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재기 활동에 나섰다. 특별 사면된 지 열흘 만이다. 첫 공식 행선지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를 선택한 그의 행보는 파격적이었다. 포스트 이건희로 불리는 아들 뿐 아니라 딸과 사위, 부인까지 오너 가족이 총 출동했다.
이들은 세계 언론의 카메라 앞에서 두 손을 꼭 맞잡는 단란한 모습까지 연출했다. 이례적인 이 전 회장의 모습에 재계는 그의 속내를 분석하기에 바쁜 모습이다. 일각에선 이 전 회장이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는 동시에 그동안 제기됐던 가족 간의 불화설 등을 불식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겠느냐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 ‘CES 2010’ 참석…사면 후 첫 공식 활동 나서
장남 이재용 부사장 앞세우고 두 딸에 사위, 부인까지 삼성가 총출동
‘황제의 귀환’은 화려했다. 지난 9일, 이 전 회장이 자신의 애마로 알려진 마이바흐를 타고 CES 전시장에 나타나자마자 수백 명의 취재진이 그를 에워쌌다. 2008년 4월 경영은퇴 선언 이후 1년8개월 만의 나들이인 덕분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화제가 됐다.
‘황제의 귀환’
가족들 총출동
세계 취재진들의 스포트라이트 속에 등장한 이 전 회장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언론을 대했다. 사실 그는 언론 노출을 꺼리는 총수로 유명하다. 특히 비자금 사건 이후에는 공식석상에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취재진의 질문에도 최대한 말을 아끼며 신중을 기해왔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수많은 취재진들이 몰려 이동이 불편함에도 두 시간여 동안 행사장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폈다. 취재진들의 질문에도 적극적으로 응했다.
삼성그룹의 미래상과 일본 경쟁국에 대한 의견, 올림픽 유치 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골고루 표출했다. 한국 사회와 경제에 대한 훈수도 뒀다. 이례적인 모습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날 전시장 방문에 이 전 회장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함께한 것.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과 장남 이재용 부사장(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 등 자녀들과 김재열 제일모직 전무, 임우재 삼성전기 전무 등 사위까지 총출동했다.
삼성가의 온 가족이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이 전 회장을 호위하듯 자리를 함께한 그의 가족들은 단연 화제를 모았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인물은 이 전 회장의 양 옆을 나란히 지킨 두 딸들이다. 이날 이 전 회장은 취재진들에게 공개적으로 “두 딸들 광고 좀 하겠다”고 말하며 그들을 양 옆에 세웠다.
왼쪽에는 차녀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를 오른쪽엔 장녀 이부진 신라호텔 전무를 불렀다. 이 전 회장은 전시장을 둘러보는 내내 이들의 손을 꼭 잡은 채 이동해 언론의 관심을 이끌었다. 이 전 회장이 처음으로 두 딸을 언론 전면에 내세우며 ‘광고’하고 나선 것에 대해 재계에선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우선 본격적인 ‘3세 경영’에 나서고 있는 이부진 전무와 이서현 전무의 활동을 측면에서 돕겠다는 의도라는 것이 업계의 중론이다. 그동안 그룹 내 활동영역을 꾸준히 확대했던 삼성가 두 딸들은 지난해 승진 인사와 함께 경영 보폭을 더욱 넓히고 있다.
좌청룡 우백호 호위
가족 불화는 없다(?)
실제 이부진 전무는 호텔신라 전무로 승진한 데 이어 지난해 삼성그룹의 지주회사 격인 에버랜드의 경영전략 업무까지 담당하고 있다. 차녀 이서현 전무도 지난해 연말 인사를 통해 제일모직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한 데 이어 제일기획의 기획업무까지 겸임했다. 이와 함께 재계는 이 전 회장이 두 딸들을 전면에 내세워 힘을 실어 준 만큼 그동안 제기됐던 독자경영이 더욱 가속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지난해 이재용 부사장을 포함한 삼성 오너가 3세들을 모두 그룹 주요 계열사에 전진 배치하는 작업을 마무리한 삼성이 계열분리로 분가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해석인 것. 그러나 이 전 회장은 자식들의 경영 능력에 대한 취재진의 물음에 “아직 더 배워야 된다. 내가 손잡고 다녀야 할 만큼 아직 어린애다”라고 말해 독자경영을 위해선 경험이 좀 더 필요하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 전 회장이 두 딸을 챙기고 나선 것이 재계에 퍼졌던 가족 간의 불화설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동안 재계 일각에선 이부진 전무와 이서현 전무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이 퍼져왔다. 재계 3세들의 경영 보폭이 넓어지면서 자매인 두 전무의 능력이 늘 비교의 대상이 되어 온 탓에 은근히 견제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다는 후문이다.
