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김우일의 한국재계 30년 비사

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 함수관계 ⑩전두환 편
“각하 독대? 눈먼 비자금 갖고 줄을 서시요”


정부와 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아가 대통령과 총수는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함수관계다. 그동안 기업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어떤 배에 타느냐에 따라 순항과 표류를 반복해 왔다. 유독 거침없이 승승장구한 신흥 재벌이 있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비운의 총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공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요시사>는 ‘대우 제국’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 ㈜대우M&A 사장이 박정희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정·재계 실세들과 부대끼면서 겪은 ‘한국재계 30년 비사’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간 애증관계를 연재하기로 했다.

군사정부는 무소불위였다. 공식적인 공익법인에 대한 기부금 말고 다른 것도 필요했다. 다름 아닌 비자금이다. 공익법인 기부금은 회계장부에 기장돼 외부에 그 사용처가 알려져 다른 사적인 용도로 전환할 수 없다.

반면 비자금은 기업의 원가처리에서 가짜로 원가투입 즉 가공원가로 계상, 그 금액을 외부로 유출하는 것으로 통상 은행의 가명구좌로 관리하곤 했었다. 구좌는 홍길동, 이몽룡 등 가상의 이름이 동원됐다. 혹은 다른 임원의 이름을 빌려 구좌를 터 관리하기도 했다. 물론 기업마다 다르겠지만 막도장을 새겨 경리부, 자금부 혹은 아예 비자금관리부에서 일괄적으로 관리했다. 자금관리부의 담당자 책상을 뒤져 보면 수백 개의 막도장이 쏟아져 나올 정도였다.

각 기업 자금부 담당자
책상에 막도장만 수십개


이런 자금은 기업에서 사외로 유출될 때 현금으로 빠지고 그 후에도 다른 구좌로 이동되며 자금세탁을 거치므로 사실상 이 비자금이 어디서 흘러나오고 출처가 어딘지 알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자금담당자가 입으로 불지 않으면 그 출처는 영원히 알 수 없는 ‘주인 없는 돈’이 돼 버리고 만다.

청와대는 꼬리표 없는 기업의 눈 먼 비자금을 원했다. 역사와 국민 앞에 영원한 비밀로 감춰 놓을 수 있는 비자금이야말로 돈을 원하는 대통령과 비밀리에 돈을 주고자 하는 재벌총수 사이에서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찰떡궁합의 매개체였던 것이다. 청와대는 재벌총수와의 회합을 ‘정치와 재계의 화합’이라는 명목으로 자주 가졌다. 겉으로는 대통령이 재계의 어려움에 대해 대화를 나누자는 취지로만 보였다. 어느 누구도 대통령에게 돈을 주라는 혹은 달라는 멘트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재벌총수의 만남’이라는 문장에서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바로 돈이다. 만남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는 역시 돈인 것이다. 돈의 수수가 불문율처럼 굳어져 버렸다. 어느 재벌총수를 막론하고 최고의 권력을 가진 대통령을 만나는 데 빈손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표현으로 얘기하면 배짱이 없었다. 또 대통령도 당연히 재벌총수가 알아서 가져올 것이라는 당연지심이 마음속에 있었다. 그러니 돈의 수수는 양손바닥이 마주치는 격과 같았다.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이지 어느 일방이 강요한다고 해서 소리가 요란히 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이 자리야 말로 재벌의 운명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일단 회합의 일정이 잡히면 재벌총수는 청와대가 원하는 비자금을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비자금의 규모가 문제였다. 도대체 얼마를 준비해야 하는지 지침이 없으니 알아서 가져가야 하는 아주 난감하고도 미묘한 상황이 됐다. 각 재벌마다 크기와 등급이 다르니 다른 경쟁그룹과 비교해서 손색이 없는 정도의 돈 액수가 필요한데 이게 도대체 얼마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재벌총수끼리 담합해서 얼마 얼마씩 얘기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고 청와대에다 눈치 없이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천상 제각각 눈치코치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총수의 됨됨이 따라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다.

모월 모일 눈이 내리는 저녁. 청와대에 내로라하는 재벌총수들이 긴장한 채 대통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각하 입장입니다.”

모두가 일어났고 전두환 대통령은 용이 그려져 있는 상석에 앉았다. 대통령이 비서관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다 오셨는가?”
“예, 딱 한 분이 아직…P그룹의 P회장님이 지방에서 오다가 눈이 내려 비행기가 연착됐고 지금 오고 있답니다.”

대통령은 별 대꾸 없이 주변에 모인 재벌총수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 날카로운 눈빛 속에는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날씨 및 건강의 덕담을 해가며 경제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동안 과외공부를 많이 한 군부출신의 대통령은 박식한 경제논리를 펴 모인 재벌총수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시기는 한국역사상 부동산가격의 절대안정을 이루고 있었다. 지금의 올림픽아파트를 비롯한 강남의 아파트는 미분양으로 아무나 원하는 곳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기업과 실물경제에 투자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생산적이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몇 년간 열심히 일하면 아파트 얻기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당시 강남의 아파트 한 채는 5천만원을 밑돌았고 아무도 부동산을 중요시하지 않았다.

