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게 없는’ 무한 렌탈시대 천태만상

명품부터 애인까지 “빌려드립니다”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보통 렌탈이라고 하면 승용차나 정수기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여상품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명품 핸드백, PC, 노트북, 휴대폰, TV, 악기, 가구, CCTV, 보청기, 비데, 제습기, 공기청정기, 침대 매트리스, 전자레인지, 음식물처리기 등. 교환 주기가 짧은 소비자들의 비용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내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물건뿐만이 아니다. 애인대행 서비스도 여전하다. 바야흐로 못 빌리는 게 없는 세상이다.

 
국내 렌탈 시장이 새로운 소비문화로 정착하고 있다. 세대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렌탈서비스를 통해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소비를 경험하고 있다. 생활의 여유를 즐기고자 하는 소비문화가 퍼지면서 렌탈 시장은 지금 빠르게 급증하고 있다. 

점점 얇아지는
주머니 사정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대학생 이모(23)씨는 주로 학교에 있는 데스크탑을 사용한다. 평소 큰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지만 가끔은 노트북이 생각난다. 카페에서 과제를 하거나 멀리 이동할 시에 그렇다. 그래서 노트북 시세를 알아보던 중 ‘노트북 렌탈’ 서비스를 알게 됐다. 1박2일 기준으로 1만원 미만, 한 학기 기준으로 대여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씨는 일단 급한대로 1박2일 동안 노트북을 렌탈했다.
 
3년만 지나도 성능이 떨어져 구형이 되는 시대인지라, 이씨는 단기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최신용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는 노트북 렌탈서비스에 만족했다. 노트북 안에는 최신 영화, 음악, 게임 등 콘텐츠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이씨는 이렇게 노트북을 빌려서 사용하는 게 오히려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 이후에도 이따끔씩 노트북 렌탈서비스를 이용했다.
 

직장인 차모(34)씨는 캠핑시즌 때마다 텐트 등 캠핑용품을 렌탈한다. 캠핑용품을 전부 구입해봤자 1년에 쓰는 건 단 몇 번 뿐이고, 크기도 크고 종류도 많아 보관하는 데 애를 먹겠다는 판단이 들어서다. 사서 안 쓰고 묵혀두는 것보다 빌리는 게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여름, 가을에 렌탈 전문 사이트를 통해 각종 캠핑용품을 빌렸다.
 
차씨는 캠핑 전 텐트, 캠핑매트, 파라솔, 바비큐 그릴, 불판, 침낭, 접이식 테이블 및 의자, 아이스박스, 캠핑용 랜턴 등을 빌렸다. 전부 상태가 A급이라서 만족스러웠다. 차씨는 캠핑용품 외에도 가족과 즉석으로 사진을 남길 수 있는 폴라로이드까지 빌렸다. 
 
렌탈 전문 업체의 렌탈제품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컴퓨터(노트북, 넷붓, 데스크탑, 복사기, 프린터, 기타주변기기), 디지털 캠코더/카메라(HD화질 메모리 캠코더, 수중방수 캠코더, DSLR카메라, DSLR렌즈, 디지털카메라, 수중방수 카메라, 즉석카메라), 네비게이션(7인치·4인치), 영상기기(PDP TV, 프로젝터, DVD 플레이어), 멀티미디어(PMP, 닌텐도/PSP 등 게임기·전자사전), 가전/주방/업소/생활(정수기, 비데/연수기, 공기청정기, 청소기, 안마기, 유아용품, 명품가방), 스포츠레저(텐트, 취사용품, 사이클/카이클론, 런닝, 천막/캐노피, 무선모형, 기타 제품) 등이 있다.
 
 
렌탈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렌탈 전문 업체의 사이트에 가입한 뒤 원하는 상품을 고르고 렌탈 시작일로 지정을 원하는 날짜를 선택하고 렌탈 일수를 조정한다. 대여시작일은 상품을 택배로 수령하거나 직접 방문 수령하는 날짜다. 렌탈 기간을 지정한 후 신청 버튼을 누르면 된다. 반납은 택배로 이루어진다. 렌탈 일수를 조정하는 것 외에는 일반 쇼핑몰 이용 방법과 큰 차이가 없다.

