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스토커들의 행각 천태만상

미니홈피 하나면 “넌 내 손 안에 있어”

최근 한 20대 여성이 자신의 원룸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스토커의 소행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범행의 이유. 짝사랑이 집착으로, 집착이 분노로 바뀐 스토커의 잔혹한 복수였다. 이처럼 강력범죄까지 부르는 스토킹. 문제는 각종 첨단기기들이나 인터넷이 스토커들이 활동하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감춰진 사생활까지 파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남몰래 누군가를 쫓고 있는 스토커들의 행각을 살펴봤다.

짝사랑하던 여성의 집 침입해 살해한 스토커 덜미
미니홈피로 이사간 집 알아내고 범행 계획 드러나


지난 5일 전남 광주 김모(28·여)씨의 원룸에서 김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김씨가 연락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는 것이 걱정됐던 직장동료에 의해서였다. 숨진 김씨의 목에는 흉기에 찔린 흔적이 남아 있어 타살의혹이 짙게 드리워졌다.
경찰은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것으로 미뤄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용의자들을 압축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직장동료 백모(29)씨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몇 달 동안 김씨를 상대로 스토커 행각을 벌인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경찰은 백씨를 검거했고 백씨는 결국 자신의 범행을 시인했다. 짝사랑했던 여성을 결국 자신의 손으로 살해하고 만 것이다.

이사가면 될 줄 알았는데…
미니홈피로 주소 알아내

경찰에 따르면 백씨가 김씨를 만난 것은 지난 2008년이었다. 모 스티로폼 회사에서 근무하던 백씨는 같은 직장에 다니는 김씨를 좋아하게 됐고 지난해 7월부터는 본격적으로 구애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씨는 번번이 백씨의 구애를 거절했다.
그러나 백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의 감정은 집착으로 바뀌었고 스토킹 행각을 시작했다. 백씨의 이상행동에 두려움을 느낀 김씨는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 이사를 해 가까스로 백씨를 따돌렸다.

드디어 백씨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 김씨.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었다. 백씨가 이사한 집의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인터넷 미니홈피에 이사한 동네의 사진을 올린 것이 화근이었다. 이 사진을 본 백씨는 추적 끝에 김씨가 사는 집을 알아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백씨는 김씨의 집에 침입을 할 계획을 짰다. 흉기와 청 테이프 등을 준비하고 원룸 주변에 CCTV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아봤다. 범행을 위한 치밀한 준비를 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5일 백씨는 김씨의 집 앞으로 갔다. 꽃 배달 직원으로 위장하기 위해 장미꽃 한 다발도 준비했다.
그렇게 한 동안 집 앞을 서성이던 백씨는 집밖으로 나오는 김씨를 발견했고 강제로 김씨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곳에서 백씨는 김씨에게 “왜 만나주지 않느냐”고 따졌고 이 과정에서 김씨의 손발을 강제로 청 테이프로 묶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백씨는 준비해간 흉기로 김씨의 목을 찔러 살해했다.

그 뒤 백씨는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손발을 묶었던 테이프를 풀고 증거를 없애기 시작했다. 김씨가 입고 있던 옷을 세탁하고 방바닥과 가구, 벽 등에 묻은 피를 세제로 닦아내 완전범죄를 노렸던 것이다. 그 후 백씨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출근해 근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짝사랑하는 사람을 상대로 하는 스토킹은 살인을 불러오는 강력 범죄로 변모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스토커들이 정보기기를 이용해 더욱 치밀하게 범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생활이 고스란히 담긴 미니홈피 등이 스토킹에 악용되고 있다. 대학생 이모(22·여)씨는 최근 미니홈피를 삭제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만들어 수년간 정성스레 꾸민 미니홈피를 하루 아침에 없앤 이유는 스토커에게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무려 1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스토커가 미니홈피를 통해 이씨의 각종 정보를 캐내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기 때문이다.

이씨는 “스토커에게는 공개가 되지 않아 안심하고 미니홈피를 꾸몄는데 알고 보니 스토커가 내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아 내 수시로 드나들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의 미니홈피를 해킹해 바뀐 휴대폰이나 집 주소, 친구관계, 자주 가는 카페나 식당 등을 알아낸 것이다.

이씨는 이 사실을 안 직후 경찰에 신고를 하려 했지만 가족의 만류로 그마저도 포기했다고 한다. 신고해봤자 처벌받기도 어렵고 신고한 것에 대해 보복을 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씨는 “뒤늦게나마 미니홈피를 삭제하긴 했지만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며 “이메일이나 자주 가는 사이트, 홈쇼핑 등도 모두 탈퇴를 해야 되는 건지, 이사라도 가야 되는 건지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e-메일과 인터넷 쪽지, 휴대전화, 메신저 등으로 음란한 글이나 사진을 반복적으로 보내거나 인터넷에 사적인 정보를 공개하겠다며 협박을 하는 사이버 스토킹 역시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경찰청이 지난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정갑윤(한나라당)의원에게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경찰에 적발된 사이버 스토킹은 2005년 333건에서 2008년 1018건으로 급증했다.

