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 ⑪집단자살의 진실

식민지 오키나와에서만 자행됐던 만행

올해는 광복 69주년이 되는 해다. 내년이면 벌써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지만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는 요원하기만 하다. 게다가 고노담화를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 등 일본의 역사인식은 과거보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어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일본의 자랑인 ‘사무라이 정신’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내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 있다. 일요시사가 화제의 책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를 연재한다.

이곳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을 두려워하는 오키나와 주민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일본은 절대적으로 오키나와를 보호할 것이며,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과 끝까지 생사를 같이 할 것이니 안심하라”며 ‘군민동사(軍民同死)’를 주민들에게 약속하고 있었다.

결코 물러날 수 없는 한판 전투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이 폭동이라도 일으킨다면 일본군으로서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 때문이었다. 초조하고 겁에 질린 일본군은 미군의 상륙 공격이 임박해오자 패전을 예상하고, 죽음을 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했다. “미군에게 잡히면, 사지가 찢기고, 인육까지 먹히게 되니, 차라리 깨끗하게 미리 죽으라”며…….

군민동사?

여기서도 미군을 잔인한 식인종으로 묘사하는 그럴듯한 자료도 보여 주면서 설득했을 것이다. 그 말에 설득당한 주민들이 공포 상태에 빠져 미군이 상륙하기도 전에, 가족과 가족, 주민과 주민들이 모여 칼과 낫 등으로 서로 찔러 주고 찔림을 당하며 ‘집단 자결’했던 것이다.

섬 곳곳의 절벽에서는 아기를 품에 안은 어머니들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고, 일부 주민은 동굴 안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가족끼리 모여 칼과 끈으로 서로의 목숨을 끊은 처참한 자결을 하였다. 노끈으로 가족과 친지의 목을 졸랐고, 칼로 손목의 대동맥을 스스로 그었다. 어떤 아버지는 제 자식의 머리를 잡아 바위에 부딪혀 죽게 하고 자신도 자살했다.

자결을 안 하는지 또는 못하는지, 죽지 않은 주민들을 일본군은 다시 동굴 등에 가두고 폭탄을 터트려 죽였다. ‘이렇게 죽는 것이 미군에 포로로 잡혀 죽는 것보다 깨끗하게 죽는 것’이라면서……. 그리고 ‘이왕 죽을 것 빨리 죽어 식량이나 아끼자고, 그래야 우리가 저 악마 같은 미군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일 수 있다’며……. 그래도 오키나와 주민들은 별 저항 없이 순순히 죽어 갔다.

오키나와 현 자료에 의하면 미군이 상륙하기도 전에 죽은 오키나와 주민이 무려 6만이 넘었다고 하며, 전체 사망자가 약 20만명이고, 일본군 전사자는 약 9만 4000명이라고 한다. 주민 사망자 수도 약 9만 4000명으로 나와 있지만 일본군에 의해 강제 추방된 병사자 등을 포함하면 수만명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전투로 60만이던 오키나와 현 주민의 4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상식적으로 수천수만의 주민들이 모여 자결할 정도라면 지금 죽는 것이 나중에 적군에게 당하는 것보다 낫다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공갈과 협박만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스스로 죽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군의 식량을 아끼기 위하여 죽으라고 한다고 해서, 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리 만무하다. 당시의 오키나와는 오늘날과 같이 일본에 속한 일본의 일부가 아니었다. 일본에 점령된 식민지였다.

식량 아끼려 식민지 주민 대학살?
자살 거부하면 총살, 일본의 잔인함


오키나와의 옛 이름은 류큐(琉球) 왕국으로, 1609년 일본 시마즈(薩摩)의 침략을 받은 이후 그 지배하에 놓였으나 일본과 중국 양쪽에 모두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류큐(琉球)를 자국의 영토라 주장하였고, 1872년에 일방적으로 류큐(琉球)국을 류큐(琉球)번으로 개편했다.

