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백수들의 하루살이 비법

백수는 폐인? 편견은 버려!

백수 100만 시대다. 최근에 일자리를 잃고 방황하는 초보 백수부터 백수생활이 몸에 밸 대로 밴 베테랑 백수까지 그 유형도 가지가지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하얀 손’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은 오늘 하루도 어떻게 돈 안들이고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빠져 있다. 부르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다는 것이 모토인 활동적인 백수, 돈 안 들고 마음편한 집이 최고라는 은둔형 백수 등 나름대로 틀을 갖추고 생활하는 이 시대의 백수들. 그들을 만나 백수생활의 노하우와 고충에 대해 들었다.

실업자 100만 시대 들면서 백수들 생활 노하우도 늘어나
돈 안 들이고 외식, 몸만들기에 피부관리까지 하며 백수생활

대학 졸업 후 2년여 간 직장생활을 하다 1년 전부터 백수생활을 하고 있는 이모(30)씨. 그는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을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듣는 실업자 신세지만 나름대로 백수의 삶을 즐기고 있다. 처음 직장을 뛰쳐나올 땐 ‘설마 갈 곳 없을까’라는 자신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년이 지난 후에는 ‘정말 갈 곳이 없구나’란 것을 절감했고 쉬는 기간을 재충전과 도약의 기회로 삼고 있다.

때문에 이씨의 백수생활은 나름대로 원칙과 체계가 있다. 밤새 PC방에서 게임을 하다 컵라면으로 요기하고 집에 들어와 잠을 자는 전형적인 백수의 생활은 그와는 거리가 멀다. 아침에 눈을 떠도 특별히 갈 곳 없는 이씨지만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을 자는 나태한 생활은 하지 않는다. 함께 사는 부모님의 눈치가 보일뿐더러 무계획적인 삶이 몸에 밸 것이 두렵기 때문이란다.

쿠폰은 백수생활 필수품
발품 팔면 ‘화려한 백수’

식사도 규칙적으로 한다. 요리가 취미인 이씨는 적은 돈으로도 그럴싸한 밥상을 차리는 방법을 터득해 가족들에게 대접을 하며 점수를 딴다. 외식할 때도 최소한의 비용을 들인다. 백수시절 초기엔 집 근처 대형 할인마트에 시식코너에서 한 끼 식사를 때우곤 했지만 지금은 되도록 쓰지 않는 방법이다. 대신 틈틈이 인터넷을 뒤져 무료식사쿠폰이나 할인쿠폰을 모아 두고 외식을 하고 싶을 때 요긴하게 쓰고 있다. 운이 좋으면 값비싼 뷔페 이용권이나 패밀리레스토랑 쿠폰을 찾을 수 있어 이와 관련된 사이트는 늘 그의 레이더망 안에 있다.

또 하나 이씨가 자주 찾는 외식장소는 각종 이벤트를 여는 식당이다. ‘20분 안에 다 먹으면 공짜’라는 조건이 붙은 식당 등 노력을 기울이면 돈이 없어도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그가 노리는 음식점이다. 건강관리에도 부쩍 신경을 쓴다. 실직 초기, 힘든 시간을 견디기 위해 늘여갔던 술과 담배로 순식간에 건강이 악화된 경험이 있었던 이씨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최대한 몸에 나쁜 것들은 피하고 있다.

발품 팔아 각종 이벤트 참여하고 품평회 참석 제품까지 얻어
많은 백수들 방안서 취업사이트 뒤지며 폐인생활 하기도


대신 집 근처 동사무소에서 운영하는 헬스장에 꾸준히 다니며 체력을 키우고 몸매를 다듬는다. 한 달 동안 헬스장을 이용하는 데 드는 돈은 단돈 1만원. 사설헬스장에 비하면 매우 저렴한 가격이다. 취업을 위해서도 꾸준히 몸매관리를 한다. 외모관리는 취업에도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이씨는 “취업시장에서 내 경쟁상대 가운데는 파릇파릇한 20대도 많은데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고 토로했다.

틈틈이 문화생활도 즐긴다.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것을 즐기는 이씨는 영화표도 제 돈 내고 사지 않는다. 각종 업체에서 하는 경품 응모행사에 참가하는 등 공짜로 영화표 정도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많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도 하루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집 근처 구립도서관이 이씨의 단골 아지트. 이곳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신상 도서를 읽고 취업공부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은 0원. 밥값도 비교적 싼 편이라 식사해결까지 원스톱으로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단다.

