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9주년 기획특집> 대한민국 교육 현주소 “아이들이 위험하다” ③흔들리는 교권

“얘들아! 선생님이 그렇게 만만하니?”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등장하는 존 키팅 선생은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말 그대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 선생님이다. 오늘날 교권의 질은 땅에 떨어졌다. 교사들의 직업윤리도 시험대에 올랐다.                    
 
 
“교사 생활이 20년 전보다 20배는 힘들어진 것 같다.”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A(50)씨가 말했다. A씨 전자메일함에는 교육청에서 보낸 공문들로 꽉 차있다. 국회의원과 시의원들이 자료를 요청해 업무창고도 가봐야 한다. 반에서는 폭행 사고가 발생해 보고서도 작성해야 한다. 

학생 지켜보는
교실서 주먹질
 
200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조사한 ‘교사의 스트레스, 원인과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교사 90.8%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78.7%가 스트레스로 인해 업무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어 2013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발표한 ‘교직 생활과 학교문화에 대한 교사 의견 조사’에 따르면 교사의 스트레스의 원인은 정부의 잘못된 교육정책(73%), 행정 업무(58.2%), 교직에 대한 부정적인 사회 여론(56.6%) 등으로 꼽았다. 
 
‘학생들 가르치랴, 학부모 상대하랴, 연구 수업 준비하랴, 승진에 신경 쓰랴, 장학지도 대비하랴, 선생님들 관계 유지하랴….’교사들은 갖은 직무에 시달리고 있다. 특히 2012년부터 도입된 교원능력개발평가로 교사들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대한민국 초·중·고 등학교 교육은 주입식이다. 그건 수십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는 B(47)씨는 “공교육이 사교육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교와 학원은 모두 주입식 교육이다”며 “이렇게 똑같은 교육 시스템에서 당연히 학원 선생들이 더 잘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학원 선생들은 교재 연구와 수업에 열중하기만 하면 된다. 또 학생들이 잘되면 인센티브가 나오는 등 동기 부여가 충분히 된다”며 “반면 교사는 대학을 잘 보내 인센티브가 나오는 것도 아니며 수업만 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이미 학교에서 배울 내용을 대부분 1년 전에 마친 상태다. 이 때문에 종종 학생들은 선생님의 실력을 확인하려 들거나, 혹은 다른 책을 펴 놓고 공부하는 학생도 있다. B씨는 “교사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다”며 “학생은 ‘이 선생님은 학원 선생님만큼 잘 가르쳐, 그래서 존경해’라는 의식이 이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초등학생의 64.2%, 중학생의 56.3%, 고등학생의 62.9%가 한 학기 이상 영어와 수학 선행학습을 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무너진 공교육
“대책이 없다”
 
특히 이런 경향은 소위 말한 명문고에서 만연하게 나타난다고 전해진다. ㄱ고등학교는 명문대를 많이 보내기로 유명한 학교로 학부모와 학생들 사이에서 명문고로 통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교사들은 학교에 대해 만족스럽지 못하는 분위기다. 학생들이 공부를 잘 함에도 말이다. ㄱ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C(40)씨는 “이 학생들은 원래 우수한 학생들이다. 내가 가르쳐서 공부를 잘한 게 아니다”며 “교사로서 만족감은 별로 없는 곳이다”고 말했다.
 
“국회의원이 제일 싫다.” 하나같이 모든 교사가 입을 모아 말했다. 국회의원이나 시의원들이 자료를 요청하면 교사들 입장에서는 거부할 법적 근거가 없다. 이 때문에 교사들은 어떻게 해서든 국회의원이 필요한 자료를 만들어줘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교사들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다. A씨는 “국회의원들이 2010∼2015년 방과 후 실태에 대한 자료를 요청한다”며 “2010년에 근무했던 교사들이 어디 있나. 다 선생님들이 업무창고에 내려가 자료를 뒤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12시까지 자료 보고 올리라고 하는데, 내 수업이 12시까지다”고 성토했다. 교사들은 국회의원의 ‘묻지마식’ 자료요청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일각에서는 국회의원과 교육부만 없으면 수업할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또 교사 개개인이 활동에 대한 지원을 교육청에 직접 발주해야 하며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처리해야 할 보고서와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인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조사한 결과 교사 스트레스 이유로 행정 업무(58.2%)를 꼽았다. 또 집에서 학교 일을 하는 것이 줄었다는 답변은 15.5%인 반면에 행정 업무가 늘었다는 답변은 80.2%에 달했다. 보통 교사는 하루 네 시간에서 다섯 시간 수업한다. 학생들을 만나는 수업 한 시간을 위해 세 시간 정도는 준비를 하는 데 할애해야 한다. 하지만 의외로 교육 외에 업무로 시간을 보낸 교사들이 많다.
  

