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물> ‘현실판 하니’ 왕서윤

2026.05.11 09:48:21 호수 1583호

국내 여자 중 가장 빠른 중2 소녀

[일요시사 취재2팀] 김유미 기자 = 고작 중학생이다. 한창 자랄 나이인 14세. 왕서윤이 대학부와 실업팀 언니들을 모두 따돌리고 올해 국내 여자 100m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스포츠 애니메이션 주인공과 같은 나이라 현실판 ‘달려라 하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2일 전라남도 목포종합운동장 육상경기장. 여자 중학생 여덟명이 날렵하고 가벼운 몸에서 긴장을 덜어내려 온몸을 두 손바닥으로 두드리고 있다. 전국종별육상선수권대회 3일 차, 여자 중등부 100m 결선이 치러지기 직전이다.

타고난
유연성

ENG 카메라 기자가 1번 레인부터 순차적으로 각 선수를 촬영하며 소개한다. 그때마다 긴장한 얼굴들이 잠깐씩 풀어지며 수줍으면서도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나온다. 영락없는 중학생이다. 그중에서도 6번 레인에 선 12번 선수가 제일 눈에 띈다. 두 손으로 카메라를 향해 하트를 그리며 웃는 여유까지 보여준다.

준비 시간을 모두 소진하기까지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긴장을 푼다. 신호에 따라 스타팅 블록에 두 발을 올리고, 두 손으로 땅을 짚는다. 딱! 신호총 소리에 상체를 편 선수들이 일제히 결승선을 향해 쏟아진다.

초반에는 비슷하게 달려 나가는 것 같더니 50m 라인을 지나자마자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양팔이 리드미컬하게 흔들리고 뒤꿈치가 허벅지에 닿을 듯 무릎이 빠르게 구부러지는 선수, 왕서윤이다. 매 초 격차가 벌어지더니 마침내 왕서윤이 결승선을 밟는다.

내달리던 속도를 바로 줄이지 못해 한참 트랙을 뛰던 왕서윤이 기록판을 확인한다. 11초83. 눈이 휘둥그레진 왕서윤이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으나 웃음까지는 감추지 못한다. 마침내 트랙에 멈추어 선 그가 동료 선수를 껴안는다.

여자중등부 100m 결선에서 왕서윤이 11초83을 기록하며 부별 한국기록(종전 11초88)을 경신했다. 2009년 이후 17년 만에 갈아치운 기록으로, 이번 대회 여자 일반부(성인) 100m 1위에 오른 김주하 기록인 11초87보다 0.04초 앞섰다.

왕서윤은 서울체육중학교 2학년으로, 최근 두 차례 개인 종목에서 대회 신기록을 경신했다. 무서운 성장세라는 평이 뒤따르는 이유다. 2위는 권제희(언남중, 12초22), 3위는 김아인(광주체중, 12초46)이 차지했다. 두 선수 기록 역시 만만찮다는 점에서 한국 단거리 육상에 희망을 거는 이들이 많아졌다.

왕서윤은 경기를 마치고 “날씨가 좋지 않고 컨디션도 좋지 않아 12초대 기록을 예상했는데, 11초대에 진입하며 부별 한국 기록을 경신하게 돼 매우 기쁘다”며 “가르쳐 주신 코치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앞으로도 이 기록을 넘어설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윤여춘 육상 해설위원은, 당일 “왕서윤 선수가 우리나라 시즌 고등학교, 대학교, 일반부 전부 다 (포함)해서 최고 기록을 수립했다”며 한국 육상계에 신예가 등장했음을 알렸다. 그러면서 “이 기록은 어떻게 보면 굳어진 기록이다. 깰 수 없을 것”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2012년 11월생인 왕서윤은 만 나이로 13세5개월이다. 1m63㎝ 키로 향후 성장 가능성이 크다. 체육 교사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운동 감각을 물려받았다고 전해진다. 여동생과 남동생 역시 증산초등학교에서 육상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날씨 좋지 않고 컨디션 좋지 않은데…
성인 선수들 모두 제치고 최고 기록

왕서윤이 처음 육상 기록판에 이름을 들이민 때는 지난 2023년이다. 증산초 4학년 때 취미로 육상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높이뛰기와 멀리뛰기 선수로도 활약했다. 그러던 중 1년 만에 100m 공식 대회에서 13초13 기록을 썼다. 추가로 1년이 더 지난 6학년 때는 12초82를 기록했다.

서울체중에 진학한 이후에는 단거리 달리기에만 집중했다. 지난해 4월에는 춘계전국초중고등학교 육상경기대회 여자중학교 1학년부 100m 결승에서 12초33 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 여기에서 나아가 최근 11초94로 본인 기록을 다시 한번 경신했다. 육상계에서는 단거리 선수가 이토록 빠른 기간 안에 기록을 단축하는 것이 ‘이례적’이라 평한다.

