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말하는 ‘엘리트’층의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교수, 의사, 대기업 임원 등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안정을 모두 거머쥔 전문직 종사자들의 자살이 그것이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들이 자신이 이뤄낸 모든 것을 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1등을 놓쳤을 때 느끼는 압박감, 명예실추로 인한 모멸감 등이 이들을 자살로 내몬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2월24일 서울의 한 사립대 교수이자 초전도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이모(58)교수가 자택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노벨상 수상에 대한 기대까지 한 몸에 받던 성공한 과학자의 사망원인은 자살이었다. 이는 숨진 이 교수의 웃옷 호주머니에서 나온 유서가 말해줬다. 유서에는 “물리학을 너무나 사랑했는데 잘하지 못해 힘들다. 큰 논문을 발표해야 하는데 가족과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죽음 부른 우울증
한국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한국과학상 물리학부문 수상자로 선정되는 등 우리나라 초전도체 연구를 세계 수준으로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는 연구실적에 대한 스트레스로 추정된다. 학교 관계자는 “이 교수가 2008년 모교로 자리를 옮긴 뒤 연구실적 등의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그의 죽음에는 극도의 압박감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의사, 교수, 학교교장 등 사회적 지위 높은 계층 자살 잇따라
실패에 대한 공포심과 압박감, 명예실추 등으로 극단적 선택
같은 달 20일에는 서울의 한 대학병원 김모(39)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병원 측에 따르면 김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인 병원 13층에서 뛰어내렸고 병원 건물 6층 옥상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김 교수가 자살을 선택한 이유는 우울증이었다. 평소 우울증을 앓던 김 교수의 책상에는 숨진 당일에도 우울증 약이 놓여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가하면 같은 달 25일에는 경남 김해에서 치과의사가 자살했다. 경남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치과병원을 운영하던 서모(36)원장은 이날 오후 2시쯤 병원 원장실에서 책장에 전기줄로 목을 매 목숨을 끊었다. 평소 경영난에 허덕인 것으로 알려진 서씨는 경제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결국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전기세와 고용보험 등이 밀려있어 서씨가 괴로워했다는 유족의 진술이 이를 뒷받침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는 자살을 한 이유를 보여주기도 했다. 교육계에서도 자살이 이어졌다. 뇌물수수 등의 비리파문에 휩싸인 교장들의 죽음이다. 지난달 18일에는 부산시 해운대구의 한 중학교 교장실에서 교장 성모(57)교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 현장을 목격한 경비원은 “퇴근시간이 지나도록 교장선생님이 나오지 않은 채 교장실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갔더니 교장선생님이 쓰러져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후 성 교장은 구급대에 의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숨진 후였다. 경찰은 외부침입 흔적이 없고 마시다 만 농약병이 발견된 점을 미뤄 성 교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에 무게를 실어주는 또 다른 사실은 최근 성 교장이 뇌물수수와 관련해 경찰의 내사를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산경찰청 수사과는 성 교장이 지난 2007년 7월 부산 북구 모 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할 당시 운동장 인조 잔디 조성공사와 관련, 업체로부터 금품을 받은 혐의를 잡고 이날 오후 성 교장의 집무실과 자택에 대해 압수수색을 했다. 이 같은 수사에 압박감을 느낀 성 교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 지난 2월에는 비리혐의로 직위해제된 모 초등학교 교장 한모(62)교장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서울 강서경찰서에 따르면 한 교장은 지난달 20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한 고등학교 지하주차장 입구에서 빨랫줄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숨진 한씨는 방과 후 학교 교사들에게 전기세 명목으로 돈을 받은 혐의가 드러나 지난 1월 직위해제된 바 있다. 이후 교육청 감사로 혐의가 확인돼 부천중부경찰서의 조사를 받았고 경기도교육청이 징계위원회를 열어 구체적인 징계 방침을 정할 예정이었다.
유서에 따르면 한 교장이 목숨을 끊은 이유는 결백함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한 교장은 숨지기 전 가족 등 지인들에게 총 8개의 유서를 보냈는데 유서에는 본인의 결백을 호소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각종 분야에서 높은 지위를 보장받았던 이들이 목숨을 끊는 이유는 ‘보통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와는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 중 첫 번째 이유는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 경험이 있었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더욱 크게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실패를 경험했을 때는 그에 대한 좌절감이나 상실감이 몇 배나 크게 다가와 자살충동을 느끼기 쉽다는 것. 경기도의 대학병원에 근무하는 한 의사는 실패나 좌절을 해 본 경험이 없는 만큼 막연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어떻게 보면 내 인생에는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 학창시절부터 줄곧 1등을 도맡아 해왔고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가졌다”며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때때로 어떤 한계에 부딪힐 때 마다 ‘이러다 끝이 나는 건 아닌가’라는 불안감이 생겨 우울감에 빠질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두번째 이유는 성공한 사람들은 자존감이나 자기애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존감이 무너졌을 때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쉽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자신이 최고라는 생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타인이 최고의 위치에 오르거나 자신이 내려가는 것에 대해 압박감을 느끼게 되고, 그 사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명했다.
“나에게 2등은 곧 죽음”
마지막 이유는 실추된 명예를 되찾거나 결백을 증명해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살을 택한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명예가 실추되거나 이름이 더럽혀졌다고 느낄 때 그것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고, 죽음을 통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는 “최근 목숨을 끊은 엘리트들을 보면 자신의 불명예를 죽음으로 지키는 ‘사무라이 자살’의 성향을 보인다”며 “사회적 영향력이 큰 사람일수록 자살을 했을 때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은 커진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