워지고 국민도 기다려야 할 정책과 당장 따져야 할 정책을 구분할 수 있다.
이 방식은 정부에도 국민에게도 공평하다. 봄에 가을의 수확량을 요구하지 않는 대신 가을이 왔는데도 “아직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변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농부는 결국 말이 아니라 곡식으로 평가받는다. 이정부도 경제가 나아졌는지, 국민의 삶이 편해졌는지, 기업이 활력을 찾았는지, 청년에게 희망이 생겼는지를 결과로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박수도, 무조건적인 야유도 아니다. 정부에는 일할 시간을 주되 국민은 눈을 떼지 않아야 한다. 대통령도 “아직 여름이니 기다려달라”고만 해서는 안 된다. 뒤늦게 뿌린 씨앗이 있다면 언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할 것인지 시간표를 내놓아야 한다. 기다림에는 반드시 결과에 대한 책임이 따라야 한다.
요즘 우리가 느끼는 계절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봄과 가을은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은 길어졌다. 정치의 계절도 다르지 않을 수 있다. 이정부의 여름 역시 생각보다 길고 혹독하게 느껴질 수 있다. 여름 동안 정책을 키우고 민심을 돌려놓지 못한다면 수확의 계절은 짧아지고 국민의 평가라는 겨울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올 수 있다.
이정부는 이제 여름이다. 물려받은 밭이 좋지 않았고 봄 농사가 계획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면 그것까지 감안해 키울 시간을 줄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정치의 여름을 지지율 40%라는 폭염 속에서 시작한 만큼 이번 여름은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농사의 성패를 단정할 때가 아니라 이 혹독한 여름을 어떻게 견디며 제대로 농사짓는지 지켜볼 때다. 다만 가을이 오면 국민은 곳간을 열어볼 것이다. 가득 차 있다면 박수를 보내고, 비어 있다면 냉정하게 책임을 물으면 된다.
<skkim5961@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