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철권통치가 대한민국 부도냈다”
박정희 시대의 수출진흥책으로 밀어붙였던 기업들이 우후죽순 손을 들기 시작했다. 화학, 엔지니어링을 영위하던 E그룹은 자금난에 봉착하자 매각의사를 밝혔다. 이 회사는 전 과학기술부 장관 출신이 경영했는데, 도저히 경영의 효율을 도모할 수가 없었다.
마침 대우그룹은 화학업종이 전략상 반드시 필요했다. 미래의 기술발전에 따라 적용할 수 있는 범위가 무한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화학은 모든 그룹이 지대한 관심을 갖는 최첨단(Cutting Edge)업종이었다.
은행감독원장, 총수 호출
“대통령 사돈 회사 좀…”
필자는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지시를 받고 E그룹이 위치했던 여의도로 달렸다.
“3일 만에 인수를 끝내라.”
김 회장의 지시에 인수팀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하는 의구심을 안고 실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는 절대보안과 전광석화를 요하는 M&A 성격상 오히려 훨씬 효율적이었다. M&A는 절대 시간을 오래 끌고 비밀이 공개되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시간을 오래 끌 경우 경영권공백으로 종업원들 간의 불평불만이 극도로 달할 수 있고, 나아가 인수조건에 그들이 개입할 소지를 남겨 두기 때문이다. 또 비밀이 공개될 경우 그 물건을 탐내는 다른 포식자 혹은 탐내지는 않지만 경쟁그룹에 넘어가는 것을 눈 뜨고 볼 수 없는 다른 포식자가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고 나타나거나 방해할 수가 있다.
3일만의 실사 끝에 당시엔 천문학적인 숫자의 가공자산이 발견됐다. 실무적으로 인수불가였다. 하지만 전 장관 출신인 오너는 가만히 앉아서 부도 당하고 형사처벌을 감수할 수 없었다. 결국 5일 후 청와대의 전화 한 통화를 받고는 인수결정을 단행해 인수그룹의 비자금으로 피인수기업의 가공자산을 충당하고 모든 주식을 무상으로 양수도 했다. 주식을 무상으로 양수 받는 대신 기업을 살릴 자금을 투입했던 것이다.
이런 형태의 자금투입은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릴 수 있었다. 주주에게 일단 양수대금으로 지급하고 그 돈이 다시 기업의 가공자산으로 충당되면 주주의 문제도 해결하고 가공자산으로 인한 기업의 세무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뿐더러 기업회생에 필요한 자금원이 될 수 있다.
며칠 후 당시 ‘밤의 황제’로 불리던 은행감독원장이 김 회장을 호출했다. 은행감독원은 기업의 자금줄을 쥐고 있는 은행들의 수장 격으로, 그 권한이 막강하기도 하지만 당시의 원장은 대통령의 친한 친구로 알려져 있어 기업들에겐 누구보다 무서운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면담을 끝낸 김 회장은 그룹 기획조정실장에게 여러 장의 서류를 던져주고 D산업의 인수 검토를 하라고 명했다. 필자는 검토 결과 인수불가의 의견을 제시했다. 섬유를 제조한 D산업은 회사규모에 비해 재무구조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부실했다. 곧바로 회장, 기획조정실장, 실무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골치 아픈 회의가 열렸다.
“실무자 의견은 인수 불가라는데 어떡하지? 그 원장이 보통 분이시냐. 대통령의 친구인데 나한테 신신당부하시는 거야. 꼭 인수 좀 해달라고.”
“회장님, 그 원장님이 무엇 때문에 조그마한 D기업에 신경을 쓰십니까?”
사실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달리는 호랑이도 멈추게 할 수 있는 최강 권력자인 그가 왜 조그마한 섬유기업의 부도를 막으려고 안달일까 하는 궁금증이 최고조에 달했다.
“응, D산업의 오너의 장인이 바로 대통령의 군대선배인 K씨야. 대통령이 군대시절 평소 존경해왔던 K씨인데, 글쎄 그 사위가 D산업의 오너야. 지금 당장 부도인데 J은행이 부도 안내고 막고 있는 것 같아. 부도나면 그 사위 당장 감방이야. 그러니 K씨가 울고불고하는 딸의 애원을 외면 할 수 없어 대통령에게 부탁을 했던 것 같아. 이거 어떡하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대통령의 철권시대에 이러쿵저러쿵 재고할 명분도 필요도 없고 할 시간도 없었다. 즉시 가공자산을 비자금으로 충당하는 방법으로 인수를 단행했다. 물론 무상의 주식양수자는 그룹과는 관계없는 차명으로 달아 놓았다. E그룹과 D산업을 인수한 후 전문경영인을 파견해 그룹과는 별도로 관리하는 체제를 만들었다. 이것이 이른바 흔히 얘기하는 그룹의 위장계열사의 태동이다. 대우, 삼성, 현대, 럭키, 선경 등 30대 그룹을 위시한 모든 대기업들에 공히 일어나는 정권교체기의 현상이었다.