왕서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유연성이다. 보통 단거리 경기에서는 폭발적 스퍼트로 승패가 갈리는데, 그가 연출하는 경기 장면에서는 출발 이후 속도에 긴장감이 붙는다. 스퍼트에서 아낀 힘을 막판까지 끌어내는 것이다.

윤 해설위원은 “왕서윤은 힘으로 뛰지 않는다. 800m 선수처럼 리듬과 유연성을 앞세운다. 따라서 폭발적인 스퍼트 없이도 후반까지 빠른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말 그대로 상당히 부드럽다. 어깨에도 힘이 전혀 안 들어가고. 부드러운 유연성이 있어야만 기록이 자꾸 단축된다”는 것이다.

윤 해설위원은 “한국 단거리에서 이런 선수는 없었다. 미국 선수 앨리슨 펠릭스(2012 런던올림픽 200m 금메달리스트)를 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왕서윤을 지도하는 이강민 코치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라며 왕서윤이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으로 만들어낸 기록”이라고 칭찬했다. 덧붙여 “스타트 후 가속 구간으로 접어드는 과정이 부드럽다”며 “천부적인 재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이 코치는 “정신적으로 강한 아이다. 한번 집중하면 몰두해서 꼭 이뤄낸다.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데, 즐기면서 훈련을 한다. 미래가 기대된다”고도 했다.

이 코치는 왕서윤이 성장기인 점을 고려해 근력 운동을 제한하는 등 훈련량을 조절하고 있다. 현재 왕서윤은 주중 방과 후 3시간, 토요일 5~6시간 정도를 훈련 시간으로 쓰고 있다.

이 코치는, 왕서윤이 ‘훈련 중독형 선수는 아니’라고 한다. 스스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며 훈련하는 자기 주도형 훈련을 운영한다고. 성격도 밝고 대인관계가 원만한 것으로 알려졌다. 선후배 관계도 좋고 팀 적응력도 뛰어나다. 경기 때마다 동료 선수들을 격려하는 모습에서 그의 성격을 실감할 수 있다.

체육인의 피
신기록 행진

김건우 KBS 스포츠 해설위원은 “왕서윤의 재능은 10년에 한 명 정도 나올 수준”이라며 “지금은 자고 일어나면 기록이 느는 시기에 접어든 것 같다”고 했다. 윤 해설위원 역시 “잘 성장해 고등학생이 되면 한국 기록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왕서윤을 응원했다.

이번 제55회 전국종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신기록 행진이 이어졌다. 한국 신기록 2개, 대회 신기록 3개가 쏟아졌다. 그중 하나는 왕서윤이 쓴 것이고, 남자 일반부 100m 예선에서는 나마디 조엘진(예천군청)이 10초19로 대회 신기록을 경신했다.

여자 단거리 경기에서 왕서윤이 돋보였다면, 남자 단거리에서는 단연 조엘진의 활약이 눈부시다. 그는 한국 육상 단거리 기대주로 꼽힌다.

조엘진은 이 대회 첫날 남자 일반부 100m 예선에서 10초19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종전 대회 기록(10초22)보다 0.03초 앞당겼다. 지난해 실업 육상에 이름을 알린 그는 개인 최고 기록(종전 10초23)까지 경신했다.

참고로, 남자 100m 한국 기록은 김국영이 2017년 6월 코리아오픈 국제육상경기대회에서 세운 10초07이다.

다만 조엘진은 이어진 준결선에서 10초22를 기록해 결선 진출에 성공했으나, 불안정한 날씨로 부상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결선 출전은 포기했다.

그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 활약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달 14일 일본 시마네현 이즈모에서 열린 요시오카 그랑프리 남자 100m에서 개인 최고 기록(10초23)으로 1위에 올랐고, 이번 대회에서도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 밖에도 남자 중등부 창던지기에서는 김정윤(울산 서생중)이 69m62로 한국 기록을 경신했다. 남자 고등부 원반던지기에서는 손창현(구미 금오고)이 53m89로 대회 신기록을 썼다.

여자부에서도 기록 깨기가 이어졌다. 여자 중등부 100m 허들에서 이하늬(부산 대청중)가 14초28로 27년 만에 대회 신기록을 갈아치웠다.

암울한 육상계
날아든 희소식

특히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상혁(용인시청) 등도 기대감을 모은다. 이들은 차세대 스타로까지 불리고 있다. 이 코치는 “한국 육상에서 남자, 여자 선수 모두 상승세를 탄 것 같다”며 “지도자들도 조금씩 변화했다”고 평했다.

또 “이전에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최근 몇 년 새 훈련에 대한 고민, 외국의 훈련법 등을 같이 나누며 공부하는 시간이 늘었다”고 회상했다.

한때 100m 여자 한국 기록 보유자 이영숙은 기록 단축이 어려운 한국 육상계를 진단한 바 있다. 아시안게임 메달권 기록이 지난 30여년간 약 0.5초 전후로 단축됐음에도 한국 기록은 제자리걸음이었기 때문.

