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비를 맞아도 그 무게는 다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보여준 반지하 침수 장면은 기후로 인한 빈부격차를 극단으로 보여준다.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에게 있어 폭우는 삶의 터전을 앗아간 재난이지만, 호화로운 단독주택에 사는 연교(조여정)에게는 그저 하룻밤 소동이었다. 오히려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던 연교는 천진난만하게 기택에게 말한다. “비가 와서 그런지 미세먼지가 없네요. 비 안 오면 어쩔 뻔했어?”
유엔(UN) 산하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가 발간한 6차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이 적고 기반 시설이 미비한 지역일수록 기후 위기에 더욱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기후 불평등’은 전 세계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양극화
2022년 기후 이상 현상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서울과 경기 수원시 등은 사상 처음으로 ‘6월 열대야’를 맞이했고 8월에는 수도권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다. 성인 허리만큼 차오른 빗물은 가장 먼저 사회적 약자를 덮쳤다. 그해 여름, 반지하에 살던 세 모녀가 침수로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올해도 어김없이 찌는 듯한 더위가 이어졌다. 폭염 재난 문자가 끊임없이 울렸고 에어컨도 없이 빽빽이 들어찬 쪽방 실내 온도는 30도를 훌쩍 넘겼다. 도심 속 녹지가 부족한 낙후 지역의 아스팔트는 절절 끓으며 한낮의 열기를 그대로 흡수했다.
8월 기준 올해 온열질환 추정 사망자는 21명으로 집계됐으며 전체 온열질환자는 2200명을 넘어섰다.
반면 서울 도심의 주요 상권에선 문을 활짝 열고 냉방 하는 ‘개문 냉방’이 성행하고 있었다. 녹색연합이 서울 주요 상권과 수도권의 개문 냉방 실태를 조사한 결과, 서울 주요 상권에서는 506개 매장 가운데 절반이 넘는 269개가 개문 냉방 영업 중이었다. 마찬가지로 수도권의 6개 복도형 프리미엄아웃렛 1170개 매장 가운데 57.2%인 669개가 개문 냉방 영업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기후에서 체감하는 빈부격차는 자연재해에 취약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극단적인 더위나 추위가 닥쳐도 냉난방 시설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해당된다. 사회는 그들을 ‘에너지 취약계층’이라고 부른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에너지 빈곤 지표 비교 분석 및 정책 활용 방안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소득 대비 연료비 비중이 높은 가구가 지난해 기준 2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한민국 국민 5명 중 1명이 에너지 취약계층인 셈이다.
폭우도 폭염도 불평등한 현실
어두운 에너지 취약계층 그늘
2015년 정부는 저소득 취약계층이 전기·도시가스·지역난방 등 난방비 부담을 덜어주는 에너지바우처 제도를 시행했지만 여전히 사각지대는 존재했다. 기후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가 나섰지만 단순한 비용의 문제가 아닌 다양한 환경의 복합적인 문제인 만큼 명쾌한 해법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 3월 국회미래연구원이 더불어민주당 박지혜·김용태 의원과 공동으로 연 ‘기후 위기 시대, 에너지 취약계층 지원법의 필요성’ 정책토론회에서 기후 위기가 일상화되는 지금, 에너지 빈곤은 단순히 소득 부족의 문제가 아닌 단열 수준, 건강 상태, 지역 기후 위험 등이 결합된 복합적인 문제라고 진단했다.
아울러 에너지 취약계층을 선별하는 기준도 단순히 소득 기준이 아닌 ‘다기준 기반 식별 체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얼마나 노후된 집에 거주하는지부터 냉난방 취약도, 지역별 기후 노출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해야 실질적인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인구 고령화에 따른 에너지 복지 사업과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재정 수요는 더욱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에너지 복지를 강화하기 위한 중장기적 계획은 부실한 상황이며 국가 차원의 전략 역시 더디게 진행되는 상황이다.
공정한 해결을 추구하는 ‘기후정의’ 실현을 내세우는 목소리도 대두됐다. 경기도는 기후 위기를 자연의 위기인 동시에 취약계층에 더 큰 피해가 집중되는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로 정의했다.
“언젠가는 나도?” 안심할 수 없다
성공해야 하는 82억명 지구인 팀플
추미애 경기도지사는 지난달 27일 ‘2026년 제8회 청정대기 국제포럼’에서 “기후 위기의 피해는 결코 모두에게 똑같이 돌아가지 않는다”며 “같은 폭염, 같은 집중호우라도 어린이와 어르신, 건강이 좋지 않은 분들,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더 먼저, 더 크게 피해를 받는다. 기후 위기는 자연의 위기인 동시에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그대로 드러내는 위기”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하며 산업화의 혜택을 먼저 누린 나라와 지역이 있는 반면, 성장의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하고 기후 위기의 충격을 먼저 감당해야 하는 나라와 사람들이 있다”며 “더 많이 배출해 온 곳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하고, 더 많은 역량을 가진 곳이 더 먼저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온실가스 감축에만 집중하기보다 기후 위기로 인한 피해 비용이나 에너지 전환 과정에서 생기는 이득을 사회 구성원이 어떻게 나눌지까지 종합적으로 다루자는 취지로 해석된다.
국제 연구단체인 GCP(세계 탄소 프로젝트)에 따르면 1750년 이후 누적 온실가스 배출량은 미국이 24%로 전 세계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중국(15%) ▲러시아(6.7%) ▲독일(5.2%) ▲영국(4.4%) 순으로 조사됐다. 반면 올여름 극심한 홍수로 피해를 본 네팔의 누적 온실가스 배출량은 0.01%에 그쳤다. 기후 위기의 주된 원인은 산업 활동으로 탄소를 내뿜고 과도한 소비를 부추긴 선진국이지만 그에 따른 피해와 고통은 빈곤층의 몫이 된 셈이다.
대한민국은 누적 1.12%로 14위 안팎이다. 미국과 중국 등에 비하면 낮은 수치지만, 우리 모두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긴 어렵다는 지적이다. 반대로 대한민국 역시 언제든지 기후 불평등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기후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탄소 감축과 함께 사회적 취약계층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할 국가 차원의 정책과 생태계 보호도 필수다. 더 이상 정치인들이 계절마다 쪽방촌을 반짝 방문하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해자
기후정의 실현은 비단 대한민국만의 과제가 아니다. 지구촌 모두의 문제다. ‘82억 지구인 팀플(조별 과제)’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지만 더는 웃음으로 넘기기 어려워 보인다. 이제 기후 재앙은 우리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개별 국가의 노력을 넘어 국제 사회의 실질적인 연대가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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