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 창업주 조중훈 <사업은 예술이다> 출간

[일요시사 경제2팀] 김해웅 기자 =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었던 건 날 수 있다고 믿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을 창업한 정석(靜石) 조중훈 회장의 일대기를 정리한 전기 <사업은 예술이다>가 전격 출간됐다.

지난 1일 창립 70주년을 맞은 한진그룹은 70년 전, 신용 하나로 사업을 시작한 청년 조중훈의 도전과 열정, 수송보국의 창업정신과 경영철학을 되새기기 위한 추모사업의 일환이자, 창업주의 업적을 통해 그룹 성장의 역사적 기록을 남기고, 나아가서는 대한민국 교통·물류산업의 발전사를 조명하기 위해 2010년부터 전기 출간을 준비해 왔다.

책을 쓴 이임광 작가와 함께 ‘사업의 예술가’ 조중훈 회장이 평생에 걸쳐 닦아놓은 길을 걷다보면, 끝없이 펼쳐진 땅길, 바닷길, 하늘길을 따라 일제강점기 절치부심 주경야독하던 식민지의 소년과 원대한 꿈을 품고 현해탄을 건너는 소년, 상하이에서 인천항으로 푸른 꿈을 싣고 돌아오는 청년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베트남 퀴논항에서 사선을 넘는 전설의 수송용사들과 항공의 불모지를 이륙한 파란 점보기가 죽의 장막을 뚫고 만리장성을 넘어 파리로 날아가는 가슴 뭉클한 대한민국 산업발전의 성장기와 마주할 수 있다.

전기 <사업은 예술이다>는 조중훈 회장의 어린 시절과 한진상사 창업 과정을 그린 <파도마저 삼킨 오디세이>, 베트남 전장에서의 숨막히는 수송작전을 담은 <퀴논의 전설>, 한진그룹 도약 계기가 된 대한항공공사 인수와 항공사로서의 발전 과정을 그린 <하늘길을 열다> <대한의 날개에서 세계의 날개로>를 비롯해 <해운왕 꿈을 이루다> <수송외길을 위한 변주곡> <열정의 민간 외교가> <인재의 숲을 가꾼 정원사> <인생과 사업의 예술가> 등 총 9장 392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년은 바다를 꿈꿨고 바다는 소년의 꿈을 품었다

‘주경야독으로 단련한 소년은 기관사가 되어 중국으로 간다. 상하이에서 본 중국의 바다는 일본의 바다보다 넓었다. 세계인이 몰려드는 그곳에서 그는 '지금은 일본 배를 타고 왔지만, 언젠간 나의 배를 타고 오리라!' 다짐한다.' <파도마저 삼킨 오디세이> 중에서
 

어려워진 가정 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해원양성소에 들어가 혹독한 훈련을 견디며 기술을 익힌 소년 조중훈은 일본 조선소의 수습기관사로 발탁되어 열입곱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도 타고난 성실함으로 낮에는 작업장에서 기술을 익히고, 밤에는 하숙방에서 독서에 몰두했다.

이후 외항선의 선원이 되어 중국 상하이와 홍콩 등을 항해하며 '손님의 마음을 읽는' 유대상인의 장사법과 '철저한 품질관리'라는 개성상인의 정신을 배운다. 세계문물을 접하며 사업의 철학을 마련한 조중훈 회장은 1945년 11월 ‘한민족(韓民族)의 전진(前進)’이라는 의미를 담은 ‘한진상사’ 간판을 내걸었다.

전쟁과 그림은 멀리서 봐야…사업은 더 멀리서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었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누구나 기회를 잡는 것은 아니다. 조중훈은 그것이 기회임을 포착하고 모든 걸 걸었기에 기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전쟁과 그림은 멀리서 봐야 한다. 멀리서 봐야 한 폭의 그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쟁도 전투만 보아서는 안 되고 전장을 둘러싼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퀴논의 전설> 중에서


