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심리, 행동분석 요원인 프로파일러가 주목받고 있다. 여중생 살해범 김길태의 검거부터 자백까지 프로파일러의 공이 컸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부터다. 이들은 강력사건이 터질 때 마다 철저한 분석과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고 있다. 정남규, 강호순, 조두순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흉악범들은 으레 프로파일러가 등장해야 자신들의 행각을 밝히기도 했다. 특히 지능화된 범죄로 증거조차 잡기 힘든 사건이 급증하면서 프로파일러의 역할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여중생 납치살해범 김길태 자백에 프로파일러 공로 알려지면서 주목
범인의 과거 행적과 심리, 행동분석 등으로 범인검거와 자백 이끌어
여중생을 살해한 뒤 보름동안 두문불출했던 김길태. 재개발지역 빈집에 숨어 경찰과 시민을 따돌렸던 김길태 검거의 일등공신은 바로 프로파일러였다. 부산지방경찰청 소속 프로파일러들은 이번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김길태로 밝혀진 순간부터 각종 분석에 들어갔다. 김길태의 범행 이력, 성격, 성향, 과거 행적을 통한 심리 분석이 그것이다.
이를 토대로 경찰은 김길태가 자신의 집이나 범행 현장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고 숨어 지내고 있을 거란 예측을 내놨다. 범인이 11년 동안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해 극단적인 심리적 불안감과 대인기피 등의 증세를 보인 점과 휴대전화나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고 운전면허가 없다는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해줬다.
검거에서 자백까지
심리분석 빛 발해
이에 따라 경찰은 범행 현장인 부산 사상구 덕포동 일대 재개발 지역을 정밀수색했다. 결국 김길태는 경찰의 수색망에 걸려들어 지난 10일 오후 2시45분 덜미를 잡혔다. 범행 현장에서 200~300m 정도 떨어진 부산시 사상구 삼락동의 한 빌라 앞에서 도주하다 경찰관에게 붙잡힌 것이다. 프로파일러가 지목한 장소에서였다.
하지만 수사의 난항은 검거부터 시작이었다. 김길태의 발을 묶을 수는 있었지만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김길태는 ‘자신은 범인이 아니다’라며 범행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성폭행혐의와는 달리 살인혐의에 대한 증거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비협조적인 김길태의 태도는 자칫하면 수사를 장기화시킬 수 있었다.
이때 상황을 반전시킨 공로자 역시 프로파일러였다.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형사들이 김길태를 압박하는 동안 프로파일러들은 김길태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었다. 특히 심적 변화와 반응을 면밀히 기록하며 김길태의 마음이 열릴 기회를 포착하고 있었다.
그러던 지난 14일 거짓말탐지기조사와 뇌파조사 후 김길태의 심리에 큰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심리적 방어벽이 무너져 내린 것.일러가 투입될 적절한 타이밍이 온 것이다. 이때부터 프로파일러의 면담이 시작됐다. 형사에게는 비협조적이었던 김길태는 프로파일러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열었다. 특히 거짓말탐지기가 거짓말하는 순간을 잡아낸 장면을 본 뒤로 마음을 돌렸고 처음 수사를 했던 수사관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자백을 하기 위해서였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이 오면 범행을 자백할 것이란 프로파일러들의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이처럼 검거부터 자백까지 김길태의 마음 속을 정확히 꿰뚫은 프로파일러 중 한 사람은 권일용 과학수사센터 경위다.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강호순 등 강력범들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으로도 유명한 권 경위는 이번에도 정확한 분석으로 사건해결을 앞당겼다.
권 경위가 김길태 검거작전에 주력한 것은 과거행적과 성격 등의 분석이었다. 특히 사회화되는 과정이 짧아 사람들을 피하는 특성을 활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권 경위는 지난 16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김길태는 피해자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며 “미안한 마음이 들도록 유도한 것이 유효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김길태가 혐의를 자백하는데 가장 중요한 도움을 준 거짓말탐지기에 대해서도 “거짓말탐지기를 언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신중하게 판단한다”며 “뇌파 그래프 등 눈에 보이는 증거가 본인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친구를 만나게 해주고,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 다음에 거짓말탐지기를 들이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투입해 김길태의 방어벽을 무너뜨린 권 경위는 굵직굵직한 사건에는 언제나 투입돼 힘을 발휘했다. 미국 FBI에서 프로파일링 기법을 연수받고 국내 1호 프로파일러가 된 권 경위가 이름을 알린 것은 연쇄살인범 유영철 사건이 터진 뒤부터였다. 당시 권 경위는 굳게 입을 다문 유영철로부터 20여명을 살해했다는 자백을 이끌어냈다.