이런 위장계열사의 태동엔 세 가지 동기가 있다고 봐야 한다. 첫째는 불가피한 경우다. 대통령의 하명으로 인수한 것인데 대부분 그룹의 경영전략과는 관계없이 행해진 것으로 공식적인 인수를 발표할 수 없다. 따라서 대통령이나 재벌총수나 모두 이를 숨길 필요가 있어 비자금으로 인수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자의적인 경우다. 그룹의 경영전략상 반드시 영위할 필요가 있는 기업이지만 대기업 윤리 및 도의상 영위할 수가 없는 사례다. 이런 경우 그룹의 시너지효과상 인수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부득이 공식 그룹이름으로는 못하고 다른 사람의 차명으로 인수 관리한다.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중소기업 고유 업종을 지정하고 대기업이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켰기 때문이다.
셋째는 상기 두 가지 동기 외에 오너의 재산 빼돌리기를 목적으로 하는 경우다. 엄연한 그룹의 자금을 비자금화해 빼돌린 후 차명으로 기업을 인수 한 후 비밀리에 경영하는 것으로, 그룹에서 비공식적인 물량지원을 하기도 한다.
가명구좌 금지 시도
‘누구’반대로 무산
이같은 이유로 박정희 시대의 부산물인 부실기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삼성, 대우, 현대, 럭키, 선경 등을 비롯한 대기업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정체가 불분명한 그룹의 위성회사 즉 위장계열사를 본의 아니게 거느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위장계열사의 태동에는 비자금 생성을 가능케 했던 가명구좌의 설치를 용인했던 대통령의 통치책임이 더 크다 하겠다. 당시엔 은행예금에 실명구좌뿐만 아니라 가명구좌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시 부조리와 부패의 원인이 되는 비자금의 온상인 가명구좌를 금지시키는 법률을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누구의 반대 때문에 못했다고 한다. 그 누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 관심거리다. 대통령 자신일까. 아니면 측근의 권력자들일까. 또는 재벌총수들일까, 일반 중소기업자일까, 국민들일까. 가명구좌로 가장 혜택을 보는 이는 대통령, 측근의 권력자, 재벌총수들일 것이고 살기에 항상 허덕이는 일반 중소기업자들이나 국민들은 아닐 것이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가명구좌의 금지에 따른 경제의 위험성을 과대 포장했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의 구조를 지하경제 80%, 지상경제 20%로 분석한 후 당장 가명구좌를 금지할 경우 지하경제 80%가 죽어버리고 우리나라 경제는 꺼꾸러진다는 해괴망측한 논리였다. 이는 당장 없어져야 하는 가명구좌의 생명을 연장시켰다. 다만 가명구좌의 예금이자를 무이자로 하는 불이익을 주는 선에서 입법을 마무리했다.
이미 자금세탁을 한 ‘눈 먼 비자금’이 그까짓 무이자를 무서워할 리가 없었다. 천방지축의 주인 없는 비자금은 그때부터 우리 경제와 관료의 부패를 만들어 내는 동인이 됐고 기업의 재무구조와 수익악화를 초래했다. 현금을 원가조작으로 빼내니 수익악화가 뻔했다. 매출액 대비 당기순이익율이 평균 4% 정도이니 만일 현금 1백억원을 빼냈다면 매출은 약 2천5백억원의 물량이 빠졌다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 기업의 재무구조는 나빠지기 시작했고 대외의 나쁜 신용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재벌 스스로가 재무구조를 좋게 포장시키는 이른바 분식행위가 성행했다. 반드시 해서는 안 되고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기업의 최고화두가 ‘분식(粉飾)’이었다. 하는 순간 그 마약의 쾌감과도 같은 그러나 마약의 중독에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는 기업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분식의 한자를 분석해보면 ‘쌀을 가루로 만들어 화장하고 천을 식탁 위에 덮은 후 음식을 차려놓는다’는 뜻이다. 차려놓은 음식에 제3자들이 입맛을 댕기고 침을 흘린다는 것이다. 즉 ‘WINDOW DRESSING’이다. 겉만 잘 발라 꾸민 다음 진열대에 잘 걸려 있는 옷을 말한다.
분식의 성행으로 기업의 부채비율은 4백%이상 올라가는 결과를 초래했다. 분식의 관행이 후일 1997년 일어났던 우리나라 미증유의 IMF 외환위기 사태, 바꾸어 말하면 국제간의 지급불능인 ‘대한민국 부도’를 초래한 셈이나 다름없다.
현금 1백억 비자금화
매출 2천5백억 누락
역설적으로 이때 만일 전 대통령이 가명구좌의 금지를 시행했다면 아마 전 국민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던 국가부도 상태는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기업이 부도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 노숙자가 되고 했던 참상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비참한 사태를 피할 수도 있었다는 가정을 해보면 대통령과 재벌총수의 행태가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우리 서민의 생명과도 직결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리=김성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