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PGA챔피언십 인상적인 순간 베스트10

한 끗 차이로 엇갈린 우승자와 패배자

올 시즌 마지막 메이저인 PGA챔피언십이 지난 8월10일부로 막을 내리면서 골프계는 휴식기에 돌입, 내년 시즌 맞이에 한창이다. ‘매킬로이’라는 새로운 골프황제가 탄생한 2014 PGA챔피언십 종료를 기념해 <일요시사>가 인상적인 ‘우승 베스트10’과 대회에서의 ‘베스트·워스트 샷 베스트5’를 모아 봤다.

양용은, 신의 한수로 골프황제 우즈 제쳤다
필드의 숫사자 존 댈리의 엄청난 드라이버

우즈 VS 메이 연장까지의 드라마틱한 접전
마이크 리드, 5개 홀 연속 3오버파 굴욕


PGA챔피언십 우승 베스트10
1. 1991년 존 댈리 ‘크루키드 스틱’
장타 본능을 맘껏 발휘한 존 댈리. 전장을 늘린 빅골프 코스를 짧게 느낄 정도로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존재조차 전혀 알리지 못했던 존 댈리는 엄청난 비거리의 드라이버 샷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우승을 거머쥐었다. 다소 뚱뚱해 보이는 체구와 긴 금발을 휘날리며 성큼성큼 걷는 그는 한 마리의 수사자를 연상케했다.
2. 2000년 타이거 우즈 ‘발할라’
올해 개최지인 발할라에서 13년 전에 열린 대회로 타이거 우즈가 밥 메이와의 드라마틱한 접전을 벌였고, 이듬해 마스터즈 우승을 통해 타이거 슬램을 달성한 3번째 대회였다. 후반 홀로 갈수록 20m 버디퍼트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연장전까지 가는 최고의 승부를 벌였다.
3. 1927년 월터 하겐 ‘씨더크레스트’
1920년대 최고의 골퍼였던 월터 하겐이 4주 연속 PGA투어 우승(총 5주 연속)을 했던 대회.
4. 2012년 로리 매킬로이 ‘키아와아일랜드’
23세 약관의 나이로 무시무시한 장타력을 앞세워 메이저대회에서 두 번째 8타 차 우승을 일궜다.
5. 1946년 벤 호건 ‘포틀랜드’
메이저 우승을 통해 긴 슬럼프에서 벗어났다. 그는 이후 8번의 메이저 우승을 추가했다.
6. 1997년 데이비스 러브 3세 ‘윙드풋’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 마지막 라운드의 72번째 홀에 생긴 무지개는 뛰어난 골프선수였던 부친 데이비스 러브 2세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7. 1984년 리 트레비노 ‘숄크릭’
44세 나이에 6번째이자 마지막인 메이저대회 우승을 4타 차이로 거뒀다.
8. 1980년 잭 니클라우스 ‘오크힐스’
40세에 7타 차 우승으로 그 당시 최고기록을 세웠고 17번째 메이저이자 5번째 PGA 챔피언십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9. 1938년 폴 런얀 ‘샤우니’
최고의 스윙어로 칭송받던 샘 스니드에게 11번 홀까지 8홀 차이로 벌리며 매치플레이의 승부를 일찌감치 결정지었다 (19 58년 이전까지 PGA챔피언십은 매치플레이 방식으로 진행됐다).
10. 1923년 진 사라젠 ‘펠헴’
21살의 나이로 연장 2번째 홀까지 가는 접전 끝에 1922년에 이어 2연속 PGA챔피언십 챔피언에 등극하며 3번째 메이저 우승을 차지했다.

역대 베스트샷 빅5

1. 1961년 제리 바버-올림피아 필드
마지막 날 마지막 홀에서 52피트(15.8m) 퍼트를 성공시키며 돈 제뉴어리와 동타를 이뤘다.
2. 2003년 숀 미킬-오크힐스
72번째 홀에서 7번 아이언으로 홀 3인치(7.6m)에 붙이면서 탭인 버디를 성공했다. 2타차 우승을 했다.
3. 1986년 밥 트웨이-인버네스
4라운드 마지막 홀에서 30피트(9.14m) 벙커 샷을 성공시켜 버디를 기록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4. 1972년 게리플레이어-오클랜드 힐스
러프에서 9번 아이언으로 125야드를 날리면서 호수를 건너 홀컵 4피트(1.2m)에 붙였다.
5. 2009년 양용은-헤이즐틴
4라운드 마지막 18번 홀에서 210야드 하이브리드 샷을 8피트(2.4m)에 붙이면서 타이거 우즈를 제치고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역대 워스트샷 빅5