2007년 안양초등학생 두 명을 살해한 정성현이 범행을 실토한 것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권 경위였다. 당시 정성현은 결정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범행을 부인하거나 거짓진술을 하며 수사진을 괴롭혔다.
이에 권 경위는 범인의 행동을 분석한 뒤 직접 정씨를 만났다. 권 경위는 먼저 정씨에게 인간적으로 접근해 방어력을 무너뜨렸다. 그 후에는 증거를 보여주며 압박해갔고 결국 자백을 받아냈다. 자신의 범행에 일말의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았던 흉악범을 상대로 치밀한 심리전을 벌여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강력사건엔 언제나 등장
범인들 방어벽 무너뜨려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해 지난해 붙잡힌 강호순 역시 권 경위의 작전을 통해 범행을 털어놨다. 권 경위는 5시간에 걸쳐 강호순과 여자이야기나 운동, 드라마 등의 이야기를 나눴다. 가벼운 잡담형식의 대화로 강호순의 마음을 흔들어놓은 권 경위는 끝내 강호순에게서도 범행을 자백받기에 이르렀다.
이밖에도 지난 2004년부터 2년여간 13명을 살해한 정남규와 2007년에는 제주에서 실종 40일 만에 시신으로 발견된 양모양 사건 등에도 기여했다.
이처럼 프로파일러들은 치밀한 범행으로 증거 찾기가 어려운 사건에 투입돼 범인을 프로파일링하고 분석해 사건을 해결하고 있다. 특히 최근 발생한 대부분의 강력사건에는 늘 프로파일러들이 수사팀과 호흡을 맞춰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프로파일러 역사는 비교적 짧다. 프로파일러를 활용한 수사기법은 미국에서 1972년 FBI에 행동과학부가 창설되면서 시작됐다. 프로파일러의 수도 적고 수사기법으로 완전히 정착되지도 못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0년에 와서야 비로소 프로파일러가 배치됐다. 이른바 ‘묻지마 살인’등 범행동기를 밝히기가 어려운 범죄나 성폭행 등의 강력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범인들의 행동분석과 심리분석을 할 수 있는 전문인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연방수사국(FBI) 수사기법을 벤치마킹해 서울청에 프로파일러를 배치했다. 권 경위도 이때 프로파일러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국내 프로파일러 환경은 열악한 편에 속한다.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수는 39명. 권 경위가 소속된 경찰청에서 2명, 서울지방경찰청에서 5명, 각 지방청에서 2명 안팎이 배치되어 있다. 인지도 역시 낮은 편이다. 최근 방영된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탤런트 김태희가 맡은 역할 정도라는 것이 프로파일러에 대한 인식이다.
그러나 이번 김길태 사건으로 프로파일러가 국민들에 확실히 각인되고 있다. 프로파일러란 직업에 궁금증을 가지거나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이들도 늘고 있다. 고도화된 수사기법을 사용할 강력범죄가 늘면서 프로파일러의 수요도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에 대한 지식
인간에 대한 애정 필요
그러면 프로파일러가 되려면 어떤 요소가 필요할까. 먼저 범인들의 심리를 꿰뚫어야 하는 만큼 심리학을 전공하거나 관련 지식이 풍부해야 한다. 또 범죄분석이 주요 업무인 만큼 사회학에 대한 관심과 전문지식이 필요하다.
관련 자격증도 있다. 한국사회 및 성격심리학회에서 발급하는 ‘범죄심리전문가 및 범죄심리사 자격증’이다. 하지만 이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프로파일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관계자에 따르면 특채로 선발된 프로파일러 중에는 자격증이 없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회전반에 대한 관심과 사람에 대한 애정이다. 관계자는 “흉악범들의 마음을 돌려 범행을 해결하는 것이 프로파일러인 만큼 범인에 대한 인간적인 애정을 가지고 접근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