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MLB 가는 박병호

148억 잭팟? 그동안 흘린 땀이 얼만데요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메이저리그팀 미네소타는 구단 공식 트위터를 통해 박병호에 대한 협상권을 획득했다고 전했다. 미네소타가 최고 응찰 금액을 적은 구단으로 밝혀지면서 박병호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향한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게 됐다. KBO리그 역대 최강의 ‘거포’로 꼽히는 박병호가 무사히 메이저리그에 안착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박병호는 1986년 7월10일 전라북도 부안에서 출생했다. 일찍 서울에 올라와 서울영일초등학교와 영남중학교를 거쳐 성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야구를 시작한 박병호는 이희수 전 한화 이글스 감독 밑에서 야구를 배웠다. 성남고등학교 시절 전국 대회에서 화순고등학교와 휘문고등학교와의 2경기에 걸쳐 4연타석 홈런(화순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3연타석, 휘문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1타석)을 기록하였는데, 고등학생으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박병호 키운
히어로즈 대박
 
이러한 이유로 LG트윈스는 박병호를 장타를 책임질 해결사라 여기게 됐고 그는 2005년 1차 지명을 받아 계약금 3억3000만원을 받고 입단한다. 입단 후 포수에서 1루수로 전향해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다. 박병호는 리듬이나 타격 기술이 부족해 2할 초반이나 1할대를 쳤다. 2006년 2시즌간 1군 127경기에 출장해 타율 0.177, 8홈런, 34타점을 기록했다.
 
박병호는 2006년 상무에 입대해 2008년 2군 북부리그 홈런왕을 차지했다. 2008년 말 제대해 2009년 1군 첫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포함해 4타수 3안타를 친 지 며칠 뒤 또 연타석 홈런을 쳤다. LG트윈스는 확실한 오른손 거포가 없었던 찰나에 박병호의 활약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변화구에 약점을 보이고 나서부터 경기 기량은 또다시 하락했다.  박병호는 그 해 9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2010년 시즌을 앞두고 이택근의 트레이드 영입, 외야수 이병규의 복귀 등으로 외야진의 포화 현상으로 인해 이택근이 1루수를 겸업하며 LG트윈스 내에서 박병호의 주전 경쟁은 더욱 힘들어졌다. 2010년 9월17일 잠실 SK전에서 나주환과 충돌하여 왼쪽 팔꿈치 부상을 당해 시즌을 마감했다. 박병호는 토미 존 수술(부상당한 팔꿈치에 정상적인 팔꿈치의 인대를 떼어 붙이는 수술)을 받아 재활하게 되어 2011년에는 1군에 늦게 합류했다. 하지만 LG트윈스에서 더 이상 자리 잡지 못하고 1군과 2군을 오가는 신세가 됐다.
 
2011년 7월31일 박병호는 투수 심수창과 함께 김성현과 송신영을 상대로 넥센히어로즈에 트레이드됐다. 트레이드 이후 박병호는 맹타를 휘두르며 넥센히어로즈에서 맹활약하게 된다. 박병호가 이적하기 전 넥센히어로즈의 1루는 이숭용과 장영석, 오재일, 조중근이 번갈아 맡았으나, 트레이드로 영입한 박병호가 1루수로 완전히 정착했다.
 
트레이드 직후 이장석 구단주의 지시 아래 박병호를 쭉 선발 출장시켰지만, 트레이드된 이후 처음 출장한 대구 삼성라이온즈 전에서는 12타수 2안타로 부진했다. 8월5일 두산베어스 전에서는 외야수 알드리지가 부상을 당해 4번 타자로 출장했고 두산전 3차전에서 11타수 7안타 2홈런 5타점으로 활약을 펼쳤다.
 
이장석 구단주와 감독, 코치진은 박병호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새로운 4번 타자로 키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8월에는 리그 최다 홈런을 때려내며 괴력을 보였으며, 8월 20일 기아타이거즈 전에서는 투수 유동훈을 상대로 생애 첫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기도 했다. 
 
