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연예계엔 계약 위반 여부를 둘러싼 소송이나 분쟁이 하루도 쉬지 않고 진행되고 있다. 연예계에 ‘계약 불감증’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계약은 연예인의 활동을 규정하는 법적 약속으로 반드시 지켜져야 할 강제성을 지니고 있지만 지켜지지 않는 사례가 부지기수다. 연예 기획사 전속, 드라마 및 영화 출연, 음반 발매, CF 출연 등 연예계 전방위에서 계약 경시 풍조가 발견되고 있다. 계약 기간이 분명히 남아 있음에도 새로운 계약을 맺는가 하면, 계약이 본격적으로 발효하기도 전에 종전 계약을 무시하는 계약을 맺기도 한다. 계약의 ‘법적 구속력’을 너무도 가볍게 무시하는 것이다. 몇몇 연예인은 계약이 법적 구속력을 지녔다는 사실 자체를 아예 모르는 듯 행동하기도 한다.
배우 이준기가 소속사로부터 전속계약 위반 혐의로 피소를 당해 법적공방이 불가피하다.
지난달 9월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따르면 이준기의 소속사 측은 “이준기와 매니저 K씨가 무단 계약 및 활동을 하고 회사 몰래 수익금을 빼돌렸다”며 5억원 상당의 소송을 제기했다.
소속사 측은 “이준기는 2004년 5월부터 만 5년간 타사나 제3자를 위한 연예활동 혹은 이와 관련, 계약을 할 수 없다. 하지만 K씨와 공동 출자한 매니지먼트사를 세우고 몰래 출연하는 등 계약을 위반했다”고 밝혔다.
소속사 측은 이어 “이준기와 K씨가 이런 과정에서 수익금으로 10억원을 착복했다”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상태로 “우선 손해배상 일부로 5억원을 배상금으로 청구하라”고 주장했다.
소속사 측은 또 “남은 전속 계약기간에 방송 출연과 연예활동을 금지해야 하며, 이준기와 K씨의 대응을 지켜보면서 연예활동을 금지하는 가처분이나 형사 고발을 진행할 예정이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이준기는 자신의 미니홈피를 통해 최근의 심경을 고백했다. 이준기는 지난달 9월28일 오후 미니홈피에 ‘대만 가족들께… 그리고…’라는 제목의 글을 올려 “우리가족(팬)들에게 좋지 않은 소식만 들린 오늘이네요. 미안해요”라며 “저 자신에 대한 믿음에 조금의 의심도 갖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현명하게 잘 대처할 테니 마음 다치지 않길 바래요”라고 말했다.
한편, 이준기 측은 지난달 2월 매니지먼트사에 계약 해지 소송을 제기했으며, 지난달 6월에는 소속사가 이준기에게 상당한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형사고소를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진실을 향한 서로간의 첨예한 입장차이가 어떻게 좁혀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최근 연예계에 만연한 계약 불감증과 계약 경시 풍조의 배경엔 지나치게 커진 연예계 스타의 위상이 있다. ‘스타 캐스팅=흥행’이라는 함수 관계가 대체로 성립되는 과정에서 드라마나 영화 제작에 ‘스타 시스템’이 주류로 자리 잡게 되고, 스타 연예인의 위상이 극단적으로 높아지는 ‘스타만능주의’의 병폐로 이어진 것이다.
연예인들과 소속사 간 분쟁은 대체로 ‘해 준 게 뭐가 있느냐’와 ‘계약을 파기했으니 위약금을 물어내라’는 두 가지 주장으로 맞선다. 제각기 다양한 주장들 만큼이나 법정 분쟁시에도 각 케이스 별로 승자가 엇갈린다.