여자친구와의 데이트 장소로도 도서관은 요긴하게 쓰인다. 여자친구 역시 자신과 같은 취업준비생이기 때문에 나란히 앉아 데이트 같은 공부를 할 수 있어 일석이조라는 것. 이처럼 알차게 시간을 활용하는 이씨지만 두려운 시간은 언제나 그를 찾는다. 그중 하나는 목돈이 드는 일이 생길 때다. 결혼적령기인 이씨는 한 달에도 몇 번씩 친구들의 결혼청첩장이 날아든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를 조여 오는 것은 축의금에 대한 부담감. 3~5만원 정도의 적은 돈이지만 그 돈이 모였을 때는 목돈이다.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을 준비하는 등 소소한 것에 드는 돈도 무시하지 못해 친한 친구의 결혼식에도 불참하는 불상사를 겪기도 했단다. 이씨는 “인간구실도 못하면서 몇 만원 아껴 뭐하냐는 생각도 들지만 날이 갈수록 비어가는 통장잔고를 보면 배부른 생각일 뿐”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힘든 시기를 보내는 것은 이른바 ‘백조’로 불리는 여성 실직자들도 마찬가지다. 직장을 잃은 지 2년이 되어 간다는 최모(28·여)씨도 그중 하나다.

전문대를 졸업한 뒤 작은 회사에 입사한 최씨는 3년 전 직장을 나와야 했다. 해고를 당한 것은 아니었지만 회사사정상 퇴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직장에서 나온 최씨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으로 여성복 인터넷쇼핑몰을 차렸다. 그러나 경험 부족과 홍보 부족 등으로 그마저도 접어야 했다. 이후 보험회사 영업사원에 도전했지만 인맥도, 경험도 없던 그녀에게 영업이 쉬운 일은 아니었고 결국 백조의 길을 걷게 됐다고 한다.

공짜로 피부관리까지
자기관리도 부지런히

2년여 간 백수생활을 하면서 얻은 노하우도 적지 않다. 특히 여자인 최씨에게 많은 돈이 들어가는 부분은 치장하고 꾸미는 데 드는 돈이라고. 돈이 없다고 해서 자신을 꾸미는 일을 멈추기에는 너무 젊은 그녀는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해 최소한의 돈으로 자기관리를 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무료마사지 이벤트 등을 찾아다니며 공짜로 혹은 아주 적은 비용으로 피부 관리 등을 받는 것이다. 물론 발품을 팔아 틈새정보를 찾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필수다. 동사무소나 구민회관 등에서 하는 피부마사지 강의 등에도 찾아다니며 저렴하게 피부 관리를 하는 비법을 배우기도 한다.

몸매 관리도 부지런히 한다. 헬스클럽 등에 다니는 대신 몇십원에서 몇 백원이면 컴퓨터에 다운 받을 수 있는 체조나 요가 등의 비디오를 보며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실직자들이 모이는 인터넷카페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산행을 해 체력을 키우기도 한다. 이 모임은 사람들을 만나는 장이 될 뿐만 아니라 각종 취업 정보를 알 수 있게 해 줘 자주 참석하게 된다고 한다.

백수들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간 죽이기다. 비용을 들이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노하우를 쌓는 것도 내공이 필요하다. 최씨가 시간을 죽이는 방법으로 택한 것 중 하나는 서울 시내 곳곳을 탐방하는 일. 지하철요금만 있으면 구경할 수 있는 곳들이 그녀가 자주 찾는 곳이다. 박물관, 고궁 등 문화재가 있는 곳들과 삼청동, 인사동 등 볼거리가 많은 장소가 그곳이다. 동네 책방 주인들과 친목을 도모해 둔 것도 시간을 보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하루일과는 이력서 쓰기
장판신세 백수도 수두룩

최씨는 “가끔 주인들이 가게를 비울 때 자리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그럴 땐 용돈도 벌고 책도 마음껏 볼 수도 있어 일석이조”라고 귀띔했다.
용돈벌이를 하는 방법은 또 있다. 각종 기업들이 하는 소비자 품평회에 참석해 소정의 돈도 받고 제품도 받는 것이 그중 하나. 최씨가 자주 참석하는 것은 화장품 품평회라고 한다. 새로 나온 화장품을 누구보다 먼저 써 보는 재미가 있는데다 제품까지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모든 백수들이 이씨나 최씨처럼 알찬 생활을 보내고 있지는 않다. 많은 이들은 방안에 갇혀 인터넷 취업사이트를 수백 번씩 들락거리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약 6개월 전 실직하고 실업급여로 살아가고 있는 김모(29)씨도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씨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은 컴퓨터 앞. 일어나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가장 먼저 접속하는 곳은 취업사이트다. 김씨는 새로 등록된 회사에 입사원서를 내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고 한다.