그리고 1879년 무력으로 왕국 체제를 폐지하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여 강제로 영토로 편입한 것이다. 따라서 핍박받는 식민지 주민으로서, 점령군이 전쟁하는 데 식량을 아끼기 위하여 자결하란다고 하여 순순히 자결할 리 만무한 것이다. 더구나 어머니들이 어린 자식을 안고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만일 오키나와 주민들이 일본군에게 설득당해 죽은 것이 아니라면, 집단으로 자결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수많은 사람들을 스스로 죽게 했으며, 무엇이 많은 어머니들이 금지옥지 한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게 했을까?

‘전진훈’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수만의 주민들이 일본군의 작전을 돕기 위하여, 일본 정부의 명령을 따르기 위하여, 미군이 상륙하기도 전에 미리 죽었을까? 일본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포로로 잡히는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위하여 옥쇄했다고 하자. 그리고 그게 바로 일본인들의 사무라이 정신이요 나아가 야마토 다마시(日本魂)라고 해 주자.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자결은 설명되지 않는다.

‘전진훈’이라는 명령을 따르기 위해서라는 것도 앞뒤가 맞는 얘기가 아니다. ‘전진훈’이 내려진 날짜는 전쟁 초기였던 1941년 1월이다. 진주만 공습은 1941년 12월 7일이었고, 일본군들이 본격적으로 옥쇄를 시작한 날짜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42년 12월, 파푸아뉴기니 섬에서부터였다.

‘전진훈’은 미군을 상대로 싸웠던 태평양 전선에만 내려진 것이 아니고,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1년 1월 전군에 내려졌던 ‘령’이었다. 그러나 집단 자살이라는, 옥쇄는 미군을 상대로 싸웠던 태평양 전선에서만 일어났고, 중국 및 동남아시아 전선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엄밀히 얘기하면 ‘전진훈’과 일본군들의 집단 자살은 큰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시간이나 논리로나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일본군이 어떻게 했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자결했을까? 대답은 하나라고 생각한다. 일본군은 진심을 다하여 오키나와 주민을 설득했고,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들의 그 진심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군의 만행


그래서 비참하게 죽느니 차라리 미리 죽는 것이 깨끗한 죽음이라며 죽은 것이다. 설득하는 일본군의 마음에 진실이 담겨 있지 않고는 절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거짓 연극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까지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

