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만 해도 포럼이나 출판기념회, 세미나 같은 행사에 정치인이 참석하면 행사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축사를 마친 뒤에도 토론을 듣고 참석자와 인사를 나누며 마지막 단체사진까지 함께 찍는 일이 흔했다. 행사의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했고, 발제자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적어도 행사에 참석했다면 그 행사 자체를 존중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단체사진 한 장에도 함께한 시간과 공감의 흔적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정치인은 행사 시작 직후 축사를 하고, 사회자는 곧바로 정치인과 주요 인사들만 앞으로 나오라고 안내해 기념사진을 찍는다. 사진 촬영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치인은 다른 일정이 있다며 행사장을 떠난다. 그 뒤부터 시작되는 발제와 토론은 정작 그 행사의 핵심인데도 대부분 듣지 않는다.
참석했다기보다 자신의 순서만 마치고 떠나는 것이 오늘날 정치 행사의 익숙한 모습이 돼버렸다.
행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은 허탈감을 느낀다. 발표자는 오랜 시간 자료를 준비했지만 정작 들어야 할 사람은 이미 자리를 비운 상태다. 발제자는 중요한 제안을 내놓지만 그것을 정책으로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은 행사장에 없다.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은 진심으로 그 행사에 관심이 있는 시민들인데, 그들은 사진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남는 것은 행사의 내용이 아니라 정치인의 얼굴뿐이다.
필자도 최근 이런 현실을 직접 경험했다. 대통령직속기구가 주최한 개헌 관련 포럼에 참석했는데 약 100여명이 모인 의미 있는 행사였다. 행사 시작 직전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국회의원 등 정치인 10여명이 입장했다. 축사가 끝나자 사회자는 정치인과 발제자를 앞으로 나오라고 했고 곧바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정작 개헌에 관심을 갖고 행사장을 찾은 100여명의 참석자는 그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정치인이 모두 떠난 뒤 본격적인 포럼이 시작됐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 언론에는 이미 행사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기사에는 포럼 제목과 함께 정치인과 발제자가 찍은 단체사진이 크게 실려 있었다. 그 사진만 본 국민은 정치인이 행사 내내 참석해 개헌 논의를 함께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이 떠난 뒤부터 진짜 포럼이 시작됐다.
필자는 그 장면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이미지가 사실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왜곡이라고 생각했다.
포럼은 매우 수준 높은 내용으로 이어졌다. 기조 강연자와 발제자들은 대한민국이 앞으로 어떤 국가를 지향해야 하는지 설명했고, 권력구조보다 시대정신이 먼저라는 점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제시했다. 특히 개헌의 시기와 절차, 국민 참여 방식까지 구체적인 대안을 제안했다.
필자는 ‘이 내용은 오히려 국회의원들이 반드시 들어야 할 이야기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정작 정책으로 연결할 수 있는 정치인은 이미 행사장을 떠난 뒤였다.
물론 정치인은 하루에도 여러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만큼 모든 행사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렇다면 차라리 참석하지 않는 것이 맞다. 축사만 하고 떠날 것이라면 처음부터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고 다음 기회를 약속하는 것이 오히려 행사에 대한 예의다.
참석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잠시 얼굴만 비추는 문화는 정치는 물론, 행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런 문화가 점점 심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SNS와 인터넷 홍보 경쟁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신문 기사와 방송이 행사 내용을 중심으로 보도했다면 지금은 사진 한 장과 30초짜리 영상이 모든 것을 대신하는 시대가 됐다. 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행사에서 무엇을 들었느냐보다 어디에 참석했고 누구와 사진을 찍었느냐가 돼버렸다.
정치가 내용보다 이미지가, 토론보다 노출이 우선되는 구조로 변한 것이다.