미네소타 협상권 획득…메이저리그 눈앞
힘과 내구성에 베팅 “리빌딩 방점 필요”
 
2011년 넥센히어로즈가 최하위로 떨어졌지만 박병호의 맹활약으로 마지막까지 파이팅 넘치는 플레이를 보여 주게 됐다. 2011년 13홈런을 기록하여 개인 통산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으며, 오른손 강타자였던 클리프 브룸바의 이름을 본뜬 브룸박과 메이저 리그 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오른손 강타자인 푸홀스의 이름을 본뜬 ‘병홀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박병는 그를 오랫동안 괴롭혀 온 발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기 위해 시즌 종료를 몇 경기 앞두고 구단의 배려로 시즌을 마감한다. 2011년 12월10일 4세 연상의 전 KBSN 스포츠 아나운서인 이지윤과 결혼했다. 시즌 후 박병호가 넥센히어로스의 새로운 스타가 된 반면 트레이드 당사자 중 송신영은 FA를 선언해 한화 이글스로 이적했고, 2년 후인 2013년에 트레이드로 넥센히어로즈에 복귀하여 박병호와 함께하게 됐다. 김성현은 경기조작 사실이 드러나 방출되어 이 트레이드는 LG트윈스에게 완전히 실패로 끝난 트레이드가 되고 말았다.
 
2012년부터 실질적인 풀타임 시즌을 맞이 하게된다. 팀의 4번 타자로 3루 수비 연습도 하였으나 주로 1루수 및 지명타자로 출장했다. 시범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고타율로 승승장구하여 시즌을 기대하게 하였으나, 4월 한달간 타격감이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4월 15일 삼성라이온즈 전에서 투수 차우찬을 상대로 생애 첫 만루 홈런을 쏘아올린 것을 시작으로 홈런포가 시작됐다. 4월에 총 4개의 홈런포를 날린다. 그 뒤 5월과 6월에는 3할이 넘는 타율을 유지하며 6월까지 16홈런 58타점으로 홈런과 타점 부문 상위권을 유지한다. 
 
KBO 최초 2년 연속 
전 경기 4번 타자 
 
전반기가 끝났을 때 2할 8푼의 타율과 17홈런 64타점으로 홈런 부문 3위, 타점 부문 1위를 유지했다. 홈런 선두를 달리던 강정호가 봉와직염으로 잠시 주춤한 사이 박병호는 홈런이 더 늘었다. 8월1일에는 생애 첫 1경기 3홈런을 날리기도 하며 7월31일 ~ 8월 5일 사이에 열린 6경기에서 6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홈런 부문 1위에 등극한다.
 
그 후 홈런 부문 1위를 계속 지켰으며 타점 부문은 삼성라이온즈의 박석민에게 잠시 1위를 내주기도 하였으나, 박석민이 9월에 부진한 사이 치고 올라가며 타점 부문 1위를 굳혔다. 또한 9월 21일 한화이글스와 경기에서 1홈런 3타점을 기록하여 2012년 시즌 처음으로 30홈런 100타점을 돌파하였으며 이는 KBO 리그 통산 40번째의 기록이다.
 
10월 2일 목동 두산베어스 전에서 도루를 성공하며 20홈런 20도루 클럽에 가입한다. 이는 1루수로는 해태 타이거즈의 김성한에 이은 2번째의 대기록이며, 강정호와 함께 넥센히어로즈는 두 중심 타자가 모두 20홈런-20도루 클럽 가입에 성공한다. 이는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2012년 시즌을 마친 박병호는 거포의 상징인 홈런왕, 타점왕, 장타율왕으로 3개의 개인 타이틀을 획득했다. 넥센히어로즈 소속 선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정규 시즌 MVP로 선정됐다. 같은 해 데뷔 후 처음으로 1루수 부문 골든 글러브도 수상했다. 
 
 
2013년 시즌도 1루수, 4번 타자로 전 경기를 출장한다. 시즌 초 3월과 4월에는 총 4홈런을 치며 부진을 보이다가 5월에 0.341의 타율을 기록하며 팀의 상승세에 큰 기여를 한다. 4월~6월의 타율이 3할 7리에 불과하지만, 7월~8월의 타율은 3할 3푼 1리를 기록하였으며 이 기간 40경기 동안 11개의 홈런을 쏘아 올렸다. 또한 팀이 큰 상승세를 올리던 9월에는 18경기에서 무려 11개의 홈런을 터트리며 2년 연속 홈런왕 굳히기에 들어갔다.
 
9월29일 두산전에서는 생애 통산 2번째로 1경기 3홈런(7타점)을 올렸으며, 37홈런을 기록하여 2년 연속 30홈런대, 100타점을 달성했다. 또한 2012년에는 달성하지 못하였던 3할 타율까지 달성하며 개인 통산 첫 번째로 최고 타자의 상징인 3할 타율 30홈런 100타점을 기록했다. 10월3일 기아타이거즈 전에서는 생애 최초로 한 경기 3도루를 성공한다.
 
