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하지만 아직도 안 의사의 혼령은 타국을 떠돌고 있다. 유해를 찾아 고국 땅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이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일제가 안 의사의 사형집행을 명령한 기록 원본이 공개돼 유해 발굴 작업에 청신호가 켜졌다. 뤼순감옥 수감생활부터 사형까지 세세한 기록이 남아 있어 유해가 묻힌 장소가 기록된 자료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형집행 명령서 공개로 유해 발굴 청신호
수감부터 사형까지 기록돼 있어 발굴 가속도
“내가 죽거든 하얼빈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거든 조국 땅에 반장(返葬)해다오.”
1910년 3월26일 뤼순 감옥 교수대 형장에서 죽음을 앞둔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유언했다. 하지만 순국 100주년이 지난 오늘도 안 의사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유해 봉환 작업이 번번이 실패로 그쳐서다.
1986년부터 정부와 학계, 민간단체 등에서는 끊임없이 유해 발굴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몇 가지 걸림돌이 훼방꾼 노릇을 했다. 그 중 하나는 안 의사가 사망한 뒤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 뤼순 감옥 뒤편에 있는 공동묘지에 건물이 들어서고 있어 발굴에 방해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뤼순지역이 군사보호지역인 탓에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된 상태며 이로 인해 발굴 작업에 제약이 있다는 것.
쉽지 않은 유해 발굴
하지만 국가보훈처와 민간단체 등은 안 의사 유해 발굴을 멈추지 않았다. 2005년부터는 국가 차원의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됐다. 그 해 정부는 중국에 안 의사 유해 발굴에 대한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중국은 안 의사가 황해도 해주출신이라는 점 등의 이유를 들며 남북이 함께 조사를 해야 한다고 했고 그 해 9월 남과 북은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발굴’ 합의서를 작성하고 함께 조사발굴단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당시 통일부는 북한과의 1차 접촉에서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단’을 구성하고 안 의사의 유해 매장 위치에 대한 관련 자료 조사 및 확인작업에 적극 협력하는 한편, 안 의사에 대한 기념사업을 적극 지원해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남북은 2차 접촉을 통해 안 의사의 유해가 매장된 위치와 관련된 양측의 추정 자료를 바탕으로 정확한 매장 위치와 향후 사업 추진방향 등에 대해 협의했다. 이어 2006년 3월 남북은 3차 접촉을 가져 그동안 양측이 입수한 자료를 교환하고 공동발굴조사단의 구성문제를 협의했다. 이처럼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남과 북의 프로젝트는 미사일핵실험 등으로 남북대화가 단절되면서 함께 시들해졌다.
그리고 2007년 4월, 개성에서 제4차 실무접촉을 가졌고 남북공동발굴단을 구성해 그해 4월 하순부터 1개월여 간 현지조사 및 유해 발굴을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2008년 3월까지도 본격적인 발굴 작업은 이뤄지지 않은 채 현장은 방치됐다.
그런데 더 이상 발굴 작업을 늦출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던 뤼순감옥 뒤편에 아파트가 지어질 예정이라는 발표가 있었던 것. 다급해진 정부는 북한에 또 한번 협조를 요구했지만 남북대화는 순조롭지 않았고 결국 중국정부는 남한조사단만 와도 좋다는 대답을 했다.
이에 국가보훈처는 2008년 4월10일부터 29일까지 한국지질자원연구소의 전문가 5인을 뤼순지역으로 파견해 조사를 벌였다. 당시 많은 이들은 큰 기대를 품었다. 이전의 조사와 달리 유해발굴 전문가들이 다수 참가했고 유해 매장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추정되는 교회 부근 공터와 철거가 진행 중인 낡은 주택가 일부의 경우 부지공사에 따른 훼손 정도가 야산과 송전탑 주변보다는 덜한 것으로 알려져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고조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뤼순 감옥 터 인근 6600여㎡를 대상으로 발굴 작업을 벌였지만 일제시대 도자기와 동물 뼛조각 등이 출토됐을 뿐 인골은 발견되지 않았던 것.
이처럼 다각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 의사의 유해는 고국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 안 의사와 관련된 몇 가지 자료가 공개되면서 유해발굴에도 가속도가 붙을 거라는 청신호가 켜졌다.
국가보훈처는 지난달 22일 일제가 안 의사의 사형집행을 명령한 기록 원본이 담겨있는 일제 관동도독부의 ‘정황보고 및 잡보’ 사본을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으로부터 확보해 공개했다. 그 동안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던 이 자료들은 보훈처가 한일 근대사 전문가들과 함께 지난 2월 찾아내 복사물 형태로 국내에 들어왔다.
자료에는 일제가 1910년 2월14일 안 의사에 대한 사형을 선고한 뒤 3월24일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한 내용이 담겨있다. 안 의사의 사형은 명령 이틀 만인 3월26일 집행됐다.
또 관동도독이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정황보고 및 잡보 4권’도 공개됐다. 이 자료에는 안 의사가 수감됐던 뤼순 감옥의 정황이 담겨있다. 안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사살한 직후 일제에 체포된 이후부터 뤼순 감옥에 수감됐다.
자료에는 “하얼빈에서의 살인사건으로 입감한 (안 의사 포함) 한국인 9명은 엄정 격리할 필요가 있어 모두 독거구금했다”며 “사건의 중대함으로 인해 감방 내외를 엄중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감옥 내에 임시법정을 설치해 단속 처우의 적실 및 심문사항의 비밀을 확보하는 데 힘쓰고 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이어 “특히 야간에는 수시로 간수로 하여금 그 행동을 비밀 정탐케 하고 종래의 감독자 외 간수 6명을 배치하던 것을 8명으로 증가해 만일의 위험을 방지하는 데 힘썼다”고 덧붙였다.
일본 자료에 마지막 희망
이처럼 안 의사의 수감당시부터 사형집행까지 기록되어 있는 자료가 공개되면서 안 의사의 유해가 묻힌 장소를 암시하는 자료 또한 있을 거란 추측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에 보훈처는 자료를 보관한 일본이 유해 발굴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를 협찬하는데도 힘을 쏟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 동안 자료 부족으로 안 의사의 유해 발굴 조사는 뤼순 감옥 주변에서만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양 보훈처장은 “안 의사 유해 발굴 문제는 일본에게는 부담이 되겠지만 우리로서는 풀어야할 숙제다”라면서 “새로운 한일 백년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라도 관련 자료를 공개하라는 우리 요청에 대해 일본은 진정성있는 답변을 내놔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