한진그룹은 월남전 당시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맡으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조 회장은 1965년 12월 한국용역군납조합 이사장으로서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동남아 순방을 하면서 사업상의 중대한 계기를 맞게 된다. 마지막 방문지였던 베트남의 퀴논 항에서 하역 순서를 기다리기 위해 외항에 정박 중인 30여 척의 화물선들을 보는 순간, 한진상사가 퀴논항의 군수품을 하역·수송하면 큰 사업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 조중훈 회장은 펜타곤을 방문하고, 퀴논에 파병중인 미군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1966년 주월 미군사령부와 790만 달러의 군수물품 수송 계약을 체결했다. 그 후 1971년 종전 시까지 5년간 벌어들인 외화는 총 1억5000만 달러에 달했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125~200달러 안팎으로 한진이 벌어들인 외화가 얼마나 큰 금액인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일생일대의 모험…세계의 하늘길을 연 '대한의 날개'

‘적자투성이 국영 항공사를 구할 사람은 조중훈밖에 없었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도전을 포기했다면 지금의 대한항공은 없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항공이었지만, 조중훈은 기왕할 거라면 예술처럼 하고 싶었다. 그 시절 한국에서 항공사를 운영하고 성장시킨다는 것은 라이트 형제가 하늘을 날아보겠다고 했을 때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결국 육중한 쇳덩어리가 새처럼 하늘을 날아오른 것처럼 그는 척박한 땅에서 고사 직전의 항공사를 이륙시켰다.’ <하늘길을 열다> 중에서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는 데는 사업가로서의 자질과는 별도의, 또 다른 의미의 결단력이 필요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동남아 11개국 항공사 중 11번째가는 부실 투성이의 항공사였고, 당시로선 항공운송 사업의 미래도 불투명했다. 정부는 조중훈 회장이 ‘한국항공’을 설립했던 경험이 있었고, 그 동안의 사업 과정 및 수송산업의 월남 진출을 통해 알려진 추진력과 애국적인 열정 등을 감안해 그를 대한항공공사 사업자로 주목하고 있었다.

조 회장은 여러 번 당국의 대한항공공사 인수 요청을 고사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고,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까지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 아니냐.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전용기는 그만두고서라도 우리나라 국적기 타고 해외여행 한 번 해보는 게 내 소망”이라는 간곡한 권유를 받아 만성적인 적자를 보이고 있던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 인수를 반대하는 회사 중역들에게 “돈을 벌자고 시작했다가 밑지는 사업도 있고, 밑지면서도 계속 해야 하는 사업이 있는 것”이라며 대한항공공사 인수는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임을 강조했다.

“선장이 키를 놓지 않는 한 전진하는 배는 흔들리지 않는다”

‘창조적 파괴로 한진해운을 완전히 바꾸어야 했다. 조중훈은 하늘에서 얻은 경험을 바다에서 구현하리라 마음먹었다. 항공사의 경영기법을 해운사에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세계 해운 역사상 유례가 없는 회기적인 구상이었다.’
 

‘기업재건이 탄력을 받으면서 휘청하던 한진호는 다시 균형을 잡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항공사의 장점으로 재무장한 한진호는 하늘을 나는 배로 환골탈태했다.’<해운왕 꿈을 이루다> 중에서

조 회장은 1987년 11월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던 대한선주를 한진이 인수할 것을 권유 받자 ‘유일한 육·해·공 종합수송기업으로서 한국의 수송업체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면서 타산적인 차원으로 관계자들의 고뇌와 업계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면서 대한선주를 인수하여 한진해운과 합병했다.


대한선주의 채무까지 떠안은 한진해운은 선박별 운항스케줄, 예약현황, 화물추적 등의 업무전산화 및 선원들의 근로조건 개선 등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함으로써 인수 2년만인 1989년에는 경영정상화를 이루어 126억원의 영업이익을 달성할 수 있었다.

모르는 사업은 손대지 않는다. 조중훈 회장의 ‘수송외길’

‘모르는 사업은 절대 손대지 않겠다’며 조중훈 회장은 수송외길을 고집했다. 그 원칙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수송외길을 걸으려고 해도 당시 국내 기간산업은 걸음마 수준이었다….’

