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이 길이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여기서 멈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체가 될 뿐이다! 그러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나를 좋아할 수 없다! 죽어서도 퉁퉁 분 내 시체가 그놈들의 놀림감이 되겠지.”
흐린 한 점 불빛
용운은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컴컴한 바다 속에서 그에겐 다만 흐린 한 점 불빛이 보일 뿐이었다.
천둥 번개가 치고 파도는 가파른 벼랑처럼 조금이라도 기어오르려는 그를 밀어 떨어뜨렸다.
그러나 이제 용운은 지레 겁을 먹거나 기가 꺾이지만은 않았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견뎌내자!
그는 파도에 휩쓸리면서도 결연한 동작으로 목표인 마산포의 불빛을 향해 묵묵히 나아갔다.
한 걸음 밀려나면 이를 악물곤 한 걸음 나아갔다. 목표도 현재도 두려움도 죽음까지도 모두 다 잊어버린 무심함 그 자체로 바다와 맞서 있을 뿐이었다.
하나의 물거품이랄까. 파도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킬킬거리며 그를 갖고 논다. 거대함의 장난질.
용운은 허덕거리며 쓴물을 들이켠다. 강철 같은 파도에 뺨을 얻어맞곤 팽개쳐져도 낙심하지 않았고, 마침 밀려가는 파도를 타고 운좋게 성큼 전진해도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바닷속에서 바다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그 바다를 이용하여 소망하던 뭔가를 향해 발버둥치고 있는 하나의 미천한 생물일 뿐이었다. 낙엽이 아닌 뜻을 지닌 생명…….
그렇긴 해도 지난 초여름에 틈을 내어 기본적인 개구리헤엄뿐 아니라 여러 가지 응용 수영법을 익히고 실력을 쌓아 둔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정신력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외롭게 투쟁하다가 물고기의 밥이 되기가 십상일 터였다.
다리가 부러진 새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며, 날개뿐만 아니라 다리에도 힘이 있어야 비로소 날개짓을 할 수 있다는 어떤 책의 구절이 떠올랐다.
어둑한 새벽 바다는 말 그대로 고해(苦海)였다. 용운은 그 속에서 안간힘으로 몸부림치면서도 얼핏얼핏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을 반추하고 있었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후 근본도 알 수 없는 거지 신세가 되어 떠돌았던 날들……
그리고 죄없이 잡혀와 어린 머리와 가슴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많은 일을 겪었다. 그것에 비하여 이 바다는 오히려 순수하고 아름답지 않은가?…… 하고 용운은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렸다.
“그렇다! 세상이 아무리 추악하더라도 그것에 물들어 자기를 더럽히거나 타락하면 바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넘어, 내게 주어진 온갖 억울함과 고통을 잘 활용하고 이겨내어, 과거나 지금보다 더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지 않으면…… 지금 이런 생사를 버린 헤엄도 필요없다!”
그는 입속에 들어온 바닷물을 긴 숨과 함께 내뱉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도 모르고 부모님도 모르는 것을…… 억울하고 서글픈 과거를 버리고…… 나 스스로 참다운 나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 물론 그러려면 이 바다부터 건너가야만 하겠지…….”
막막한 시공간 속에서 용운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물살을 헤쳐 나갔다.
심연 속의 고독, 공포…… 미지의 괴물들이 발을 휘감아 끌어들이는 듯하다. 몸이 뻣뻣해지며 타인의 물체만 같다.
어느새 비가 그치고 먼동이 트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도 몰랐다.
한참 후에 바다의 물이랑에 여명이 비쳐 그 현란한 빛이 금꽃뱀처럼 잔잔히 퍼덕거릴 때야 머리를 들어 심호흡을 했다.
정신력으로 계속 수영
드디어 들어선 마산포
바로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포구의 불빛은 그때부터 꺼져 가고, 그토록 힘겨웠던 여로(旅路) 뒤에 수평선으로부터 맑게 씻긴 태양이 붉게 떠오르고 있었다.
용운은 수면으로부터 상체를 들고 일어섰다. 그는 태양 빛이 비쳐 각양각색으로 변하는 해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버지…… 알고 보면…… 당신께서도 원래 포악하기보다는 더 나약해서…… 그런 이상스런 사이비 종교에 홀려 자식까지 버린 것이 아닌가요? 만약 제정신이었다면 그럴 수가 있었을까요. 아버지, 당신께선 저를 모르겠지만…… 저는 차차 당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 알아갈 거예요.”
그는 눈을 들어 새벽 노을이 진하게 퍼져 가는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엄마도 강한 게 아니라 약해서…… 그때 저를 버린 게 아니라…… 어쩌면 어떤 사정 때문에 잃어버리고 찾으려 애쓰다 그냥 가신 거겠지요?”
용운은 바다를 벗어나 해변으로 올라섰다. 조약돌들이 발 밑에 밟혀 오그락 가그락 감질맞은 소리를 냈다.
거센 파도에 매일 시달리면서도 울기보다는 웃는 빛으로 내면을 다져 가는 조약돌들…… 용운은 그중 하나를 집어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용운이 작은 마을 어귀에 도달한 것은 새벽이 다 열리고 다시 하루가 시작될 즈음이었다.
그리 위험한 곳은 없었으나 참으로 멀고 더딘 걸음이었다. 땀투성이가 되어 도착한 용운은 숨 돌릴 틈도 없이 샘터에서 몸을 씻고 복장을 갖춘 다음 찔레덩굴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다시 하루낮 하룻밤을 꼬박 산길을 걷고 나서 이튿날 새벽, 드디어 단단한 땅을 밟고 마산포에 들어섰다.
‘피에로 형, 잘 있어. 어디로 가든 형을 잊지 않고 행복을 빌어줄게. 박꽃 누나도…….’
아득한 선감도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처없는 나그네처럼 어느 한적한 들길로 내려서게 되었다. 모든 게 싱그러웠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정겹게 느껴졌고, 길섶에 뽀얗게 먼지를 쓰고 앉은 이름 모를 풀꽃까지도 아름답게 미소짓는 듯했다.
느티나무 위에서 새소리가 물었다.
정처없는 나그네
“얘, 너 어디루 가니?”
“그냥 발길 따라 간단다. 여긴 선감도가 아니니까.”
“선감도가 어디니?”
용운은 대꾸하지 않고 내처 걸어갔다.
“이 세상엔 없는 곳이지. 천당이나 천국보다 더 아름다웠던 지옥이니까…….”
용운은 수풀 속에서 뱀딸기를 하나 따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번 회를 끝으로 <선감도> 연재를 마칩니다.
그 동안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