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출입은행이 지난 13일 세계 금융시장에서 총 20억달러 규모의 글로벌본드를 발행했다. 3년 만기와 5년 만기로 각각 10억달러씩을 조달했는데, 단순히 많은 돈을 빌렸다는 사실보다 더 주목할 점은 채권 발행 비용을 결정하는 가산금리를 역대 가장 낮은 수준으로 낮췄다는 것이다.
3년물은 미국 국채금리에 18bp(0.18%포인트), 5년물은 21bp(0.21%포인트)를 더하는 조건으로 발행됐다.
특히 5년물 가산금리는 수출입은행이 지난해 9월 세웠던 기존 한국물 최저 기록보다도 0.05%포인트 낮았다. 국제금융시장이 한국수출입은행의 신용도와 대한민국의 산업 경쟁력을 그만큼 높게 평가했다는 의미다.
글로벌본드란 미국과 유럽, 아시아 등 여러 나라의 투자자를 상대로 발행하는 국제채권을 말한다. 쉽게 설명하면 한국의 금융기관이 세계 투자자들에게 “우리에게 돈을 빌려주면 정해진 기간 동안 이자를 지급하고 만기에 원금을 갚겠다”고 약속하며 외화를 조달하는 방식이다.
이번에 수출입은행이 조달한 20억달러는 환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우리 돈으로 약 2조원대 후반에 이르는 큰돈이다.
국내에서 원화를 모은 것이 아니라 해외 투자자들로부터 달러를 끌어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수출입은행은 이 외화를 다시 우리 기업의 수출과 해외사업, 미래 전략산업에 공급하게 된다.
이번 발행에서 자주 등장하는 ‘가산금리’라는 말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국제 금융시장에서는 미국 국채금리를 가장 안전한 기준금리로 삼고, 돈을 빌리는 기관의 신용도에 따라 금리를 조금 더 얹는다. 이때 추가로 붙는 금리가 가산금리다.
가산금리가 낮다는 것은 해외 투자자들이 그 기관에 돈을 빌려주는 데 위험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는 뜻이다. 1bp(베이시스포인트)는 0.01%포인트를 의미하며, 조달 금액이 10억달러, 20억달러로 커지면 불과 0.01%포인트의 차이도 장기간에는 상당한 이자 비용 절감으로 이어진다.
올해 글로벌본드 시장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 자금을 조달한 국내 정책금융기관은 한국산업은행이었다. 산업은행은 지난 1월 총 30억달러 규모의 글로벌본드를 발행하며 5년물에서 자체 역대 최저 가산금리를 기록했다. 발행 규모는 산업은행이 수출입은행보다 컸지만, 수출입은행은 3년물과 5년물 모두 한국 기관이 발행한 달러채 가운데 가장 낮은 가산금리를 기록하며 또 다른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다.
수출입은행은 이번 글로벌본드 발행 시기도 당초 계획보다 약 두 달 앞당겼다. 원래 9월 초로 예정했던 발행을 7월로 조정한 것은 하반기 글로벌 통화 정책의 불확실성과 지정학적 긴장이 커지기 전에 유리한 시장 환경을 선점하기 위한 판단이다.
국제 금융시장의 흐름을 읽고 최적의 시점을 선택한 것이다. 또 글로벌 투자자들에게 한국의 인공지능 육성 전략과 반도체·배터리·방산·조선 등 미래산업의 경쟁력을 적극적으로 설명하며 투자 수요를 끌어낸 것이다.
이 성과의 중심에는 지난해 취임한 황기연 수출입은행장이 있다. 황 행장 취임 당시에는 미국의 통상 압력과 한국 기업들의 대규모 대미 투자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수출입은행이 미국 투자 지원에 지나치게 집중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자칫 미국이 요구하는 투자자금을 뒷받침하는 기관처럼 비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정책금융기관의 자금이 국내 산업과 일자리보다 해외 투자에 더 많이 흘러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됐다.