1. 1989년 마이크 리드-캠퍼레이크스
메인 스튜어트에게 5홀 남긴 상황에서 6타차 선두를 하던 5개 홀에서 3오버를 쳐서 1타 차이로 졌다.
2. 2011년 제이슨 더프너-애틀랜타애슬래틱클럽
3홀을 남기고 4차타 선두였다. 그 3개 홀에서 3오버를 치며 연장에서 패했다.
3. 1977년 진 리틀러-페블비치
9홀을 남기고 5타 선두였던 그가 후반에 41타를 치면서 연장에서 레니 위드킨스에게 패했다.
4. 1986년 그렉 노먼-인버네스
마지막 날 후반 9홀에서 41타를 기록하며 밥 트웨이에게 2타 차로 졌다.
5. 1987년 스콧 호크-PGA내셔널
마지막 72번째 홀에서 10피트(3.1m) 버디를 넣으면 우승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3퍼트를 하여 우승을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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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채 상병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취한 것으로 파악됐다. 자신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한 게 핵심이다. 임 전 사단장과 연락이 닿은 인물들은 대부분 이해관계자다. 자칫하면 회유 정황으로 보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은 ‘채 상병 사건’의 핵심 피의자다. 수사외압 논란의 시발점이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직접 챙긴 인물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의 수사 대상인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사건을 물밑에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다 왜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침묵 지키다… 임 전 사단장은 최근까지 복수의 해병대 간부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는 간부 A씨에게 “(공수처)수사가 종결되지 않은 상황서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서 연락하지 못했다”며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은 없었다. 다만 “모두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지만 아들을 잃은 채 상병의 유족 특히 모친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다. 진실을 밝힐 때까지는 고통스러워도 견딜 생각이다.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전했다. 임 전 사단장은 A씨에게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하 대령)의 변호인이었던 김경호 변호사에게 내용증명을 보낸 것과 관련해 민·형사 소송을 준비 중이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뉘앙스로 연락을 취했다. 김 변호사가 자신을 고발한 게 무고에 해당하는지와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타 간부들에게도 비슷한 도움을 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간부는 <일요시사>와의 연락서 “난감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모셨던 사람이긴 한데 임 전 사단장에 대해 개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사람이 채 상병 사건 진상규명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 전 사단장은 과거 박 대령에게도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바 있다. 자신은 물속 수색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수차례 했고 작전통제권이 육군 50사단장으로 넘어간 상황서 자신의 책임과 범위 내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며, 이에 대한 박 대령의 기억과 판단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공수처 수사 대상인데… 사건 연루자들에 연락 당시 임 전 사단장은 “상급지휘관(임 전 사단장)에게 작전통제권은 없지만, 부대를 방문해 전술토의할 수 있고 효율적인 작전이 되도록 유도할 권한은 있다”고 했다. 작전통제권이 없어 안전 책무가 없다면서도, 자신이 현장서 ‘수변을 수색하라’고 지휘한 건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이런 이유로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직권남용 문제를 언급한 해병대수사단의 조사 결과 보고서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해병대 수사단은 임 전 사단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적시하지 않았다. 수사단은 ‘작전통제권과 상관 없이’ 임 전 사단장을 실질적 수색작전 지휘관으로 보고, 안전지침을 부대에 하달하지 않아 채 상병 순직사고가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임 전 사단장은 김 변호사와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법적 대응까지 예고했다. 김 변호사가 SNS에 게시한 글 중 허위 사실이 포함된 내용이 있다는 게 임 전 사단장의 주장이다. 그는 김 변호사에게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한계 속에서 해석과 이해를 거쳐 어떤 주장을 하는 것에 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악의적이라고 생각한다”며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문제점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견됐고, 제가 사안의 진상을 밝히면서 그걸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허위가 여론을 조작하고 진실을 가리는 불의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 나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을 공수처에 세 번째로 고발했다. 이번 혐의는 군형법 제79조 무단이탈죄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임 전 사단장은 지난 1월 말 서울 노원구에 있는 화랑대연구소가 아닌 영등포구에 위치한 해군 관사 ‘바다마을아파트’에 거주하며 인접한 해군 재경근무지원대대 사무실로 출근 중이다. 마음 급해졌나…어떤 의도? 갑자기? 특검 압박 느꼈나 이 사실은 그가 여러 곳에 자신이 결백하다는 취지의 문서를 내용증명, 등기우편 등으로 보내면서 드러났다. 등기 봉투의 발신지는 화랑대연구소였으나 배송 조회 결과 실제 발신지는 서울 신길7동 우편취급국이었다. 임 전 사단장이 거주 중인 서울 관사 인근이다. 발송 시간도 대부분 일과시간 직전이나 일과 중이었다. 임 전 사단장은 언론을 통해 “연수 초기에 육사에서 주로 근무했으나 장거리 출퇴근 비효율적이라서 최근엔 해군재경대대서 근무 중이다. 근무 장소 중 하나가 해군 재경대대”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정책 연수의 일시와 출퇴근 시간 및 장소가 명령으로 특정된다. 인사명령의 지정된 장소서 지정된 출퇴근 시간을 준수해야 한다”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인사명령이나 상급기관의 지휘관에게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최근 자주 번호를 변경하는 임 전 사단장의 핸드폰을 압수수색해 무단이탈한 장소와 상급지휘관인 해병대 사령관에게 정식으로 사전에 허가를 받았는지에 관한 진실을 밝혀 강력히 처벌해 달라는 취지”라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행동이 증거인멸 시도로 볼 수 있다”며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내며 같이 책임을 면하자는 회유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공수처는 지난 1월부터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와 경찰 이첩 과정서 외압이 있었는지에 대해 강제수사를 착수해 왔다. 박 대령에게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것에서 임 전 사단장이 적극적인 책임 회피에 나섰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현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권서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자 조용했던 임 전 사단장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부적절한 처신 한 해병대 간부는 “전우의 죽음 이후 형평성에 어긋나거나 석연치 않은 윗선의 처리는 진상규명 문제를 떠나 정치권 개입을 불렀다”며 “도의적 책임도 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일부 작자들의 행동으로 인해 해병대 전체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 전 사단장은 <일요시사>가 사건 관계인에 연락한 이유에 관해 묻자 "사건 관계인에게 연락한 것은 사실 확인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