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서 살고 싶었다.”
보험금을 노리고 어머니와 누나를 살해한 10대 소년의 말이다. 3억원의 보험금이 탐났던 소년은 후배와 공모해 집에 불을 지르고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가족들이 불에 타고 있던 시각, 범인은 여자친구와 여행을 가 초기 수사선상에서 벗어났다. 범행이 일어났던 시간에 집에 없었다는 알리바이를 꾸미기 위해 여행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는 치밀함도 보였다. 10대의 범죄라기엔 너무나 끔찍한 이 사건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패륜범죄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보험금에 눈 멀어 엄마와 누나 살해한 10대
후배에 방화 지시 후 알리바이 위해 1박 여행
지난 10월10일 오전 4시 46분,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한 다세대주택 반지하층에 불이 났다. 불길은 순식간에 번졌고 반지하에 있는 방을 태우기 시작했다. 긴급 출동한 소방대가 화재를 진압했지만 이미 반지하층을 모두 태운 뒤였다.
이 불로 방에서 잠을 자던 모녀가 변을 당했다. 어머니 김모(49)씨와 딸(19)은 미처 집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전신에 고도화상을 입었다. 인근 병원으로 급히 옮겨진 모녀는 결국 숨을 거뒀다. 어머니는 3일 후 숨졌고 딸은 이튿날 뒤를 따랐다. 아버지 장모(51)씨와 17살 아들 장군은 집을 비워 화를 면했다.
보험금에 눈이 어두워
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누군가가 일부러 불을 저질렀다는 정황을 포착했다. 현관 출입구와 거실에서 휘발유가 검출됐고 20m가량 떨어진 길가에 타다 남은 오리털 점퍼와 트레이닝 바지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의선상에 올릴 만한 이들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모녀와 원한관계가 있는 인물도, 용의자를 가려낼 증거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사건 당일 마침 집을 비웠던 아버지 장씨와 아들만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다. 장씨는 화재가 벌어졌던 날 수원에서 외박을 한 사실이 밝혀졌다. 아들 장군 역시 여자 친구와 함께 강원도 평창으로 여행을 떠나 1박을 해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 장군은 “인터넷 미니홈피에 여행 사진을 올렸다”고 진술하며 결백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자칫하면 미궁 속으로 빠져들 뻔했던 이 사건은 발생 한 달여 만에 전모가 밝혀졌다. 불이 난 집에서 15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방범용 CCTV가 범인의 모습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각, CCTV 화면에는 속옷 차림으로 도망치는 10대 소년의 모습이 녹화됐다. 경찰 조사결과 지난달 15일 구속돼 수감 중이던 김모(15)군이 그 주인공이었다.
경찰의 추궁 끝에 김군은 지난 9일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방화를 저지른 것은 김군이었고 이를 의뢰한 사람은 놀랍게도 숨진 김씨의 아들 장군이었다. 서울 중랑경찰서는 김군에게 방화를 지시한 혐의로 장군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장군은 지난달 5일 김군에게 “나의 가족들을 살해해 주면 보험금의 일부를 주겠다”며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돈 욕심이 났던 김군은 이 제안을 수락했고 살해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먼저 장군은 현관 우유주머니에 집 열쇠를 넣은 뒤 김군에게 열쇠의 위치를 알려줬다. 또 김군에게 “만일 아버지가 살아서 집밖으로 나오려고 하면 흉기로 찔러 살해하라”는 부탁까지 했다.
두 소년이 범행날짜로 선택한 것은 지난달 10일. 하루 전인 9일에 장군은 여자친구와 여행을 떠나 사건 현장에서 멀어졌다.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모든 지시를 받은 김군은 사건 당일 오전 4시, 휘발유를 채운 플라스틱 통을 자전거에 싣고 장군의 집으로 향했다. 계획대로 열쇠를 꺼내 문을 연 김군은 망설임 없이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치솟은 불길로 인해 불이 붙은 옷은 사건 현장에 벗어두고 도망쳤다.
결국 집을 비웠던 아버지를 제외한 두 명의 가족이 목숨을 잃었고 장군은 알리바이를 위해 여행 사진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것으로 범행을 완성했다. 완전범죄를 저질렀다고 자신했던 두 소년. 그러나 이들의 바람은 산산조각이 났고 결국 철창신세를 면치 못하게 됐다.
충격적인 10대 청소년의 행각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범행동기였다. 장군은 경찰에서 “보험금을 타서 강남에서 살고 싶었다”며 태연히 살해동기를 진술했다. 경찰에 따르면 부모님이 생명보험과 화재보험 등에 가입한 것을 알게 된 장군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범행을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범행으로 장군은 전과 10범이란 꼬리표를 달게 됐다. 단거리 육상선수를 꿈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사고로 운동을 그만뒀던 장군은 학교와 멀어졌다. 이때부터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며 물건을 훔치는 등 범죄의 세계에 빠졌던 장군은 전과 9범이 됐던 것. 가족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서에 온 뒤에도 장군은 반성의 기미조차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10대 소년의 패륜행각이 드러나면서 친족을 대상으로 한 패륜범죄의 위험성이 또다시 부상했다. 패륜범죄는 해마다 늘어 지난해에는 하루 평균 72건이 발생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친족대상 범죄는 2만6118건이 발생했다. 이 중 폭력범죄가 76%를 차지했고 살인사건도 228건이나 벌어졌다. 올해 8월까지만 해도 1만6701건의 친족범죄가 벌어졌고 이 중 살인사건은 171건에 달해 충격을 주고 있다.
가족도 범행대상
전문가들은 패륜범죄가 늘어나는 원인 중 하나로 가족의 해체를 꼽고 있다. 핵가족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가족구성원 간 대화가 단절되고 가족 간의 연대의식이 상실되면서 목적 달성에 가족을 이용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것. 또 부모를 상대로 한 범죄의 경우 1차적으로 자녀 양육 과정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문제 있는 자녀에겐 문제 있는 부모가 있다는 것. 경제난도 패륜범죄의 증가를 부른다는 분석이다. 특히 최근 벌어진 패륜범죄가 대부분 돈을 노렸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