그가 가장 우려한 것은 얇은 선수층이었다. 이영숙은 “선수층이 얇아 벽을 깨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다. 우수 선수를 향한 격려와 유망주 발굴이 더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어쩌면 한국 육상계는 이번 목포 대회에서 이 우려를 종식할 열쇠를 찾을 수 있을 테다.

대한육상연맹 역시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이 코치는 “연맹에서도 고민을 많이 하고 계실 것”이라며 “유망주 선수들이 반짝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한국을 대표해 성장할 수 있는 선수로 만들 수 있는 여건 조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코치는 또 “어린 선수들이 일찌감치 국제 대회에 나가 경험을 쌓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면서 “지난해 몇몇 선수들과 함께 해외로 나가서 훈련하고 돌아왔다. 선수에게는 물론, 지도자인 나에게도 도움이 많이 된 경험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다양한 경험을 쌓아 국제 경쟁력을 더 키울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재능 있는 신예 선수들이 등장했고,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들이 이들을 잘 이끌며 한국 육상의 미래를 다시 쓰고 있다.

이제 왕서윤이 넘어야 할 산은 국내 기록 보유자 이영숙이다. 현재 안산시청팀 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1994년에 여자 100m 한국 기록 11초49를 수립했다. 왕서윤의 이번 기록과는 0.34초 차이. 단거리에서는 결코 작은 차이가 아니지만, 왕서윤의 나이를 생각하면 결코 비현실적인 간격도 아니다.

11초83서 0.34초 앞당기면 한국 기록
세계 신기록 10초49까지 1초34 남아

이영숙은 왕서윤과 비슷한 시기인 초등학교 3학년 시절 단거리 육상을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소년체전 3관왕을 하면서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대학교 1학년이던 1984년부터 10여년 뒤인 1994년까지 여자 100m 종목 한국 신기록을 일곱 차례나 갈아치웠다. 전국체전 여자 100m에서 11연패를 달성했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1990 베이징아시안게임 여자 100m에서 동메달(12초10)을 목에 걸었다. 그는 해당 종목 마지막 한국인 메달리스트다. 이후 4년 뒤에는 서른이 넘은 나이로 한국 기록(11초49)을 무려 2차례나 수립했다.

이영숙이 세운 1994년 제48회 전국육상선수권 대회 여자 100m 결선 및 같은 해 열린 후쿠오카 국제슈퍼육상경기대회에서 세웠던 ‘11초49’ 한국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왕서윤은 지금보다 0.34초 이상 더 빨라져야 이 기록을 깰 수 있다.

왕서윤이 한창 성장 중인 중학생이라는 점, 성장세가 가파르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영숙이 낸 기록도 따라잡으리란 기대감이 쏟아지고 있다. 왕서윤을 지켜봐 온 이 코치는 “지금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경기 경험을 더 쌓으면 내년 정도면 성인 여자 100m 한국 기록에도 충분히 도전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국 기록을 다시 쓰고 나면, 왕서윤은 이어서 세계 신기록에 도전할 수 있다. 100m 여자 세계 신기록인 10초49는 미국 선수 그리피스 조이너가 썼다. 1988년 서울올림픽 미국 선발전에서 나온 기록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어떤 선수도 닿지 못했다.

당시 풍속 계측 오류 논란 등이 있었기에 이 기록을 깨기 쉽지 않으리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많다. 그때 함께 세운 200m 기록 21초34 역시 같은 이유로 요지부동이다. 자메이카 선수 셸리 앤 프레이저 프라이스, 일레인 톰슨 헤라 등이 초를 줄였지만, 0.1초 차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육상 전문가들은 조이너가 세운 기록을 “다른 시대의 기록”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신기록이 깨지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곧 다가올 일이라는 뜻일 수도 있을까. 냉정한 트랙 위 승부의 세계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가장 오랫동안 깨지지 않은 기록은 여자 800m로, 43년째 붙박이다.

체코 선수 야르밀라 크라토츠빌로바가 1983년에 800m 1분53초28, 난공불락이라 할 만한 기록을 써냈다. 2024년 파리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킬리 호지킨슨(영국)이 24년 만에 실내기록을 깨고, 실외기록도 1분54초61까지 따라잡았지만, 아직도 한참 남았다.

세계 향해
전력 질주

왕서윤은 과연 ‘붙박이’ ‘요지부동’ ‘독보적’ ‘다른 시대의 기록’ ‘난공불락’ 등으로 수식할 법한 단거리 육상 기록을 깨나갈 수 있을까. 이번 목표 대회를 기준으로 왕서윤과 함께 트랙 위를 달리며 초를 줄여나갈 어린 선수들에게도 기대가 실리고 있다.

기량 좋은 선수는 준비됐다. 이제 우리나라에서 볼트 같은 선수가 나오기까지, 역량 있는 선수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다.

<younm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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