그러나 황 행장 취임 이후 수은의 행보는 그보다 훨씬 넓고 능동적이었다. 수은은 미국 투자 수요에 대응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해외 자금을 낮은 비용으로 끌어와 국내 기업과 전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활용하고 있다. 이번 글로벌본드로 확보한 재원도 인공지능·반도체·바이오·배터리·방산·조선 등 미래산업에 공급할 계획이다.
해외로 나가는 돈을 지원하는 기관이 아니라 해외의 돈을 대한민국 산업으로 끌어들이는 금융기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이번 글로벌본드 발행을 단순한 채권 발행 뉴스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황 행장의 수은은 국내 수출기업이 어려움을 겪을 때 대출해 주는 수동적인 지원기관에 머물지 않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을 직접 찾아가 한국 경제와 기업의 가능성을 설명하고, 해외 투자자의 자금을 끌어와 우리 기업의 성장과 수출 확대에 투입하는 적극적인 역할로 이동하고 있다. 황 행장이 이끄는 수은의 새로운 도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고 있다.
과거 수출입은행은 우리 기업이 해외에 물건을 수출하거나 해외 건설사업을 추진할 때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 기관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물론 지금도 그 역할은 중요하다. 그러나 세계 경제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이제는 단순히 수출을 돕는 은행을 넘어 대한민국 산업의 공급망과 경제안보를 지키는 금융기관으로 역할을 넓혀야 하는 상황이 됐다.
여기서 말하는 ‘공급망’이란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원자재와 부품, 생산, 운송, 판매까지 이어지는 전체 연결망을 뜻한다. 예를 들어 전기자동차 배터리를 만들려면 리튬과 니켈 같은 핵심광물이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하고, 이를 가공하는 기업과 부품을 만드는 협력업체도 함께 움직여야 한다.
어느 한 곳에서라도 문제가 생기면 완성차 생산까지 영향을 받는다. 공급망이 이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된 이유다.
황 행장이 취임한 이후 가장 눈에 띄는 변화 역시 이 부분이다. 수은은 올해 사업계획에서 통상위기 극복, 국가전략산업 육성, 핵심 공급망 구축, 신수출시장 개척 등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향후 5년간 150조원 규모의 ‘수출활력 ON 금융 지원 패키지’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는 단순히 대출 규모를 늘리는 정책이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의 경쟁력을 지키기 위한 장기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최근 몽골과의 금융협력에서도 확인된다. 수은은 몽골 최대 민간은행인 무역개발은행과 3000만달러 규모의 전대금융 협약을 체결했다. 전대금융이란 수출입은행이 해외 금융기관에 자금을 공급하면 그 금융기관이 다시 현지 기업에 대출해 한국 제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제도다. 우리 기업은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하고, 현지 기업은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으니 서로 도움이 되는 구조다.
황 행장이 몽골을 주목한 이유도 분명하다. 몽골은 리튬과 희토류, 구리 등 핵심 광물을 풍부하게 보유한 자원부국이다. 앞으로 반도체와 배터리, 전기차 산업이 성장할수록 이런 광물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황 행장이 몽골을 중앙아시아와 동북아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한 것도 단순히 수출시장 하나를 넓히는 데 그치지 않고 미래 산업에 필요한 공급망을 미리 확보하겠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황 행장은 이재명 대통령의 몽골 국빈 방문 때도 동행해 핵심 광물 확보와 공급망 협력에 적극 협조했다. 정부가 외교의 문을 열면 수은은 금융으로 길을 만들고, 우리 기업은 그 길을 따라 해외시장으로 진출한다. 외교와 정책금융, 기업 활동이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황 행장은 공급망 상생금융 플랫폼도 본격적으로 가동하고 있다. 배터리와 원전 등 전략산업의 대기업뿐 아니라 부품과 소재를 공급하는 중소·중견 협력업체까지 함께 지원하는 제도다. 아무리 대기업이 경쟁력을 갖췄더라도 협력업체가 자금난으로 흔들리면 생산망 전체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급망은 가장 약한 고리에서 끊어진다는 말처럼 산업 경쟁력을 지키려면 협력 기업까지 함께 살펴야 한다.
