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축은커녕 생활하기도 빠듯한 얇은 월급봉투,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불안감 등의 이유로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는 투잡족이 늘고 있다. 직장인 5명 중 1명은 본업 외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올 정도다.
심지어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는 이들도 아르바이트 전선에 나서고 있다. 이렇다보니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지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는 말도 들린다. 투잡족들을 만나 고충을 들었다.
한 중소제조업체에 다니는 A(33)씨는 동료들과 맥주 한잔을 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1년 전부터 퇴근 후 대리운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투잡족의 대열에 끼게 된 것은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서부터였다.
투잡은 선택 아닌 필수
출산 후 직장으로 돌아가려했던 아내가 회사 사정으로 전업주부가 되면서 생활비는 오로지 A씨의 월급으로 충당해야했다. 하지만 아파트 월세와 공과금, 자동차 유지비, 보험금 등을 내고 나면 어느새 통장잔고는 바닥이 났다. 매달 늘어나는 카드빚에 한숨을 쉬던 중 결국 투잡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택한 것이 대리운전기사였다.
그때부터 A씨의 생활은 그야말로 시간과의 전쟁이었다. 조금이라도 여유시간이 나면 눈을 붙이기 바빴다. 최대한 근무시간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한번이라도 대리운전을 더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밤낮없이 일해 버는 월급은 300여만원이라고. A씨는 “늘 피곤에 절어 있지만 지금의 수입이라도 유지할 수 있다면 계속 대리운전을 할 것”이라며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데 퇴근 후라고 여유를 부리는 것은 나에게는 사치일 뿐”이라고 털어놨다.
불황·해고위험 속 직장인 5명 중 1명 투잡 선택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도 미래 불안감에 알바족
한 중소기업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B(25·여)씨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다. B씨의 밤은 낮과는 완전히 다르다. 낮엔 누가 봐도 커리어우먼으로 보이는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직장에 나가지만 밤엔 화려하고 노출이 심한 옷으로 갈아입고 서울 강남의 한 룸살롱에 출근을 하는 것. B씨가 비밀스러운 투잡족이 된 이유 역시 돈이다.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에 올라와 취업한 그녀에게 2년간의 서울생활에서 남은 거라곤 카드빚뿐이었다.
50만원에 육박하는 원룸 월세와 식비, 화장품·의류비 등 돈 들어가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던 것. 여기에 카드빚을 쌓이게 한 원흉은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각종 ‘명품’이었다. B씨는 “서울에서, 그것도 강남에서 살려면 명품 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했는데 그에 맞는 옷차림과 화장품 등을 사다보니 카드빚이 주체할 수 없이 치솟았다”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이에 고소득 아르바이트를 찾아 나섰다. 처음엔 퇴근 후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을 찾아봤지만 카드빚을 갚기엔 어림도 없었다. 그때 유혹한 것이 바로 유흥업소였다. 화려한 외모와 날씬한 몸매를 가진 B씨에게 유흥업소 취업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술을 마셔야하는 것 외엔 심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더욱 B씨를 유혹했다.
결국 B씨는 한 룸살롱에서 6개월 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행여 직장상사나 동료들을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대한 직장과는 멀리 떨어진 업소를 택했다. 룸살롱에서 받는 월급은 직장에서 받는 월급의 3배에 가깝다고. 이 돈은 대부분 카드빚을 갚는데 쓰고 있다. 하지만 높은 보수에도 모이는 돈은 많지 않다고 한다.
B씨는 “외모를 가꾸는데 드는 비용이 워낙 많다보니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은 달도 있다”라며 “카드빚만 해결되면 정리하려고 했던 밤 생활이 점점 길어지는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라고 한숨을 쉬었다. 이들처럼 두 가지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는 투잡족이 증가하고 있다. 이는 한 조사결과 나타났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전국의 직장인 107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의 18.2%(195명)가 현재 주된 직업 외에 다른 부업을 하고 있다고 밝힌 것 직장인 5명 중 1명은 이른바 ‘투잡’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지난해에 비하면 2.7%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인크루트가 2009년 같은 조사를 실시했을 때 는 투잡족의 비율이 15.5%로 조사된 바 있다. 2008년에는 12.9%로 집계된 바 있어 투잡족의 비율은 2년간 5%포인트 넘게 꾸준히 증가해 온 것으로 나타났다. 투잡족 중 대부분은 현재 본업을 제외하고 1개(92.3%)의 부업을 하고 있었으나 2개(5.1%), 3개(2.6%)라는 응답도 있어 투잡족의 8.7%는 ‘멀티잡’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부업을 고르는 가장 큰 기준은 무엇일까. 1순위는 ‘시간대가 알맞은가’(39.5%)였다. 이어 ▲내가 할 수 있는 분야의 일인가(19.5%) ▲내가 예전부터 하고 싶어 하는 일인가(14.9%)처럼 적성이나 흥미를 고려한 기준도 있었다. 수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에 ‘돈은 많이 벌 수 있는가(11.8%)’도 중요한 기준이 됐고 그 외에 ▲부업 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다른 조건과 기준은 안 따진다(7.7%) ▲얼마나 힘든 일인가(2.6%) 등의 답변이 있었다.
부업을 통해 얻는 수입은 주된 직업의 11~20%(35.9%) 수준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고 ▲10% 미만(22.6%) ▲31~40%(11.8%) ▲41~50%( 10.3%) ▲51~60%(8.2%) ▲21~30%(6.7%)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100% 초과(1.5%)라고 답해 주된 직업보다 더 큰 수입원이 되는 부업을 가진 투잡족도 있었으며 다음으로는 ▲71~80%(1.0%) ▲81~9 0%(1.0%) ▲61~70%(0.5%) ▲91~100%(0.5%) 순이었다.
또 직장인들이 부업을 하는 이유로는 ‘물가가 올라 생활비가 부족해져서(31.8%)’라는 응답이 1순위에 올랐고 ‘수입이 줄어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서(17.4%)’가 뒤를 이어 경제적인 이유가 투잡의 주된 목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투잡족의 대열에는 고소득 전문직종으로 알려진 의사들도 가세하고 있다. 특히 개원을 위해 대출을 받는 등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의사들 사이에서 투잡이 성행하고 있다.
의사도 투잡족
의사포털 아임닥터가 자체 의사회원 4만5000여 명 가운데 개원의 823명을 대상으로 ‘전문직 의사들의 투잡족’에 대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체 응답자 중 39.7%가 ‘현재 자신의 병원을 운영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을 병행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투잡 전선에 뛰어든 이유에 대해 64.6%가 ‘개원할 때 받은 대출금에 대한 부담’을 가장 큰 이유로 꼽았으며 이어 ‘경기 불황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아이들 학비 감당’이 그 뒤를 이었다. 또 ‘의사로서의 본업 외에 부업을 할 의향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개원의의 51.2%가 ‘그렇다’고 대답해 10명 중 5명 정도는 투잡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 전문가는 “과거와는 달리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지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가고 있다”며 “투잡족이 되려는 이들은 수입 이외에도 4대 보험 가입 등 각종 처우나 법률적 관계를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