새로운 소비문화
소유 대신 대여
 
다소 낯선 렌탈 상품도 있는데, 바로 명품백이다. 경기침체에도 명품 소비는 불황을 모른다. 그렇다고 모두가 새 제품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온 게 명품백 렌탈서비스다. 명품백을 갖고 있는 소비자가 자신의 명품백을 렌탈 업체 사이트에 올리는 방식이다. 렌탈 요청이 들어오면 업체는 명품백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한다. 렌탈료는 5만원 선으로, 1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명품백을 제공하는 사람에겐 일정 부분 수익을 공유한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명품이라는 희소가치를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반 소비자 외에도 행사를 주관하는 이들을 위한 렌탈서비스도 있어 눈길을 끈다. 행사용 테이블, 의자, 엠프 등 각종 음향장비, 간이화장실, 전시용 진열대, 테이블, 벤치 의자도 렌탈이 가능하다. 우리가 참석하는 행사장에 있는 용품 중 일부는 렌탈 제품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장난감을 대여하는 렌탈서비스도 눈길을 끈다. 이 렌탈서비스는 장난감 비용을 줄이고, 장난감 소비 방법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마련됐다. 소비자는 합리적인 가격에 장난감을 대여할 수 있고, 아이들도 더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다.
 
비싼 가전·가구 대여 유행
목돈 부담에 웬만하면 빌려
 
대여 방법은 해당 업체 홈페이지에서 원하는 장난감을 위시리스트에 담고, 추후 배송된 장난감을 재미있게 갖고 논 후 반납하면 된다. 배송 후에는 초음파 세척기 및 자외선 살균 건조기를 이용해 위생관리된다. 이용 금액은 월정액 회원제로 운영된다. 현재 키마, 닌자고, 프렌즈, 스타워즈, 시티, 크리에이터, 디즈니, 레고 무비 등의 레고 시리즈를 대여하고 있다.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한 번쯤 느꼈던 문제, 이제는 대여로 해결이 가능해졌다. 이외에도 휴대폰, TV, 악기, CCTV, 보청기, 음식물처리기 등 다양한 제품이 렌탈 상품으로 올라오면서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대행서비스도 렌탈서비스의 한 축이라고 볼 수 있다. 애인, 부모, 결혼식 하객 등의 역할을 대신 해주는 건전대행도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다. 함께 밥을 먹고 쇼핑하고 영화도 보는 애인대행을 비롯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부모대행, 결혼식 하객이 없어 걱정인 신랑, 신부를 위한 하객대행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역할대행과 같은 서비스가 성행하는 원인으로는 온라인을 통한 인간관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대면접촉을 피하게 되면서 사회적 관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점차 개인주의 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퇴폐적인 이미지로 연결되는 등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지난해 한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로 건전대행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건전대행을 제안한 게시자에 따르면 한 시간을 기준으로 같이 걷는 것은 3만원, 장보기는 4만원, 밥 먹기는 5만원이다. 같이 걸을 경우 사람이 없는 곳은 1만5000원의 추가 요금이 발생하며, 장을 볼 때 짐이 많으면 1만원을 더 받는다. 밥을 먹을 때는 무엇을 먹든 상관없이 무조건 5만원이며 옷에 음식 밴 냄새 때문에 세탁비 2만원이 추가된다. 드라이브는 4만원이며 원거리로 나갈 경우 추가 할증료 2만원이 붙는다. 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 차와 쿠키 혹은 케이크 비용을 부담해야 하며 이와 별도로 요금은 4만원이다. 게시자는 본인을 ‘167cm 48kg’라고 소개한 뒤 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이라고 어필했다. 씁쓸한 세태를 비꼬았다고 볼 수도 있다.

갈수록 커지는
유료 대여시장
 
KT경제경영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011년 8조5000억원에 달하던 개인 및 가구용품 렌탈 시장이 2016년 11조4000억원으로 34% 늘었다. 5000만 인구 모두가 1인당 20만원 이상의 물건을 빌려 쓸 때 나오는 수치다. KT경제경영연구소는 렌탈 시장이 오는 2016년에 25조9000억원까지 팽창할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 렌탈시장은 1970년대 건설시장과 기업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렌탈이 합리적인 소비 대안으로 떠올랐고,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렌탈 시장이 부흥을 이끈 일등공신은 경기침체라 할 수 있다. 불경기에는 적은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렌탈이 호황을 이룬다. 물건은 사야 하는데 목돈은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소비자들은 눈이 높아진 상황인데, 경기는 좋지 않다. 즉 필요한 물건은 많아졌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어 렌탈 시장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렌탈 업체 수도 2만5000여개에 달할 정도로 성업 중이다. 생활가전 등 기존에 자리를 잡은 업종부터 시작해 다소 생소한 명품이나 그림 등 의외의 품목도 렌탈 제품으로 등록돼 있다. 렌탈 관련업에 종사자는 15만명이다. 전문가들은 하루가 다르게 출시되는 신제품의 등장과 함께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현상이 렌탈 시장을 견인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도 물건도 ‘입금만 하면 OK’
불경기 합리적인 대안으로 떠올라
 