“우리 애 누구랑 같은 반 됐어요? 그 애 별로니깐 반 바꿔주세요.” 교사에게 학부모는 두 번째로 상대하기 싫은 존재다. 교사에게 학부모는 갑이다. 초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D씨는 “반 배치까지 다 해놨는데, 학부모에게 전화와 애 반을 바꿔달라고 했다”며 “교사 입장에서는 바꿔줘야지 별수 없다”고 말했다.
 
무시하는 제자와 학부모
예전같지 않은 교사생활
 
최근에 학부모가 늘면서 학교에 대한 학부모들의 간섭이 극에 달하고 있다. D씨는 “학부모는 바로 교장실로 들어가서 찍어 내린다”며 “옛날 같으면 선생님과 상담하다 보면 늦을 수 있는데, 요즘은 조금만 늦게 보내도 ‘학원 늦었는데 왜 안 보내느냐’고 항의한다”고 말했다. D씨는 “요즘 학부모는 교사를 너무 쉽게 본다”고 토로했다. 
 
 
교육부가 집계한 학생과 학부모에 의한 교권침해는 2009년 총 1570건에서 2012년 7971건으로 3년 사이 5.1배로 불어났다. 이후 2013년 5562건, 작년엔 4009건으로 주춤했다. 2013년 이후 다소 감소한 것은 정부가 2012년 교권 침해에 엄정히 대처하는 내용을 담아 교권보호종합대책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학부모에 의한 교권침해는 2009년 11건에서 2012년 128건으로 열 배 이상 급증했다.
 
최근에도 잇단 학부모 교사 폭행 사건도 발생하고 있다. 대부분 폭행은 학생들이 지켜보고 있는 교실에서 일어난다. 청소년 아동 전문가들은 이를 ‘빗나간 자식 사랑으로 빗어진 세태’라고 말한다.
 
 
보람이 없다.  OECD의 ‘2013년 교수·학습 국제 조사’를 바탕으로 회원국 중학교 교사 10만5000여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교사가 된 것을 후회한다’는 질문에 회원국 평균(9.5%)에 비해 우리나라는 20.1%로 크게 웃돌았다. 
 
심지어 ‘다시 직업을 선택한다면 교사가 되고 싶지 않다’는 비율도 36.6%로 회원국 평균(22.4%)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교직에 입문한 지 채 5년도 지나지 않은 새내기 교사들의 절망감이 갈수록 높아진다는 점이다. 서울시에서 조사한 자료도 마찬가지다. 교사들의 교직 만족도는 처음에는 높았다가 점차 떨어져 15년 가량이 지나면 가장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교직에 오랫동안 근무한 관계자들은 “젊은 선생님들은 옛날처럼 학생에게 올인하지는 않는다”며 “그냥 직업인이다”고 말했다. 과거 교사가 제자를 위해 24시간 고민한 시대는 지났다. 다시 말해 스승과 제자의 끈끈한 유대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이어 “딱 학교에 있을 때만 선생이지 교문을 나가면 일반인과 다를 게 없다. 학생들에 대해 많이 고민하지 않는다”며 “그래도 교육자로서 때로는 학생의 인생을 마음 아파해야 하는데, 이런 감정 공유가 요즘에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즘 교사는 직업윤리 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갖은 잡무까지
사명감도 잃어
 
그래서일까. 최근 교사들의 일탈 행위가 극에 달하고 있다. 그중 성범죄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 
 
2014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민현주 새누리당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5년 동안 성범죄로 징계를 받은 초·중·고등학교 교사 240명 중 115명이 현직 교사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또 지난 5년간 성범죄로 징계를 받은 초·중·고등학교 교사 중 절반 가까운 47.9%가 버젓이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심지어 아동·청소년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현직 교사도 33명이나 포함돼 있다.
 

2012년 경남의 한 고교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2학년 여학생을 차에 태운 뒤 강제로 입을 맞추고 끌어안는 등 성추행을 저질렀다. 같은 해 부산에서는 초등학교 교사가 모텔에서 여중생과 성매매하려다 적발됐다. 모두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였지만 이들은 교육청으로부터 정직 2개월과 정직 1개월의 솜방망이 처벌을 받은 후 교단으로 복귀했다. 지난해 7월에는 서울의 한 고교 교사가 지하철에서 18세 여성의 몸을 더듬는 성추행을 했지만 정직 1개월 후 학교로 돌아오기도 했다.
 
지난해 교육부는 성범죄를 단 한 차례만 저질러도 교단에서 퇴출하는 ‘원스트라이크 아웃’제도를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관련 법안이 아직 국회에도 제출되지 않는 상태다.
 