수은은 핵심 광물과 에너지 분야의 펀드를 조성하고, 공급망안정화기금과 연계한 저금리 금융 지원도 확대하고 있다. 민간 금융기관은 위험 부담이 큰 해외 광산 개발이나 장기 자원 확보 사업에 쉽게 나서기 어렵다. 그러나 정책금융기관은 국가 차원에서 반드시 필요한 분야라면 보다 긴 안목으로 자금을 공급할 수 있다.
이것이 일반 시중은행과 수출입은행의 가장 큰 차이다. 시중은행은 수익성과 건전성을 우선해 자금을 운용하지만, 수은은 국가가 반드시 키우고 지켜야 할 산업에 장기 자금을 공급하는 정책 목적을 갖고 있다. 같은 글로벌본드를 발행하더라도 조달한 돈이 향하는 곳과 목적이 다른 것이다.
황 행장은 수은에서 30여년 동안 근무하며 기획과 인사, 리스크 관리, 개발 금융, 정부수탁기금 등을 두루 경험한 내부 전문가다. 조직의 기능과 정책 금융의 역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취임 이후 보여주는 변화도 단기적인 실적보다 수은의 체질과 역할을 바꾸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의 행보를 시간순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큰 그림도 드러난다. 공급망 상생 금융 플랫폼을 출범시키고, 핵심 광물 확보를 위한 금융 지원을 확대했으며, 몽골과 전대금융 협약을 체결했다. 이어 역대 최저 수준의 가산금리로 20억달러 글로벌본드 발행에 성공했다.
각각은 별개의 뉴스처럼 보이지만,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전략 국가와 협력을 확대해 그 성과를 국내 기업과 미래산업으로 연결한다는 일관된 전략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계 경제는 지금 보호무역과 공급망 재편, 지정학적 갈등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 있다. 이 같은 시대에는 기업의 경쟁력만으로 한계가 있다. 정부의 외교와 산업정책,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금융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수출입은행이 최근 보여주는 변화는 바로 이러한 국가 전략의 한 축을 담당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해외에서 조달한 돈이 국내 기업의 연구개발과 생산설비, 수출계약과 일자리로 이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정책금융의 선순환이다. 수은이 경제안보 금융기관을 지향하는 이유도 결국 대한민국의 미래 산업과 국민 경제를 지키기 위한 데 있다.
물론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정책 금융은 규모를 키우는 것만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산업과 기업에 어떤 방식으로 자금을 공급할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미래 성장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는 과감히 지원하되, 국민의 소중한 재원이 낭비되지 않도록 철저한 심사와 리스크 관리도 뒤따라야 한다. 정책금융에는 과감함과 신중함이 동시에 필요하다.
국민에게 정책 금융의 성과를 쉽게 설명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글로벌본드가 무엇인지, 공급망 금융이 왜 필요한지, 해외에서 조달한 자금이 어떻게 우리 기업과 국민 경제에 도움이 되는지 투명하게 알려야 한다. 국민의 이해와 공감이 뒷받침될 때 정책 금융의 가치와 정당성도 더욱 커질 수 있다.
대한민국 경제는 수출로 성장해 왔고 앞으로도 세계시장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다. 그 경쟁에서 이기려면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과 시장을 개척하는 외교,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뒷받침하는 금융이 필요하다. 해외의 자금을 대한민국으로 끌어오고 이를 우리 기업의 성장과 미래 산업으로 연결하는 것이 오늘날 수출입은행의 새로운 사명이다.
황기연 행장의 도전은 이제 시작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성과는 긍정적인 출발이지만 진정한 평가는 앞으로 우리 기업의 경쟁력이 얼마나 높아지고, 공급망이 얼마나 안정되며, 정책금융이 국민 경제에 어떤 실질적인 성과를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수출입은행이 수출기업을 돕는 은행을 넘어 대한민국 경제 안보를 지키는 금융의 방파제로 자리매김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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