렌탈 시장을 기업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리 없다. 이미 여러 기업이 다양한 렌탈 물품을 공급하고 있다. 정수기, 가습기, 제습기 등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생활가전용품은 이미 렌탈 시장의 트렌디셀러로 여겨지며, 여기에 사용기간이 짧은 육아용품, 안마 의자처럼 구매단가가 높은 의료 건강 장비, 하루가 다르게 최신형이 출시되는 카메라 같은 IT기기, 분기에 한 번 쓰면 많이 쓰는 캠핑용품 등.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은 대부분 빌릴 수 있는 환경이다.
 
과거에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목돈을 들이더라도 소유하려고 하는 경향이 짙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마주칠 경우에만 물건을 빌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렌탈을 대하는 분위기가 다르다. 못 사서 빌리는 것이 아니라 렌탈 자체가 새로운 소비 방식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특히 요즘에는 렌탈 대여 기간 동안 업체로부터 관리도 받을 수도 있어, 렌탈에 대한 의식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
 
렌탈 시장은 경기침체와, 렌달에 대한 소비자 인식변화, 렌탈 기업의 다양화라는 세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서 급성장하고 있다. 그만큼 시장은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렌탈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가장 불편해 하는 것 중 하나는 서비스를 비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작은 물건 하나를 빌리더라도 업체마다 일일이 연락을 취해서 확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렌탈 전문 오픈 마켓’이다. 온라인은 물론 앱을 통해 모바일에서도 렌탈서비스를 비교할 수 있어 호평을 받고 있다. 렌탈 전문 오픈 마켓에서는 생활가전용품, 육아용품, 의료 건강 장비, IT기기, 캠핑 용품 등 다양한 업체들의 렌탈 품목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어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을 돕고 있다. 여기에 ‘재능(전문MC, 출장 카메라맨, 초대 가수 등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까지 빌려준다는 콘셉트가 등장에 눈길을 끌고 있다.  이처럼 렌탈서비스는 어느덧 새로운 소비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 시장의 진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

‘반짝 유행’
일각서 우려도
 
지난달 한국렌탈협회에 따르면 국내 렌탈서비스 시장규모는 2004년 1조원에서 2013년 약 10조2000억원으로 10배넘게 늘었다. 이는 피부관리, 헬스, 성형 등 국내 뷰티산업이나 게임시장, 배달음식 시장과 대등한 규모다. 각 업체별로 매년 15∼30% 가량 매출이 늘고 있다.
 
반면 한국소비자원의 자료를 보면 ‘소유권 이전형 렌탈’ 관련 소비자상담은 2011년 7447건에서 2012년 6988건으로 소폭 줄다가 지난해 8558건으로 다시 늘고 있다. 소유권 이전형 렌탈은 일정 기간 렌탈료를 지불하고 계약 종료 후에 제품 소유권이 소비자에게 이전되는 렌탈 방식이다.
 
소비자 상담 가운데 계약 해지 관련 불만 비중이 37%로 가장 높았고 이어 품질 및 사후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21%로 뒤를 이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렌탈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리와 서비스 인력을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 부분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반짝 성공에 그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혼수도 렌탈, 뭐가 되나?
 
최근 예식장과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 비용이 상대적으로 비싸지는 봄, 가을 성수기 대신,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겨울과 여름 비성수기 시장으로 예비부부들이 몰리고 있다. 혼수시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결혼 초기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가전·가구 등 혼수를 소유하는 대신 렌탈서비스를 이용해 실속을 챙기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비용절감이 중요하다고 해서 예쁘고 아기자기한 신혼살림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젊은 층일수록 유행에 민감하고 기능과 디자인에 대한 안목이 높다. 그래서 나온 것이 ‘혼수 렌탈 패키지’다.
 
가전제품 렌탈 전문 업체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이사가 잦고 제품 교환 주기가 짧은 신혼부부들을 비롯해 다양한 소비자들의 비용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냈다”고 설명했다. 한국렌탈협회에 따르면 혼수용품을 다루는 생활가전 렌탈 업체는 1100개에 달한다고 한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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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