소득의 양극화도 심하지 않았다. 임원이나 신입사원이나 월급차이가 그리 나지 않았다. 신입사원 월급이 25만원 정도면 임원의 월급이 1백만원을 넘지 않았다. 지금의 신입사원 월급이 2백50만원, 임원 월급이 2억원이라 한 것과 비교해보면 단순 월급차이가 75만원에서 1억8천만원 이상의 극심한 소득격차를 나타내고 있다. 현재 미친 듯이 불고 있는 부동산광풍과 소득의 양극화 심화를 고려해보면 당시의 경제상황에 대한 그리움이 솟는다 하겠다.

홀로 두자리 금액 준비
한달후 청산절차 밟아


한참 후에서야 문이 열리며 P회장이 헐레벌떡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대통령의 눈길이 슬쩍 P회장에게 쏠렸고 이미 착석한 다른 회장들도 P회장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 눈길 속에는 ‘간도 크지 어떤 자리라고 이렇게 늦게 오다니 저 사람 아래위로 보이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지’하는 뜻이 담겼다.

3시간의 대화가 진행되고 나서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모든 총수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그때 비서관이 제지했다.

“아 참, 지금 옆방에서 각하께서 회장님들과 독대를 하고 싶어 합니다. 한 분씩 각하를 뵙고 가시죠.”

안 그래도 들고 온 비자금을 건네 줘야 하는데 기회가 없어 어벙벙 하던 차에 독대라니 서로 잘됐다 싶었다. 각자는 일대 일로 대통령과 만났고 저마다 준비해온 비자금을 진상(?)했다. 누가 얼마를 냈는지는 그것을 낸 총수와 그것을 펴 본 대통령만이 알 수 있었다. 청와대를 나오는 총수들은 고심해서 낸 돈들의 규모에 따라 대통령을 만족시킬 만한 것인지 아니면 진노를 사 오히려 그룹에 불똥이 튈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인식 탓에 얼굴이 밝지 못했다.

P그룹의 P회장은 청와대 회합이 있기 며칠 전 애지중지하는 아들을 잃고 상심하던 차에 청와대 미팅 건을 통보 받았다. 본래 그는 돈에 대한 절약과 검소함으로 그룹을 일으킨 자수성가형으로 아들을 잃은 비통한 심정에 참석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하도 주위 참모들의 간곡한 권유 탓에 참석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그러니 들고 가야 하는 비자금의 규모에 인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는 대통령이라 주위에서 세자리 수의 금액을 권유했지만 P회장은 도저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고 설마 금액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성의표시라는 심정으로 두 자리 수의 금액을 준비했다. “너무 적다”는 참모들의 충언이 귀에 따갑게 들려 왔다. ‘본래 P회장의 그릇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도 해석할 수 있었다. P그룹의 종업원 인건비는 타 그룹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P회장은 청와대를 나오면서 무언가 알지 못할 불안감이 앞을 가리고 마음이 착잡했다. 비행기가 연착되는 바람에 모임에 지각하는 불경죄를 저지른데다가 대통령에게 주는 지참금도 적은 느낌이 들어 이모저모 심정이 그렇게 달갑지 않았다.

오비이락일까. 한달 후 신문 지상에는 다음과 같은 커다란 인쇄 활자가 경제계를 요동치게 했다.

‘청와대, 재경원은 P그룹 공중 분해해 회사별 매각, 또는 청산절차 돌입키로 결정했습니다.’

공중분해의 원인은 친인척에 의한 족벌경영체제로 인한 부실 및 비도덕 경영과 과다한 부동산투자에 의한 유동성부족으로 자금난 악화였다. 사실 P그룹은 총수가 딸부자라서 사위에 의한 족벌경영체제로 이미 재계에 소문이 파다했다.

본격적인 재벌 해체작업이 숨 가쁘게 이루어지고 각 계열사는 뿔뿔이 흩어져 매각·청산의 수순에 돌입했다. 이 문어발의 잔재를 먹으려는 타 그룹의 문어발이 또 숨 가쁘게 뻗쳐 왔다. 더불어 수출진흥에 편승해 수출붐으로 그룹을 일구어 냈던 율산그룹, 원기업, 대봉기업 등이 무리한 수출확장의 부작용과 총수의 과욕에 따른 사기수출로 붕괴되는 아픔을 겪었다.

당시 예비군훈련을 받을 때 율산, 국제 등이 대우, 삼성 등과 같은 직장대대 소속으로 나란히 훈련을 받았는데 다들 수출위주의 그룹이라 친하게 지낸 바 있었다. 대우, 삼성 직원들과는 달리 율산, 국제 직원들이 다소 느림보여서 중대장의 입에서는 항상 ‘율산 뭐하냐, 국제 뭐하냐’하는 고함소리가 항상 맴돌았다. 그러던 몇 달 후 훈련에는 율산, 국제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옆줄에 서 있던 율산, 국제 직원들의 예비훈련복이 보이지 않아 새삼 기업인생의 무상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둑판 시작하려면
대마만 살렸다”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은 중소그룹은 대마불사의 법칙에 해당하지 않는다. 만일 율산, 국제, 원기업, 대봉기업 등이 대우나 삼성, 현대와 같은 대마였다면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사회에 미치는 그 파장이 엄청나 무리해서 살려 두는 것이 그냥 죽게 내 버려두는 것보다 더 유리한 정치통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둑에서 대마가 죽으면 그 바둑판은 처음부터 둘 수 없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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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