일본군은 진심으로 피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모두는 끝내 죽는다. 저 악마 같은 미군들은 우리를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단지 먼저 죽느냐, 조금 나중에 죽느냐 하는 시간의 차이다. 저놈들은 우리를 죽이는 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다. 찢어 죽이고, 살점을 뜯어 먹으며 죽일 것이다.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가? 이왕 죽는 것 조금 일찍 죽더라도 깨끗하게 죽자! 당신들은 무기도 없는 일반 시민이니 먼저 죽어라. 우리는 군인이니, 저 악마 같은 놈들을 끝까지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자결할 것이다. 결단코 저 악마들에게 처참하게 죽진 않겠다. 그리고 우리 모두 저 악마들이 없는 천국에서 다시 만나 평화롭게 살자”라고 설득했을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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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채 상병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취한 것으로 파악됐다. 자신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한 게 핵심이다. 임 전 사단장과 연락이 닿은 인물들은 대부분 이해관계자다. 자칫하면 회유 정황으로 보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은 ‘채 상병 사건’의 핵심 피의자다. 수사외압 논란의 시발점이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직접 챙긴 인물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의 수사 대상인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사건을 물밑에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다 왜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침묵 지키다… 임 전 사단장은 최근까지 복수의 해병대 간부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는 간부 A씨에게 “(공수처)수사가 종결되지 않은 상황서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서 연락하지 못했다”며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은 없었다. 다만 “모두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지만 아들을 잃은 채 상병의 유족 특히 모친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다. 진실을 밝힐 때까지는 고통스러워도 견딜 생각이다.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전했다. 임 전 사단장은 A씨에게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하 대령)의 변호인이었던 김경호 변호사에게 내용증명을 보낸 것과 관련해 민·형사 소송을 준비 중이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뉘앙스로 연락을 취했다. 김 변호사가 자신을 고발한 게 무고에 해당하는지와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타 간부들에게도 비슷한 도움을 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간부는 <일요시사>와의 연락서 “난감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모셨던 사람이긴 한데 임 전 사단장에 대해 개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사람이 채 상병 사건 진상규명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 전 사단장은 과거 박 대령에게도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바 있다. 자신은 물속 수색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수차례 했고 작전통제권이 육군 50사단장으로 넘어간 상황서 자신의 책임과 범위 내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며, 이에 대한 박 대령의 기억과 판단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공수처 수사 대상인데… 사건 연루자들에 연락 당시 임 전 사단장은 “상급지휘관(임 전 사단장)에게 작전통제권은 없지만, 부대를 방문해 전술토의할 수 있고 효율적인 작전이 되도록 유도할 권한은 있다”고 했다. 작전통제권이 없어 안전 책무가 없다면서도, 자신이 현장서 ‘수변을 수색하라’고 지휘한 건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이런 이유로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직권남용 문제를 언급한 해병대수사단의 조사 결과 보고서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해병대 수사단은 임 전 사단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적시하지 않았다. 수사단은 ‘작전통제권과 상관 없이’ 임 전 사단장을 실질적 수색작전 지휘관으로 보고, 안전지침을 부대에 하달하지 않아 채 상병 순직사고가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임 전 사단장은 김 변호사와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법적 대응까지 예고했다. 김 변호사가 SNS에 게시한 글 중 허위 사실이 포함된 내용이 있다는 게 임 전 사단장의 주장이다. 그는 김 변호사에게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한계 속에서 해석과 이해를 거쳐 어떤 주장을 하는 것에 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악의적이라고 생각한다”며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문제점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견됐고, 제가 사안의 진상을 밝히면서 그걸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허위가 여론을 조작하고 진실을 가리는 불의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 나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을 공수처에 세 번째로 고발했다. 이번 혐의는 군형법 제79조 무단이탈죄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임 전 사단장은 지난 1월 말 서울 노원구에 있는 화랑대연구소가 아닌 영등포구에 위치한 해군 관사 ‘바다마을아파트’에 거주하며 인접한 해군 재경근무지원대대 사무실로 출근 중이다. 마음 급해졌나…어떤 의도? 갑자기? 특검 압박 느꼈나 이 사실은 그가 여러 곳에 자신이 결백하다는 취지의 문서를 내용증명, 등기우편 등으로 보내면서 드러났다. 등기 봉투의 발신지는 화랑대연구소였으나 배송 조회 결과 실제 발신지는 서울 신길7동 우편취급국이었다. 임 전 사단장이 거주 중인 서울 관사 인근이다. 발송 시간도 대부분 일과시간 직전이나 일과 중이었다. 임 전 사단장은 언론을 통해 “연수 초기에 육사에서 주로 근무했으나 장거리 출퇴근 비효율적이라서 최근엔 해군재경대대서 근무 중이다. 근무 장소 중 하나가 해군 재경대대”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정책 연수의 일시와 출퇴근 시간 및 장소가 명령으로 특정된다. 인사명령의 지정된 장소서 지정된 출퇴근 시간을 준수해야 한다”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인사명령이나 상급기관의 지휘관에게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최근 자주 번호를 변경하는 임 전 사단장의 핸드폰을 압수수색해 무단이탈한 장소와 상급지휘관인 해병대 사령관에게 정식으로 사전에 허가를 받았는지에 관한 진실을 밝혀 강력히 처벌해 달라는 취지”라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행동이 증거인멸 시도로 볼 수 있다”며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내며 같이 책임을 면하자는 회유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공수처는 지난 1월부터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와 경찰 이첩 과정서 외압이 있었는지에 대해 강제수사를 착수해 왔다. 박 대령에게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것에서 임 전 사단장이 적극적인 책임 회피에 나섰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현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권서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자 조용했던 임 전 사단장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부적절한 처신 한 해병대 간부는 “전우의 죽음 이후 형평성에 어긋나거나 석연치 않은 윗선의 처리는 진상규명 문제를 떠나 정치권 개입을 불렀다”며 “도의적 책임도 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일부 작자들의 행동으로 인해 해병대 전체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 전 사단장은 <일요시사>가 사건 관계인에 연락한 이유에 관해 묻자 "사건 관계인에게 연락한 것은 사실 확인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