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떠난 민주화의 거목…고 김영삼 전 대통령

닭 모가지 비틀어도 새벽은 왔는데…

[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민주화운동의 영웅이 스러졌다.” ‘민주화의 거목’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22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서거하자 정치권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한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일요시사>가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그가 남긴 족적을 다시 되짚어 봤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0시22분 향년 88세 나이로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패혈증과 급성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 서거한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009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 전 대통령, 현재 생존해 있는 김종필 전 총리와 함께 대한민국 현대 정치에 있어 ‘3김시대’로 상징되는 정치거목이었다. 거산(巨山)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한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증인’이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정치권에서는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민주화의 상징
정치권 애도물결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20일 경상남도 거제(통영군)에서 1남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 전 대통령은 어렸을 때부터 대통령을 꿈꾸며 자랐다. 어렸을 땐 자신의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씨를 써놓고 공부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김 전 대통령은 서울대 철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0년 장택상 후보의 국회의원총선거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다 그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비서관이 되었다. 이렇게 정치에 입문하게 된 김 전 대통령은 정치사에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제3대 총선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김 전 대통령은 여당 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지만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3선을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자 “이 당은 안 되겠다”면서 이승만의 자유당을 탈당했다. 이때부터 김 전 대통령은 길고 긴 야당 정치인 생활을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최연소자로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된 후 제5·6·7·8·9·10·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9선 의원을 지냈다. 이는 헌정사상 최다선 기록이다. 김 전 대통령과 함께 김종필 전 의원, 박준규 전 의원이 9선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68년 김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 향토예비군을 설치하자 향토예비군법 폐지안을 발의하고 박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1969년 초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를 맡고 있었던 김 전 대통령은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습격당했다. 일명 ‘초산테러’라고 불린 당시 사건을 두고 김 전 대통령은 정권 차원의 테러라고 주장하며 박정희정권과 갈등을 더욱 키워나갔다.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김대중 전 대통령, 이철승 전 의원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대통령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하지만 당 내 경선에서 영원한 맞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배하며 고배를 마셨다.


맞수 DJ·JP
애증의 반세기

1974년 '선명야당론'을 기치로 신민당 총재에 선출된 김 전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강력히 비판했다. 1979년 ‘YH 여공 신민당사 농성’ 사건을 이유로 박정희정권은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의원직을 제명하고 가택연금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의원직 제명과 가택연금은 부마항쟁을 촉발시켰고 이는 결국 유신정권 붕괴의 계기가 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이 남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발언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1980년, 서울의 봄 당시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과 대권을 놓고 경쟁했다. 하지만 전두환과 신군부의 쿠데타로 좌절되었고, 신군부에 의해 가택연금을 당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계속된 가택연금과 정치적 탄압에 항의하며 장기간 단식투쟁을 단행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회복, 정치복원 등 민주화 5개항을 내걸고 단식에 들어갔으며 전두환정권은 김 전 대통령이 단식을 한 지 1주일이 지나자 그를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켰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병원에서도 단식을 계속했다. 이를 통해 가택연금 해제를 얻어냈다. 이 단식은 추후 민주화투쟁의 기폭제가 됐다.

김대중·김종필과 함께 3김시대 주역
군사 독재에 항거…민주화 운동 투신

이듬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민주화운동추진협회의(민추협)를 발족시켜 전두환정권에 맞서 싸웠다. 민주화운동의 성과는 1987년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 쟁취로 나타났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동지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직선제 개헌을 계기로 사이가 벌어졌다.

두 사람은 제13대 대통령선거에 모두 나섰으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며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에게 승리를 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이 이끌던 통일민주당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합쳐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것. 3당 합당으로 인해 김 전 대통령은 차기 대선 승리의 초석을 다졌지만 민주화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아야만 했다.
 

1992년 민자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김 전 대통령은 제14대 대선에서 김대중·정주영 후보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로써 김 전 대통령은 32년 간의 군사독재를 끝낸 첫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재임기간 평가가 김 전 대통령처럼 극명하게 엇갈리는 사례도 드물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초반에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강도 높은 개혁으로 절대적인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우선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이어진 군대 내 최대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청산을 통해 국방 문민화의 길을 텄다.


군정 부정과 정통성 확립에 집중했고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기도 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의혹 수사와 신군부 처벌도 이끌어 냈다. 투명한 경제 민주화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금융·부동산 실명제도 도입했다. 풀뿌리민주주의인 지방자치제 실시와 전방위적 부패 척결 등 강도 높은 개혁을 통해 대한민국 사회시스템 전반을 한 단계 끌어올린 ‘개혁’은 역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전방위 개혁
친인척 비리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즐겨먹었는데 재임시절 김 전 대통령의 검소함과 청렴함은 ‘칼국수’로 상징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군 평시작전통제권 회수, 최초 남북정상회담 합의와 추진도 김 전 대통령이 이뤄낸 업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임기 중 아들 현철씨가 한보비리에 연루되는 등 친인척 비리와 외환 위기에 따른 국가 부도 사태 초래로 임기 초반 누렸던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대부분 잃고 임기 말에는 초라한 퇴장을 하고 말았다.

퇴임 후 지난 1999년 6월에는 외국 순방길에 나서면서 김포공항 제2청사에 갔다가 환송객과 악수를 하던 중 붉은 페인트로 채워진 달걀 세례를 받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김 전 대통령에게 페인트 달걀을 던진 재미교포 박의정씨는 “IMF 때문에 5000명 이상이 자살하는 등 대한민국을 너무 힘들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았던 김 전 대통령은 평생을 민주화 투쟁과 인권 증진의 외길을 걸으면서 군사독재 종식과 민주체제 정착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전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PK(부산·경남)를 지역기반으로 삼은 민주화세력을 일컫는 상도동계의 영원한 리더로서 오랫동안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직접 발굴한 상도동계 사람들 맹활약
김무성·서청원 등 정치권 쥐락펴락

김 전 대통령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단어는 바로 ‘상도동계’다. 서울 동작구 상도동은 1969년 김 전 대통령이 안암동 자택을 팔고 이사한 뒤 46년 넘게 산 곳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와 함께 현대 정치사의 명암이 서려 있다. 군부정권과 맞서 싸우던 시절 상도동 자택은 가택연금의 장소로, 또 동료의원들과 모여 당론을 결정하던 곳이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수많은 정치거물들을 정치권에 입문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노무현ㆍ이명박 전 대통령도 김 전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정계에 입문했다. 부산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4월 13대 총선 때 당시 통일민주당을 이끌던 김 전 대통령에게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뱃지를 달았다.

극과 극 평가
역사 뒤안길로

이 전 대통령은 1992년 3월 치러진 14대 총선에 민자당 전국구(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그해 12월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과 경쟁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영입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 YS의 깜짝 발탁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대건설 사장을 지낸 이 전 대통령이 정주영 명예회장이 만든 통일국민당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경쟁자의 품으로 들어간 게 도덕적 논란을 일으켰다.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서청원 의원, 정병국 의원은 여전히 여의도에서 활약하고 있는 상도동계로 꼽힌다. 김 대표와 서 의원은 1984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만든 민추협에서 정치경험을 쌓았다. 정 의원은 1987년 대선 때 홍보업무를 담당하며 김영삼의 사람이 됐다. 이외에도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김문수 전 경기지사, 이재오 의원, 정의화 국회의장, 홍준표 경남지사, 안상수 창원시장, 이완구 전 총리도 모두 김 전 대통령에 의해 정계에 입문한 '김영삼 키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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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