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독대? 눈먼 비자금 갖고 줄을 서시요”
군사정부는 무소불위였다. 공식적인 공익법인에 대한 기부금 말고 다른 것도 필요했다. 다름 아닌 비자금이다. 공익법인 기부금은 회계장부에 기장돼 외부에 그 사용처가 알려져 다른 사적인 용도로 전환할 수 없다.
반면 비자금은 기업의 원가처리에서 가짜로 원가투입 즉 가공원가로 계상, 그 금액을 외부로 유출하는 것으로 통상 은행의 가명구좌로 관리하곤 했었다. 구좌는 홍길동, 이몽룡 등 가상의 이름이 동원됐다. 혹은 다른 임원의 이름을 빌려 구좌를 터 관리하기도 했다. 물론 기업마다 다르겠지만 막도장을 새겨 경리부, 자금부 혹은 아예 비자금관리부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했다. 자금관리부의 담당자 책상을 뒤져 보면 수백 개의 막도장이 쏟아져 나올 정도였다.
각 기업 자금부 담당자
책상에 막도장만 수십개
이런 자금은 기업에서 사외로 유출될 때 현금으로 빠지고 그 후에도 다른 구좌로 이동되며 자금세탁을 거치므로 사실상 이 비자금이 어디서 흘러나오고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자금담당자가 입으로 불지 않으면 그 출처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주인 없는 돈’이 돼 버리고 만다.
청와대는 꼬리표 없는 기업의 눈 먼 비자금을 원했다. 역사와 국민 앞에 영원한 비밀로 감춰 놓을 수 있는 비자금이야말로 돈을 원하는 대통령과 비밀리에 돈을 주고자 하는 재벌총수 사이에서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찰떡궁합의 매개체였던 것이다. 청와대는 재벌총수와의 회합을 ‘정치와 재계의 화합’이라는 명목으로 자주 가졌다. 겉으로는 대통령이 재계의 어려움에 대해 대화를 나누자는 취지로만 보였다. 어느 누구도 대통령에게 돈을 주라는 혹은 달라는 멘트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재벌총수의 만남’이라는 문장에서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바로 돈이다. 만남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는 역시 돈인 것이다. 돈의 수수가 불문율처럼 굳어져 버렸다. 어느 재벌총수를 막론하고 최고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을 만나는 데 빈손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표현으로 얘기하면 배짱이 없었다. 또 대통령도 당연히 재벌총수가 알아서 가져올 것이라는 당연지심이 마음속에 있었다. 그러니 돈의 수수는 양손바닥이 마주치는 격과 같았다.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지 어느 일방이 강요한다고 해서 소리가 요란히 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이 자리야 말로 재벌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일단 회합의 일정이 잡히면 재벌총수는 청와대가 원하는 비자금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비자금의 규모가 문제였다. 도대체 얼마를 준비해야 하는지 지침이 없으니 알아서 가져가야 하는 아주 난감하고도 미묘한 상황이 됐다. 각 재벌마다 크기와 등급이 다르니 다른 경쟁그룹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는 정도의 돈 액수가 필요한데 이게 도대체 얼마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재벌총수끼리 담합해서 얼마 얼마씩 얘기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고 청와대에다 눈치 없이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천상 제각각 눈치코치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총수의 됨됨이 따라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다.
모월 모일 눈이 내리는 저녁. 청와대에 내로라하는 재벌총수들이 긴장한 채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입장입니다.”
모두가 일어났고 전두환 대통령은 용이 그려져 있는 상석에 앉았다. 대통령이 비서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다 오셨는가?”
“예, 딱 한 분이 아직…P그룹의 P회장님이 지방에서 오다가 눈이 내려 비행기가 연착됐고 지금 오고 있답니다.”
대통령은 별 대꾸 없이 주변에 모인 재벌총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 날카로운 눈빛 속에는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날씨 및 건강의 덕담을 해가며 경제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동안 과외공부를 많이 한 군부출신의 대통령은 박식한 경제논리를 펴 모인 재벌총수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는 한국역사상 부동산가격의 절대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의 올림픽아파트를 비롯한 강남의 아파트는 미분양으로 아무나 원하는 곳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기업과 실물경제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간 열심히 일하면 아파트 얻기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당시 강남의 아파트 한 채는 5천만원을 밑돌았고 아무도 부동산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소득의 양극화도 심하지 않았다. 임원이나 신입사원이나 월급차이가 그리 나지 않았다. 신입사원 월급이 25만원 정도면 임원의 월급이 1백만원을 넘지 않았다. 지금의 신입사원 월급이 2백50만원, 임원 월급이 2억원이라 한 것과 비교해보면 단순 월급차이가 75만원에서 1억8천만원 이상의 극심한 소득격차를 나타내고 있다. 현재 미친 듯이 불고 있는 부동산광풍과 소득의 양극화 심화를 고려해보면 당시의 경제상황에 대한 그리움이 솟는다 하겠다.
