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세청 비호 ‘전두환표 유령단체’수십억씩 현찰 동냥
정부와 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나아가 대통령과 총수는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함수관계다. 그동안 기업은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어떤 배에 타느냐에 따라 순항과 표류를 반복해 왔다. 유독 거침없이 승승장구한 신흥 재벌이 있는가 하면 하루아침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비운의 총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공식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요시사>는 ‘대우 제국’의 마지막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 ㈜대우M&A 사장이 박정희 정권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정·재계 실세들과 부대끼면서 겪은 ‘한국재계 30년 비사’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간 애증관계를 연재하기로 했다.
“당장 현찰로 가져와!”
거액 기부금 요청 쇄도
첫째, 대우에서의 실사 리포트를 보면 이를 정상화시키는데 추가로 소요되는 비용을 당시의 약 5천억원으로 계산했다. 이 전액을 조달하기로 한 정부가 자신감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그 반대로 현대에게는 대우자동차를 넘겨야 하는데, 대우자동차의 지분 50%를 갖고 있던 미국 GM의 동의가 어려웠을 가능성도 있다. 셋째, 재계를 좌지우지하기 위한 길들이기 차원이라는 분석과 넷째, 대우자동차의 빅딜을 알고 있는 미국 측에서 “자본시장원리에 어긋난다”는 강력한 항의를 전달했을 수도 있다.
당시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당위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미국 정부의 비위를 맞출 필요가 있는 정부로서는 넷째의 경우가 가장 신빙성이 있다. 또 추후 재계로부터 막대한 기부금을 각출했던 것을 봤을 때는 셋째의 경우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한국중공업은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 완전히 정부의 산하기업으로 편입됐고, 정부의 인사들이 속속 CEO로 부임하기 시작했다. 대우그룹에서 투입됐던 2백억원은 향후 5년에 걸쳐 회수되는 전제였지만, 사실상 어려웠던 한국중공업의 자금사정으로 30%정도는 회수가 되지 않아 대우그룹의 손실로 남았다. 무책임한 권력자의 한마디가 재계에 손실을 끼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이때 10대 그룹기획조정실 경영관리 실무자로부터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일해재단, 새마음 재단 등 정체가 불분명한 공익법인으로부터 거액의 기부금 요청이 쇄도했고, 혹시 대우그룹에서도 전화가 없었는지의 여부를 묻는 전화였다. 아직까지 대우그룹에 기부금 요청 전화는 없었다. 필자는 격동기에 권력층을 빙자하는 사기꾼의 협잡이라 생각했다. 아니다 다를까 그 즈음 담당이사로부터 지시가 떨어졌다.
“빨리 50억원을 들고 이 명함에 쓰여 있는 데로 가서 전달해!”
“50억원을 어떻게 해서요?”
“무조건 현금이야 빨리 오늘 중으로!”
필자는 부랴부랴 돈을 현금으로 준비해서 명함을 살펴봤다. 일해재단 사무국장 김모씨라 쓰여 있었다. 다른 그룹에서 수소문했던 정체불명의 공익법인 이름과 같았다. 주소지는 세검정 부분이라 적혀 있었다.
차를 몰고 주소지를 찾아 가니 이건 사무실이 아니라 조그만 사택의 별실이었다. 들어가니 군인인 듯한 사복차림의 사람이 명함을 주며 “돈을 건네 달라”고 했다. 명함은 바로 상사로부터 받은 명함과 동일했지만, 정체불명의 단체에게 돈을 그냥 넘긴다는 것이 뭔가 투명치 않았다.
“영수증을 주십시오.”
필자는 사무적으로 얘기했다.
“뭐 영수증? 여보시요, 여기가 어딘 줄 아시요. 바로 각하의 친위단체요. 없어도 아무 문제없으니 그냥 가시오!”
“아니 아무리 각하라 하더라도 영수증 없이는 기업의 회계처리가 되지 않을 뿐더러 세무상으로도 비용인정이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영수증도 필요하고 이 영수증도 세법상 비용인정이 되는 단체의 영수증이 필요합니다. 아직 일해재단이라는 단체가 세법상 비용인정이 되는 단체로 등록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불가합니다.”
“당신 뭐야? 도대체. 잠깐만 기다려!”
화난 듯한 그 사람은 주 사무실로 들어가 누구와 통화하는 듯하더니 나오면서 필자에게 강압적으로 얘기했다.
“당신 총수한테 지금 전화해봐!”
필자는 김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아무 소리 말고 건네주라”는 지시가 나왔다. 영수증을 받으라는 별도의 말도 없었다. 필자는 로봇같이 부대자루에 담아온 현금을 건네주고 다시 한 번 영수증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짜증나는 듯이 마지못해 자기의 명함 뒤에 볼펜으로 끄적거리며 자신의 사인을 하고는 필자에게 건넸다. 사무실로 돌아온 필자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실감하며 하여튼 명함상의 일해재단이라는 공익법인의 세법상 등록여부를 체크했지만 국세청으로부터 “비등록단체인 바 손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금 수령 영수증 좀…”
명함 뒤 볼펜으로 끄적
이는 기업에게 치명적 손상이었다. 비용으로 50억원을 지출해놓고 비용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익금산입돼 추가로 20억원의 세금을 내야 하는 바 결국 기업은 70억원의 손실부담을 안는 것이다.