스타들은 몸값 급상승 효과를 즐기는 한편으로, 계약 자체도 가볍게 여기게 됐다.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몸값은 종전 계약 파기에 대한 위약금을 치르고도 남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부 연예 기획사나 영화 또는 드라마 제작사는 위약금 이상의 몸값을 제시하며 스타들을 유혹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계약의 법적 구속력은 무의미한 휴지조각이 되곤 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계약 당사자간의 감정 싸움은 추악하기 그지없이 펼쳐져 연예계의 구조적 후진성을 드러낸다. 사소한 부분에 대한 흠집 잡기부터 사생활에 대한 공격까지 이어진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미지 실추로 인한 상품성 손상, 신뢰도 추락, 생명력 단축 등의 악영향을 미치는 결과가 된다.
연예 기획사 관계자들은 억울하다고 볼멘 소리다.
가요계에서 신인의 경우 평균 계약 연수는 5년. 계약 효력의 발생 시점은 기획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체결 순간부터다. 그렇게 되면 5년 동안 출시할 수 있는 음반은 많아야 3~4장. 결국 가수가 한참 빛을 보기 시작할 무렵 재개약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
기획사의 한 관계자는 “10년 계약을 한다는 것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계약의 세부 조건으로 연예인과 기획사가 사전에 충분이 숙지하지 않은 상태에서 도장을 찍어 발생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연기자 기획사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 발생 이익을 5대5로 나누는 것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3년 정도 걸려 어렵게 얼굴을 알리게 만들었을 때쯤 벌써부터 다른 기획사들이 물밑 접촉을 시도한다는 것.
더 큰 문제는 연예인은 기획사를 옮겨야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인 때부터 모습을 보아온 원제작자에게는 하기 싫은 스케줄을 빼 달라거나 사소한 것에 대해 나은 대우를 요구하는 것 등이 쉽지 않으나 스타급에 올라 거처를 옮기면 부담 없이 요청할 수 있다.
기획사의 한 관계자는 “잘못된 계약 관행은 고쳐지는 것이 옳다. 그보다 이 바닥의 관행을 사전에 연예인에게 충분히 숙지 시켜주고, 활동을 하면서도 많은 대화를 통해 상호 오해를 만들지 않는 경영이 우선 되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연예계에 계약불감증이 만연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한국 연예계의 계약 관행의 후진성을 들 수 있다. 계약서 조항이 애매모호하게 구성되는 부분이 많아 해석 여부에 따라 다양하게 파악될 수 있다. 계약 기간에 대한 부분도 확실히 명시되지 않기에 이를 악용할 여지도 충분하다. 또한 계약 내용의 상당 부분을 구두 합의로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어 계약을 둘러싼 분쟁의 소지는 계약 순간부터 존재한다고 할 수도 있는 형편이다.
최근 영화나 드라마 제작사가 우후죽순처럼 많아진 점도 계약 경시 풍조의 이유가 되고 있다. 몇몇 제작사는 충분한 제작 여건을 지니지 않은 채로 일단 스타부터 잡고 보자는 심산으로 계약을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제작이 무산되면 해당 스타는 가볍게 계약금을 챙긴다. 계약을 우습게 여기는 상황이 된다.
계약 불감증에 대한 대안으로 연예계 일각에선 표준계약서 도입의 추진 움직임이 있다.
방송사, 영화 및 드라마 제작사, 연예 기획사 등 연예 관계자들이 이해관계를 포괄할 수 있는 공통의 기본 계약서를 만들자는 움직임이다. 문제시 될 수 있는 모든 사항을 구체적으로 명시해 문제의 소지를 사전에 방지하고, 계약 당사자들이 약간의 조항을 조정 및 추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나치게 치솟은 스타들의 몸값 억제에 대한 점도 표준계약서 도입 논의에 포함돼 있다.
김태희 문근영 등이 소속된 연예 기획사 나무엑터스의 한 관계자는 “최근 연예계의 스타만능주의와 계약을 가볍게 여기는 풍조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모든 연예 관계자가 뜻을 모아 표준계약서를 만드는 것이다. 이해관계가 상이한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하기에 다소 손해를 본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겠지만 양보와 조절을 통해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