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나타난 여간첩, 국면전환용 미끼?
지난달 27일, 국군기무사령부, 국정원 경기지부 및 수원지방검찰청과 경기지방경찰청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는 놀랄 만한 소식을 전했다. 10년 만에 남파 여간첩이 붙잡혔다는 것.
탈북자를 가장해 남한으로 들어와 수년 동안 군 관계자들로부터 정보를 캐내 북으로 넘겨줬다는 원정화라는 여성에 대한 발표는 순식간에 핫이슈로 떠올랐다. 더군다나 자신의 미모와 성(性)을 이용해 남성들을 유혹하고 목적을 달성했다는 수사당국의 발표는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자극적인 소재였다.
그런데 떠들썩한 분위기가 가라앉기 무섭게 원정화 사건과 관련한 각종 의혹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수사당국의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나 많았던 것.
그 중 한 가지 의혹은 원정화가 간첩이라는 것을 입증할 객관적 증거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수사당국은 4년에 걸쳐 원정화에 대한 내사를 진행해 간첩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경찰과 기무사에 따르면 2005년 9월 탈북여성인 원정화가 대북무역을 하면서 군 장교들과 교제를 하는 점을 수상하게 여겨 3년간 원정화에 대한 내사를 진행했고 지난 7월15일 군인 인적사항 탐지 및 군안보강연시 찬양·고무 등의 혐의로 원정화를 체포했다.
그런데 구속 직전 원정화가 수원지검의 조사를 받으며 자신이 북한 보위부의 남파 지령을 받고 침투한 간첩이라고 자백하면서 수사 범위가 넓어졌다. 이 자백으로 원정화가 단순한 간첩이 아니라 위장탈북한 남파간첩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공안당국은 수원지검, 경기경찰청, 기무사, 국정원 경기지부 등이 참여하는 합동수사본부를 만들었다는 발표를 했다.
결국 원정화의 자백에 의존해 간첩사건으로 단정 지었다는 것. 3년간 원정화의 행적을 쫓은 끝에 나온 결론이라기엔 증거가 허술하다는 점이 많은 이들의 의혹을 사고 있다.
원정화가 했다는 진술에도 의문점은 한둘이 아니다. 원정화는 5톤의 아연을 훔치려다가 적발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이에 합동단속반에 체포됐지만 5촌 아저씨의 도움으로 풀려났다고도 밝혔다.
그런데 사형에 해당하는 큰 죄를 저지른데다 이전에도 두 건의 절도혐의를 가지고 있었던 원정화가 5촌 아저씨의 도움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
절도 등의 범죄행위를 저질러 당국의 조사를 받은 사람을 공작원으로 양성했다는 것도 현실과는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북한에서 공작원을 뽑을 때는 가정성분을 중요시 여겨 세밀한 조사를 하는데 절도범을 공작원으로 내려 보낸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것.
원정화가 말한 자신의 북한에서의 경력도 개운치 않은 부분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원정화가 북한에서 사로청 서기로 근무했다는 경력이다. 공소장에 따르면 원정화는 1989년 6월경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최룡해 당시 위원장에게 발탁돼 사로청 조직부에서 서기로 근무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중앙위 조직부에는 지금이나 과거 사로청으로 불릴 때나 서기라는 직제가 없고, 더욱이 중앙위는 지방에서 선발된 중학교(중·고교과정) 졸업생이 시간제로 근무하거나 파견 근무하는 곳이 아니란 점이 드러난 것.
결정적 증거 없이 원정화의 자백만으로 결론 낸 것에 의혹
범불교도대회 열린 날 수사 발표한 당국에 곱지 않은 시선
원정화가 북한 내 조직에서 중요한 활동을 해왔다는 경력도 부풀려졌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원씨는 평양 모란봉구역에서 공작원 특수훈련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란봉구역 등의 평양도심에는 특수훈련을 하는 곳이 없다는 것이 탈북자나 북한전문가들의 전언이다.
일각에서는 원정화 관련 발표를 한 시기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원정화 수사결과를 발표한 지난달 27일은 정부의 종교편향에 반발하는 불교계의 ‘범불교도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이를 두고 정부가 불교계로 쏠린 국민들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한 물타기용으로 원정화 사건 발표를 강행했다는 것.
불교닷컴에 따르면 수사당국이 이 사건을 오래 전부터 조사해 온 것을 복수의 정보기관원으로부터 전달받았고 지난달 20일 불교방송에서 원정화 사건을 보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음날인 21일 새벽 사건을 담당한 수원지검의 모 검사가 엠바고(보도유예) 사안이라며 28일 언론에 알릴 계획이라고 밝혔다는 것.
그러나 문화일보가 이를 27일 전격적으로 보도했고 곧이어 검찰은 연합뉴스를 비롯한 통신사 일간지 방송사 등을 불러 기자회견을 자청, 사건의 전모를 공개했다. 이 같은 점을 미뤄 범불교도대회 물타기용으로 원정화 사건을 이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
이처럼 각종 의혹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대변인은 지난 3일 담화를 통해 탈북위장 여간첩 원정화 사건에 대해 “자료를 가공한 완전한 모략극”이라고 주장했다.
대변인은 “지난 시기에도 남조선에서 수많은 ‘간첩사건’들이 조작돼 물의를 일으켰지만 이번처럼 치졸한 ‘간첩사건’이 날조되기는 처음”이라며 이명박 정부를 지칭, “보수세력을 결속하고 진보세력을 탄압하며 북남관계 악화의 책임을 회피하고 동족대결 정책을 추구하기 위한 데 그 속심(속셈)이 있다”고 비난했다.
대변인은 이어 “여간첩까지 조작해 우리 체제를 거들며 반공화국 모략 소동을 벌이는데 대해 우리는 절대로 간과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민족적 범죄행위를 철저히 계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여간첩 원정화 사건은 각종 파장과 미스터리를 낳고 있다. 정치적 희생양과 희대의 성로비 간첩이라는 주장 사이에서 진실이 무엇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방부, 반입 출판물ㆍ교육자료 사전검증 강화
부대 보안수준과 개인 보안의식 높일 것
국방부는 지난 4일, 원정화 사건에 대한 후속대책으로 군에 반입되는 출판물과 교육자료에 대한 사전 검증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방부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국방위 업무보고 자료를 통해 “앞으로 군에 반입되는 출판물과 교육자료에 대한 사전검증, 군 출입 외부인원의 부대출입 규정 준수 및 철저한 신원 확인 등 부대 보안수준과 개인 보안의식을 높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국방부는 장병 인터넷 이메일과 군 기관의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 대한 북한의 해킹위협 대비 활동을 강화하고 신병교육대와 사관학교 등 간부양성기관에 대해 북한의 대군(對軍) 공작전술 및 대남적화전략 본질 등을 교육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또 “탈북자와 귀순자에 대한 합동신문을 강화해 위장 침투자를 조기에 색출하는 한편 탈북·귀순자를 안보강연 강사로 활용할 경우 사전내용을 검증하고 북한 찬양 등 특이 언행 때 이를 시정토록 하겠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