보좌진의 역할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정책자료를 준비하는 것이 중요한 업무였다면 지금은 SNS에 올릴 사진과 영상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한 일정이다. 행사장에 도착하면 축사 장면을 촬영하고 단체사진을 찍은 뒤 곧바로 인터넷 기사와 SNS에 게시한다. 그러면 국민은 그 사진만 보고 정치인이 그 행사 전체를 함께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실제 참석 시간은 10분이었지만 홍보 효과는 마치 몇 시간을 함께한 것처럼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반복되는 정치 문화다. 국회 토론회에서도, 지역 행사에서도, 포럼과 세미나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정치인은 바쁘다는 이유로 떠나고, 주최 측은 의전 때문에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언론은 가장 화려한 사진 한 장으로 기사를 마무리한다.
그렇게 행사의 본질은 사라지고 사진만 남는다.
필자는 이것이 단순한 의전 문화가 아니라 정치가 만들어내는 이미지 정치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정치권이 늘 가짜 뉴스를 근절하자고 말한다는 점이다. 물론 허위 사실을 퍼뜨리는 가짜 뉴스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실제 행사에 끝까지 참석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행사의 주인공이었던 것처럼 사진만 남기는 문화 역시 국민에게는 왜곡된 인상을 주는 것이다.
사실과 다른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것 또한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다.
그렇다면 책임은 정치인에게만 있는 것일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최 측 역시 이 같은 관행을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있다. 처음부터 “바쁘시면 축사만 하시고 가셔도 된다”고 말하는 순간 행사의 중심은 내용이 아니라 의전으로 바뀐다. 정치인의 참석 여부가 행사 성공의 기준이 되어 버리면서 정작 발표자와 토론자,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참석자는 들러리가 되고 만다. 이제는 이런 관행부터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
필자는 오히려 반대로 제안하고 싶다.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과감하게 초청하지 않는 것이다. 축사도 행사 내용을 끝까지 들을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기념사진 역시 행사가 모두 끝난 뒤 촬영해야 한다.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킨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만이 그 행사의 진정한 기록이자 역사다.
정당도 정치인의 행사 참석 문화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국회 출석률만 공개할 것이 아니라 포럼과 토론회, 지역행사에 얼마나 성실하게 참여했는지도 함께 평가해야 한다. 축사만 하고 떠났는지, 끝까지 남아 토론을 들었는지 정도는 행사 주최 측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이 공천과 의정활동 평가에 반영된다면 정치인의 행사 참여 문화도 달라질 것이다. 국민은 말보다 행동으로 정치인을 평가할 권리가 있다.
시민단체와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 지금까지는 누가 행사에 왔는지만 보도했지, 누가 끝까지 남아 토론을 경청했는지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제는 행사 참석의 ‘양보다 질’을 평가하는 문화가 필요하다. 사진 한 장보다 몇 시간을 함께하며 무엇을 들었는지가 더 중요한 시대가 돼야 한다. 그래야 정치도 보여주기 경쟁에서 정책 경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정치인은 행사장에 얼굴을 비추러 오는 사람이 아니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전문가의 의견을 배우기 위해 오는 사람이다. 특히 국가의 미래를 논하는 포럼이라면 더욱 그렇다. 발표자와 발제자가 수개월 동안 준비한 정책과 제안을 끝까지 듣는 것 역시 정치인의 중요한 책무다. 그 시간을 생략한 채 사진만 남기는 정치에서는 국민이 기대하는 변화도 만들어질 수 없다.
필자는 앞으로도 정치인이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볼 생각이다. 누가 축사만 하고 떠나는지, 누가 끝까지 남아 발표를 듣고 토론자들과 인사를 나누는지 국민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정치는 사진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행사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한 사람만이 그 행사의 의미를 말할 자격이 있다.
행사는 축사로 완성되지 않으며 오히려 끝까지 경청한 사람들에 의해 완성된다. 행사가 끝난 뒤 찍은 사진은 기록이지만, 축사만 하고 떠난 사람들이 찍은 사진은 기록이 아니라 연출이다. 정치가 진정 가짜 뉴스를 없애고 싶다면, 먼저 이런 ‘사진 정치’부터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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