경영 복귀 질문엔 ‘아직’
복귀 가능성 열어둔 포석
이 같은 소문은 최근 두 전무가 경영전면에 등장하면서 더욱 힘을 실어가고 있는 분위기다. 이에 이 전 회장이 두 딸을 직접 챙기며 가족 간의 불화설은 근거 없는 소문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퍼포먼스의 일종이라는 것이 일각의 관측인 것이다.
또한 두 딸을 내세운 것이 사실은 장남인 이재용 부사장을 보호하기 위한 이 전 회장의 배려였다는 해석도 있다. 이날 이 부사장은 이 전 회장을 쫓는 취재진들 때문에 아버지와 약간 거리를 두고 뒤를 따라야 했다.
이 부사장 역시 최근 최고운영책임자를 맡은 뒤 가진 이번 행사가 본격적인 신고식을 치르는 자리인 만큼 주목을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이날은 언론의 관심이 이 전 회장에게로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한 것. 이를 두고 일각에선 이 전 회장이 이 부사장에게 집중되는 언론의 관심을 딸들을 내세워 분산시켰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재계는 이 전 회장의 이번 전시장 방문이 그의 건재함을 대내외에 알리는 동시에 경영복귀에 대한 포문을 여는 자리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사면 후 첫 공식 활동에 온 가족을 동반한 그의 모습은 그룹의 최대주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음을 각계에 알리는 데 충분했다. 뿐만 아니다. 전시회장을 찾은 이 전 회장은 삼성전자뿐만 아니라 일본 등 세계 주요 전자업체들의 전시관을 직접 찾아 제품을 살피는 열의를 보였다.
이 전 회장은 자신을 수행한 최지성 삼성전자 CEO와 윤부근 사장 등으로부터 제품 설명을 들은 뒤 제품별로 개선할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경영 전면에서 물러났음에도 여전한 입김을 자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장면이었다. 이 전 회장은 이날 스스로 경영복귀에 대한 포석도 깔았다. 경영복귀 시점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아직 멀었다”고 답한 것. 재계는 여운을 남긴 이 전 회장의 대답을 두고 경영복귀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했다.
온 가족 대동한 이례적 공식 행보…이 전 회장 파워 건재 과시
이부진-이서현 자매 맞잡은 두 손에 후계 구도 밑그림 마무리
사실 애초 이 전 회장의 경영복귀는 사면이 결정된 순간부터 재계에서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던 부분이다. 다만 그 시점에 대한 예측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최초의 재계인사 단독사면이라는 정부의 결정에 대한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은 시점에서 섣부른 복귀는 여론의 불만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이에 이 전 회장의 경영복귀는 차후 시간을 두고 진행될 것이라는 관측이 대세였다.
하지만 일각에선 이 전 회장의 경영복귀가 생각보다 조기에 이뤄질 것이라는 예측도 내놨다. 이 같은 예측은 최근 이 전 회장이 전시장에서 직접적으로 경영복귀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 만큼 더욱 힘을 받는 분위기다. 특히 삼성의 고위 관계자들이 공개적으로 이 전 회장의 복귀를 바란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는 점도 이 전 회장의 조기 복귀에 힘을 싣고 있다.
실제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은 이날 전시장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 전 회장이 우선은 올림픽 유치에 주력하겠지만 앞으로 저희가 모시고 일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며 “사면복권에도 그런 기대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또한 이재용 부사장 체제가 안착되기 전까지 이 전 회장이 좀 더 경영일선에서 후계자를 이끌어 줄 필요가 있다는 일각의 지적도 그의 조기 복귀설을 부추기는 요인 중 하나다.
한편 이 전 회장은 사면 조치에 따른 보은의 하나인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적극적인 활동도 시작했다. 그는 전시회가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전직 IOC 위원들을 초청해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등 개최지 선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인사들을 설득하기에 나섰다. 또 열흘간의 이번 일정을 마친 후 국내에 돌아왔다가 다시 해외로 출국해 2주간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홍보 활동을 지속한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