‘조중훈은 우리나라가 물류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관련 인프라부터 구축해야 함을 절감했다. 인천항 건설, 공항청사 확충, 영종도 신공항 건설, 전천후 항공유 수급 시스템 구축, LPG충천소 설치는 그런 의지와 안목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한일개발은 움라지 고속도록 공사에서 큰 손해를 감수하고 신뢰를 지켰다. 이는 훗날 한국 건설업체들의 중동 진출에 밑거름이 되었다.’ <수송외길을 위한 변주곡> 중에서

한진그룹이 설립하거나 인수한 회사들은 수송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거나 이를 보조할 수 있는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이는 조중훈 회장이 평생 한눈을 팔지 않고 전문분야에 집중하는 수송외길 인생을 살아왔음을 엿볼 수 있다.

배움에는 때와 장소도 없다. 배우려는 의지만 있을 뿐


‘인하공대를 인수하는 것이 수익은 커녕 얼마나 비용이 들어갈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모한 투자였지만 그는 교육을 두고 계산하지 않았다…’

‘”공부는 때가 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은 조중훈은 대학교육이 캠퍼스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할 이유도 없다며 사내대학을 설립했다. 어린시절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던 조중훈에게 배움은 평생 애틋함이었다…’ <인재의 숲을 가꾼 정원사> 중에서

조중훈 회장은 교육에 투자하는 것을 기업 이윤의 사회환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업보국을 이룩하려는 기업이 마땅히 해야 하는 소명으로 여겼다. 인재의 숲을 가꾼 정원사 조중훈에게 일평생 가장 뜻있는 사업은 인재를 키우는 것이었다.

마음을 낚는 리더... 인간미 있는 사람에겐 사업도 예술

‘그가 마음을 사려하면 누구라도 줄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언어’로 소통하고 교감했기에 가능했다. 언제나 자신보다는 상대의 편에서 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를 생각했기에 답을 찾아내고 상대를 설득할 수 있었다…’

‘치열한 경쟁환경에서도 ‘지고 이기는’ 지혜와 미덕을 잃지 않았다. 그래서 대성공을 거두면서도 적을 만들지 않았다.’

‘수송외길을 고집하며 매진한 것도 자신의 사업에서 최고의 작품을 창조하려는 장인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과 사업의 예술가> 중에서
 

조중훈 회장은 평소 “사업은 지고도 이기는 것이고,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것”이라는 말을 즐겨 했다. 한진이 주한미군 용역사업에 참여한 1956년 무렵 ‘지고도 이긴다’는 조중훈 회장의 사업 신념이 빛을 발휘한 일화가 있다. 어느 트럭회사로부터 임차한 차량의 운전기사가 수송을 맡은 미군 겨울파카 1300여벌을 차떼기로 남대문 시장에 팔아 넘긴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조 회장은 직원 한 명을 남대문 시장에 상주시키고 도난 당한 물건이 시장에 유통되면 전부 사들이도록 했다. 이는 금전적으로 큰 손해를 봤지만 미군들로부터 확고한 신용을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한진의 문제 해결 능력과 신용을 지키려는 열의를 본 미군들은 그 후 한진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로써 조 회장은 당장 3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큰 금전적 손해를 봤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신용을 얻었다.

전기에는 조중훈 회장이 ‘수송보국(輸送報國)’ 신념으로 걸어간 ‘신용의 길’ ‘지혜의 길’ ‘애국의 길’ ‘외교의 길’ ‘교육의 길’에서 신념과 창의로 사업을 예술로 승화시킨 발자취들을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베트남 퀴논항 하역 현장 및 한일경제외교, 국산전투기 제작 등과 관련해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일화와 진귀한 사진들도 다수 수록되어 대한민국 경제/외교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조 회장과 교분이 두터웠던 손길승 전 전경련 회장과 이홍구 전 국무총리가 추천사를 썼다.

손 전 회장은 “세상에 철학이 아름다운 경영서는 그리 많지 않다”며 “조중훈 전기는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이야기인 만큼 사업가로서, 기업가로서, 경영자로서 길을 잃었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고 일독을 권했다.

이 전 총리 역시 “이 책을 인생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젊은이들, 특히 우리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아갈 학생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며 “그것은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독서광, 조중훈 회장의 바람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조중훈의 지혜'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샘솟는 것이었다. 사업과 인생의 예술가는 모든 것을 잊고 사라졌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를 잊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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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