홀로 두자리 금액 준비
한달후 청산절차 밟아
한참 후에서야 문이 열리며 P회장이 헐레벌떡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대통령의 눈길이 슬쩍 P회장에게 쏠렸고 이미 착석한 다른 회장들도 P회장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 눈길 속에는 ‘간도 크지 어떤 자리라고 이렇게 늦게 오다니 저 사람 아래위로 보이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지’하는 뜻이 담겼다.
3시간의 대화가 진행되고 나서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모든 총수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비서관이 제지했다.
“아 참, 지금 옆방에서 각하께서 회장님들과 독대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한 분씩 각하를 뵙고 가시죠.”
안 그래도 들고 온 비자금을 건네 줘야 하는데 기회가 없어 어벙벙 하던 차에 독대라니 서로 잘됐다 싶었다. 각자는 일대 일로 대통령과 만났고 저마다 준비해온 비자금을 진상(?)했다. 누가 얼마를 냈는지는 그것을 낸 총수와 그것을 펴 본 대통령만이 알 수 있었다. 청와대를 나오는 총수들은 고심해서 낸 돈들의 규모에 따라 대통령을 만족시킬 만한 것인지 아니면 진노를 사 오히려 그룹에 불똥이 튈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인식 탓에 얼굴이 밝지 못했다.
P그룹의 P회장은 청와대 회합이 있기 며칠 전 애지중지하는 아들을 잃고 상심하던 차에 청와대 미팅 건을 통보 받았다. 본래 그는 돈에 대한 절약과 검소함으로 그룹을 일으킨 자수성가형으로 아들을 잃은 비통한 심정에 참석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하도 주위 참모들의 간곡한 권유 탓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러니 들고 가야 하는 비자금의 규모에 인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대통령이라 주위에서 세자리 수의 금액을 권유했지만 P회장은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설마 금액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성의표시라는 심정으로 두 자리 수의 금액을 준비했다. “너무 적다”는 참모들의 충언이 귀에 따갑게 들려 왔다. ‘본래 P회장의 그릇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도 해석할 수 있었다. P그룹의 종업원 인건비는 타 그룹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P회장은 청와대를 나오면서 무언가 알지 못할 불안감이 앞을 가리고 마음이 착잡했다.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모임에 지각하는 불경죄를 저지른데다가 대통령에게 주는 지참금도 적은 느낌이 들어 이모저모 심정이 그렇게 달갑지 않았다.
오비이락일까. 한달 후 신문 지상에는 다음과 같은 커다란 인쇄 활자가 경제계를 요동치게 했다.
‘청와대, 재경원은 P그룹 공중 분해해 회사별 매각, 또는 청산절차 돌입키로 결정했습니다.’
공중분해의 원인은 친인척에 의한 족벌경영체제로 인한 부실 및 비도덕 경영과 과다한 부동산투자에 의한 유동성부족으로 자금난 악화였다. 사실 P그룹은 총수가 딸부자라서 사위에 의한 족벌경영체제로 이미 재계에 소문이 파다했다.
본격적인 재벌 해체작업이 숨 가쁘게 이루어지고 각 계열사는 뿔뿔이 흩어져 매각·청산의 수순에 돌입했다. 이 문어발의 잔재를 먹으려는 타 그룹의 문어발이 또 숨 가쁘게 뻗쳐 왔다. 더불어 수출진흥에 편승해 수출붐으로 그룹을 일구어 냈던 율산그룹, 원기업, 대봉기업 등이 무리한 수출확장의 부작용과 총수의 과욕에 따른 사기수출로 붕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예비군훈련을 받을 때 율산, 국제 등이 대우, 삼성 등과 같은 직장대대 소속으로 나란히 훈련을 받았는데 다들 수출위주의 그룹이라 친하게 지낸 바 있었다. 대우, 삼성 직원들과는 달리 율산, 국제 직원들이 다소 느림보여서 중대장의 입에서는 항상 ‘율산 뭐하냐, 국제 뭐하냐’하는 고함소리가 항상 맴돌았다. 그러던 몇 달 후 훈련에는 율산, 국제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옆줄에 서 있던 율산, 국제 직원들의 예비훈련복이 보이지 않아 새삼 기업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둑판 시작하려면
대마만 살렸다”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은 중소그룹은 대마불사의 법칙에 해당하지 않는다. 만일 율산, 국제, 원기업, 대봉기업 등이 대우나 삼성, 현대와 같은 대마였다면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사회에 미치는 그 파장이 엄청나 무리해서 살려 두는 것이 그냥 죽게 내 버려두는 것보다 더 유리한 정치통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둑에서 대마가 죽으면 그 바둑판은 처음부터 둘 수 없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