지난 3월6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 소속 박홍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교원 성비위 징계 현황’에 따르면 2009∼2014년 미성년자 약취, 성추행, 성폭행 등의 성범죄로 징계를 받은 교원은 230명에 달했다. 이 중 교단에 남아 있는 사람은 121명(53%)으로 절반 이상이었다.
 
성범죄를 저지른 교원은 2010년 39명, 2011년 45명, 2012년 60명, 2013년 54명, 2014년 35명 등 연간 30~60명 수준을 유지했다. 현행 교육공무원법은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범죄로 교사가 파면ㆍ해임되거나, 100만원 벌금형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에만 교원 지위를 박탈하도록 제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성인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르거나,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자도 피해자와의 합의 등으로 100만원 미만의 벌금형이 나올 경우 교단에 계속 설 수 있다.
 
빗나간 자식사랑…교사 폭행사건 빈번
성범죄 느는 등 일탈행위도 극에 달해
 
교육부는 교원들의 지속적인 성범죄 발생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지난해 관련법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교원 결격사유에 ‘성범죄로 형 또는 치료감호를 선고받아 형이 확정된 사람’을 포함해 단 한 차례라도 성범죄를 저지르면 교단에서 영구히 퇴출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성범죄로 수사 중인 사립학교 교직원도 직위를 해제할 수 있도록 하고, 교원 자격을 박탈해 교육 관련 기관에 취업하지 못하도록 하는 엄중한 처벌로 경각심을 높이겠다고 설명했다.
 

올해 2월에는 초등학교 교사가 제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부적절한 말을 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수원지법 형사9단독 지귀연 판사는 다문화가정 어린이인 제자의 정신 건강을 해치는 말을 한 혐의(아동복지법 위반)로 불구속 기소된 교사 A씨에게 벌금 300만원형을 선고했다.
 
수원시의 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던 A씨는 지난해 5월 캐나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제자 릴리(가명)양이 질문을 자주 해 수업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반 어린이 전체가 “릴리 바보”라고 세 번 크게 외치게 했다.
 
6월에는 점심 때 릴리양이 김치를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다른 아이들이 듣는 가운데 “반이 한국인인데 왜 김치를 못 먹나. 이러면 나중에 시어머니가 좋아하겠나”라고 나무랐다.
  
아울러 A씨는 수업 중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손을 들어보라고 하더니 유독 릴리양을 가리키며 “너는 부모 등골을 150g 빼 먹는 애”라고 말하기도 했다.
 
릴리양 부모는 뒤늦게 딸로부터 이런 사실을 듣고 A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릴리양은 이후 병원에서 적응장애 진단을 받고 수개월 동안 심리 치료를 받았다.
 
성범죄 징계 교사
절반 아직 교단에
 
지 판사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교육자로서 우리 사회가 포용하고 함께 걸어가야 할 다문화가정 어린이에게 큰 상처와 아픔을 준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20년간 교직 생활한 A씨는 “젊은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실수를 많이 한다. 그들도 아직 젊은지라 감정조절이 안 되고 욱하는 경향이 있다”며 “젊은 선생님들도 많은 사람을 겪고 배워야 한다. 하지만 임용고시나 사범대학을 나왔다는 이유로 선생이 된 거다”고 말했다. “사회에서 선생님으로서 행동을 요구한다. 하지만 젊은 교사들 경우 그런 소양을 갖추기에는 너무 가치관이 빈약하다”고 A씨는 설명했다. 
 
<중앙일보 강남통신>이 빅데이터 전문 업체 파타크로스에 ‘교사 및 스승에 대한 소셜미디어상 담론 분석’이라는 주제로 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교사에 대한 키워드는 부정적인 내용이 전체의 84%를 차지했다. 폭력적인, 비도덕적인, 걱정스러운, 부족한 등이 사회에 비친 교사한 단면이기도 하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초등 제자와 교사 ‘위험한 사랑’
 
지난 2013년 초등학생 여제자와 성관계를 맺은 사실이 알려지자 “사랑하는 사이”라고 주장했던 초등학교 교사에게 중형이 선고됐다.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 제2형사부는 지난 23일 초등학생 제자(13)와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구속된 전 초등학교 교사 강모(30)씨에게 징역 8년과 8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그리고 10년간 신상정보공개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또, 음란물을 소지한 혐의에 대해서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어린 학생에게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고 13세 미만의 아동에 대해 성적 가치관 형성을 지도하고 보호해야 할 초등학교 교사가 음란 동영상을 어린 제자에게 보여 주고 수차례 간음하는 등 죄질이 불량하다”고 밝혔다. 
 
강씨는 지난해 5월부터 초등학교 제자와 여러 차례 성관계를 맺은 혐의로 같은 해 12월 구속됐다. 강씨는 비슷한 시기 여고생이 된 제자를 집으로 불러 성관계를 갖은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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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