회사원 정모(27·여)씨도 몇 달 전부터 자신의 인터넷 메신저에 말을 거는 스토커 때문에 메신저를 열기가 두렵다고 한다. 이 사이버 스토커의 행각은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어느 날 자신과 연결도 되어 있지 않은 한 남성이 메신저로 대화를 걸기 시작한 것. 그 남성은 정씨의 나이, 직장, 출신학교, 사는 동네까지 알고 있다며 만남을 요구했다.

처음엔 친구가 아이디를 바꿔 장난을 치고 있는 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정씨. 하지만 이 남성은 그 후에도 일주일에 몇 번씩 나타나 만나자고 말을 걸었고 그제야 정씨는 사이버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신저로 스토킹?
개인정보 유출 ‘술술’

정씨는 “메신저가 업무 상 꼭 필요해 근무 중에는 꺼둘 수도 없어 메신저 창이 열릴 때 마다 스토커가 아닌가 불안하기만 하다”며 “경찰에 신고를 하려 해도 증거가 없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고 토로했다.

첨단장비를 이용한 스토커까지 등장하고 있다. 스토킹을 하는 사람의 차 등에 위치추적 장치를 달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무서운 스토커들이다. 지난해에는 헤어진 여자친구의 차량에 몰래 위치추적 장치를 단 회사원이 덜미를 잡혔다. 2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를 잊지 못했던 이 회사원은 지난해 5월 전 여자친구의 차량 범퍼에 위치추적 장치를 부착했다. 그리고 실제로 여자친구의 차량이 지나간 곳을 따라 움직이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인터넷, 첨단기기 등 이용해 사생활 캐내는 스토커 증가
이메일, 메신저 등을 통해 스토킹하는 ‘사이버 스토킹’ 급증


이처럼 스토킹을 도와주는 각종 정보기기들이 등장하면서 스토커의 수도 늘고 있다. 사회정신건강연구소가 여성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30%가 스토킹을 당했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스토킹 피해자는 연간 18만명 이상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서울대학교 학생을 대상으로 한 스토킹 설문조사에서 학생 6명 중 1명은 스토킹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서울대 성희롱·성폭력상담소가 지난해 16개 단과대 학생 945명을 대상으로 스토킹 피해 여부를 조사한 결과 15.4%가 ‘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고 답한 것.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학생의 9.7%, 여학생의 22.6%가 스토킹을 당했고 여학생 피해자 중 절반 정도는 2회 이상 피해를 당했다고 답했다. 가해자는 ‘학교 동기, 선·후배’(37.1%), ‘사귀던 친구나 연인’(28%), ‘안면만 있는 사람’(15.7%), ‘전혀 모르는 사람’(9.9%) 등의 순이었다.

스토킹 방법(복수응답)은 전화·문자(70%)가 가장 많았고 다음은 집·회사 방문(40.9%), 홈페이지·미니홈피 글 게시(39%), 따라다니기(35.1%) 등이었다. 특히 협박·위협(23.4%), 신체적 접촉(25.3%), 구타·폭행(16.9%), 성행위 시도(15.6%) 등 위험성이 심각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피해 학생 중 경찰에 신고(5.4%)하거나 전문상담기관을 방문(2%)한 경우는 극히 적었다.

이처럼 스토킹을 하는 방식이 날로 진화할수록 피해자들의 고통도 더욱 심해지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의하면 많은 피해자들이 심한 공포와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수면장애를 겪거나 심한 경우 자살충동까지 느낄 정도의 고통을 겪는 피해자도 적지 않다.

인간관계에도 지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스토킹 피해를 받는 이들 가운데는 휴대폰 번호를 수시로 바꾸거나 직장을 그만두고 주변과 연락을 끊는 경우가 많다. 한때 전 남자친구에게 스토킹을 당했다는 박모(29·여)씨도 스토킹으로 인해 지인들과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혹시 전 남자친구가 지인들을 통해 바뀐 연락처를 알아낼까봐 휴대폰 번호를 바꾸고도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생활까지 지장
남몰래 우는 피해자들

또 피해자들 중에는 가해자를 만났던 자신을 자책하거나 가해자에게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포자기하는 삶을 사는 이들도 있다. 자신의 생활을 버리면서까지 스토커에게 벗어나려 노력했지만 실패했을 때 자포자기를 하게 된다는 것. 

이처럼 스토킹은 피해자의 인생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명백한 범죄지만 뚜렷한 규제방법도, 관련법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스토킹 방지법의 경우 지난 1999년과 2003년 두 차례 발의된 적이 있지만 스토킹을 어디까지 범죄행위로 규정할지를 놓고 논란만 거듭하다가 번번이 폐기된 바 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스토킹 법안 역시 폐기될 위험에 처해있다.

전문가들은 “스토커에게 싫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하게 한 뒤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아야 하고 말로 타일러 볼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며 “경찰에게 신고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더라도 스토커에게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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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