어떻하든지 이 일해재단을 세무상 인정받는 단체로 등록해야 했다. 즉시 명함 속에 있는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기업의 불가피한 사정을 얘기하고 선처를 부탁했다. 처음에는 귀찮다는 듯이 뚱한 표정을 짓더니 “청와대의 최고권력이 이 정도도 못해 줍니까? 말 한마디로 거금을 각출하는 파워로 그까짓 국세청에 등록도 못해 쩔쩔 맵니까. 기업에 엄청난 손실을 막아주셔야 다음번에도 무리 없이 각출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처음 영수증 해결 못하면 다음번에 줄줄이 이어지는 기부금 각출은 아마 많은 부작용을 일으켜 오히려 각하의 얼굴을 먹칠할 수도 있습니다” 는 필자의 말에 “알았소” 라는 짧은 대답이 튀어나왔다.
일해재단의 힘은 대단했다. 3일 만에 국세청에서 공문이 떨어졌는데 일해재단을 손비로 인정받을 수 있는 단체로 등록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이 등록은 무분별한 사이비단체로의 기부를 통제하고자 한 것으로 웬만한 ‘빽’갖고는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최고 권력의 기부금 행렬은 권력의 과시 및 이권쟁취, 그 권력에 대한 아부가 어울려 전두환 정부의 말기까지 아무 탈 없이 이어져 갈 수 있었다.
권력에 대한 기부금은 “당연하다”는 인식이 재벌총수나 임직원들에 팽배해 있었다. 오히려 앞장서서 기부금을 다른 그룹보다 좀 더 많게 내려는 심보가 있어 기부금의 요청이 있을 때는 항상 가장 효율적인 기부금액 결정을 고민하곤 했다.
가장 효율적인 기부금액 결정이라 함은 가장 적은 기부금으로, 다른 그룹보다는 가장 근소한 차이의 많은 금액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결정하기 위해 필자는 다른 그룹 기획조정실 직원들과 정보라인을 만들어 놓고 서로의 정보탐색을 했던 지긋지긋한 전쟁을 치르곤 했다.
대통령의 영부인은 물론 친척이 운영하는 공익법인에 수백억원의 기부금이 흘러들어 갔다. 재계 전체로 따진다면 아마 네 자리 숫자까지 올라가지 않았나 싶다. 연말 세무조사시에는 더 가관이었다. 가장 잘 따지고 쉽게 세금을 추징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부금사항이다. 그래서 국세청에서 제일 먼저 손대는 것이 바로 이 기부금항목이다. 비용 인정되지 않는 비등록 공익법인 영수증은 칼날같이 손실부인했다.
대통령 친인척 법인에
천문학적 뒷돈 흘러가
사실 경영자들은 공익법인인 경우는 무조건 비용인정 받는 것으로 잘 못 알고 있어 무심결에 기부해놓고는 세금을 덮어 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설령 비용인정 받는 공익법인이라 할지라도 한도가 있다. 즉 매출액 혹은 소득금액의 일정 퍼센트만 비용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초과될 경우 기 부분은 비용인정이 되지 않았다. 사외유출하는 기부금에 2중 3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무분별한 기부행위를 막아 놓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통령과 관련된 공익법인은 무한도기부금으로 설정해 이 2중 3중의 안전장치를 풀어놓았다. 세무조사시 일해재단, 새마음재단 등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눈에 띄게 무소불위의 힘을 보여 주는 쇼를 하는 것 같았다. 재계에 가장 두려운 적은 검찰도 아니요, 경찰도 아니요, 재경부, 상공부도 아닌 바로 국세청이었다. 국세청에 잘못 보인 경우 재계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검·경의 경우 위법사항이 없으면 되었고, 재경부·상공부도 징계할 수단이 없었다.
하지만 국세청은 아무 잘못이 없어도 아무 위법사항이 없어도 세무조사를 집행할 수 있다. 일단 조사를 하면 ‘옷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무조건 세금추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기업회계와 세무회계가 달라 세무근거의 회계를 하면 무조건 익금산입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세무조사는 세금추징을 목표로 하니 추징금액의 많고 적음은 있을 수 있지만 그 화를 피할 수가 없었다.
전두환 정부는 이 국세청의 힘을 자유자재로 이용하여 재계가 스스로 끌려오게끔 했다. 이러니 권력의 막강함이 자연스럽게 재계의 머릿속에 각인되고 전두환 정권 5년 동안의 최고 권력층은 재계로부터 엄청난 기부금을 끌어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