또한 KBO 리그 사상 최초로 2년 연속 전 경기 4번 타자로 출장하는 대기록을 달성하며 넥센히어로즈의 창단 첫 포스트시즌 진출에 큰 공헌을 했다. 시즌 중 감독 추천 선수로 올스타에 선정되어 데뷔 후 처음으로 포항에서 열린 올스타전에 출전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런 맹활약으로 시즌 MVP는 다시 한 번 박병호에게 돌아갔으며, 홈런, 타점, 득점, 장타율 부문까지 4관왕을 차지했다. 2년 연속 MVP는 선동열(1989∼1990), 장종훈(1991∼1992), 이승엽(2001∼2003) 이후로 박병호가 4번째다.
 

고등학생 최초 4연타 홈런
프로 초반 부진하다 거포로
 
2014년 시즌 5월과 6월에만 무려 23개의 홈런을 쳤다. 그러던 6월27일 두산베어스를 상대로 시즌 29호 홈런을 친 후 긴 부진에 빠지면서 선발 출장에서도 제외됐다. 7월11일 NC다이노스 전에서 대타로 출장해 30홈런을 쳤다. 2012년과 2013년에 이어 3년 연속 30홈런을 쳐내는 기록을 달성했다.
 
2014년 올스타전에 1루수로 선발됐다. 2014년 7월18일에 광주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맹활약했다. 1회에는 SK와이번스의 김광현을 상대로 1회에 2루타, SK와이번스의 채병용을 상대로 3회에 쓰리런 홈런, 8회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안지만을 상대로 솔로홈런을 쳤다. 4타수 3안타 4타점으로 웨스턴리그의 13-2로 대승을 이끌어냈다. 생애 첫 올스타전 MVP를 차지했다. 9월5일 목동 NC다이노스 전에서는 3연타석 홈런을 포함, 역대 두 번째 한 경기 4홈런을 달성했다.
 
2014년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어,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 그국가대표팀의 주장으로 선출됐고, 대만과 2차전 국가대표 발탁 이후 처음으로 홈런을 쳤다. 준결승전에는 6회 중국투수 리신에게 결승 3점포를 쏘아올리면서 대표팀의 결승진출에 기여해 생애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부진으로 트레이드
이후 중심타선으로
 

10월14일 사직 롯데자이언트 전에서 김사율을 상대로 데뷔 첫 50호 홈런을 달성했다. 이승엽-심정수에 이어 국내 타자중 3번째로 50홈런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됐다. 비록 팀은 한국시리즈에서 2승 4패로 패배하여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2014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에서 골든글러브를 3년 연속 수상하는 한 해를 보냈다.
 
미네소타는 지난 10일 구단 공식 트위터를 통해 박병호에 대한 협상권을 획득했다고 발표했다. 미네소타가 최고 응찰 금액인 1285만 달러(한화 약 148억8,670만 원)를 적은 구단으로 밝혀지면서 박병호 영입에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테리 라이언 단장은 10일 “박병호는 야구 인생의 전성기에 있다. 일본리그와 비슷한 한국에서 엄청난 성적을 남겨 메이저리그에서도 성공적으로 정착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박병호의 공식 에이전트사인 옥타곤 월드와이드는 미네소타와 30일 동안 계약 기간과 연봉을 협상한다. 미네소타가 단독 협상권을 가지게 돼 박병호의 선택지는 분명해졌다.  미네소타는 메이저리그에서 중소구단으로 평가된다. 미네소타는 장타력을 강화하기 위해 거포인 박병호를 선택했고 12월9일까지 연봉 협상을 벌인다. 미네소타에게 1285만 달러(한화 약 148억8,670만 원)는 적은 금액이 아니다. 박병호의 연봉은 포스팅 비용에 맞춰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관심은 자연스럽게 박병호의 연봉으로 쏠린다. 먼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류현진(LA 다저스), 강정호(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비교해 연봉규모를 추산해 볼 수도 있다. 류현진은 2011년 약 2573만 달러(297억원)의 포스팅 금액에 6년 3600만 달러(약 416억원)에 계약했다. 강정호는 지난해 500만215달러(약 55억원)의 포스팅 비용에 연봉은 4년 1100만 달러(약 127억원)였다. 
 
강정호보다 2배
57억 이상 예상
 
산술적으로 포스팅 비용만을 놓고 보면 강정호의 이적료보다 2.5배 높은 박병호의 연봉은 최소 500만 달러(57억원)은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박병호는 올 시즌 타율 0.343와 2년 연속 50홈런을 기록했기 때문에 올해 1루수가 부진했던 미네소타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설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또 류현진처럼 일본 진출을 무기로 삼아 협상 테이블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도 있다. 미네소타의 의지에 따라 박병호의 연봉이 결정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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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