자기소개서에 등장하는 업체 이름만 바꾸면 이력서 작성은 완성되고 그렇게 작성된 볼품없는 이력서는 수많은 인사담당자들에게 보여지고 또 버려지게 되는 것. 그러나 면접을 보러오라는 회사는 100군데에 1~2군데뿐이라고. 그마저도 악덕기업으로 소문나 구직자들이 기피하는 회사나 다단계업체가 전부다. 김씨는 “아무런 희망이나 기대도 없이 습관적으로 입사원서를 내고 혹시 올지 모를 전화를 기다리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라며 “나태한 생활이 몸에 굳어지기 전에 일자리를 찾아야하는데 지금으로서는 막막하기만 하다”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3년간 직장을 구하지 못하다가 몇 달 전 고향집으로 내려간 정모(27·여)씨도 즐겁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백수생활을 보내고 있다.
서울에 머무르며 취업준비를 계속 하고 싶었지만 고향에 있는 부모님에게 차마 손을 벌릴 수 없었다고 한다. 게다가 졸업 후 긴 공백 기간은 취업에 대한 자신감을 점점 줄어들게 만들었다.

어쩌다 면접을 보게 되면 면접관들이 가장 먼저 묻는 질문은 “졸업한 뒤 몇 년 동안 뭐했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시간들을 포장하기엔 너무 공백 기간이 길어 취업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정씨는 “취업을 못해 백수가 됐는데 백수로 지낸 시간들이 또다시 취업의 발목을 잡게 됐으니 암담하다”며 “복잡한 출근길 지하철을 타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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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뚝심인가, 고집인가?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대통령의 뜻이 확고해도 너무 확고하다. 겉으로는 유연한 대처를 언급하면서 ‘2000명’이라는 수치는 굽히지 않을 기세다. 강 대 강 대치에 나섰던 의료계는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다. 의료계 내부의 의견을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일요시사>와 인터뷰한 지방의대 A 교수는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윤석열정부의 강경 기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정규군은 수뇌부만 처리하면 와해되기 쉽다. 하지만 현재 의료계는 게릴라 방식으로 대응 중이다. 주동자를 찾기 어렵고 실제 주동자도 없다. 전공의, 의대생 모두 조직의 통제하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윤정부 입장에서는 협상 대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괄 협상에 따른 일괄 타결은 어렵다고 본다.” 2월 이후 평행선만 실제 의료계는 대학의사협회(의협),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 등 여러 단체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반대’를 큰 틀로 하되 대응 방식이나 세부적인 요구사항은 각각 다른 상황이다. A 교수의 말대로 의료계는 현재 단일협의체가 없다. 협상테이블이 마련된다 해도 앞에 대표로 나설 사람이 없는 셈이다. 과거 의정갈등이 일어났을 때 주로 의협이 나서서 의료계 입장을 전달하고 대응을 이끌었다면 현재는 각개전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의협의 대표성에 대해 의문을 표한 상태다. 정부는 지난 2월 말 의협 대신 ‘대표성을 갖춘 협의체’를 구성해 의대 정원 확대 등에 대해 대화하자고 의료계에 요청했다. 의협이 전체 의사들의 대표성을 띠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당시 주수호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언론홍보위원장은 “의협 회원엔 전공의·봉직의 등 모든 직역이 포함돼있고 모든 직역이 배출한 대의원 총회 의결을 거쳐 만들어진 조직이 비대위”라며 “정부가 의협의 대표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내부 분열을 조장하기 위함”이라고 반발했다. 의협은 의료법에 근거해 모든 의사가 가입하는 법정 단체지만 개원의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번 의정갈등 국면서 가장 선봉에 선 단체는 전공의가 모인 대전협이 꼽힌다. 전공의가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병원을 떠나는 등 집단 강경 투쟁에 나서면서 의정갈등에 불이 붙었다. 의대생은 집단 휴학으로 힘을 실었다. 유급 마지노선에 이른 대학들이 수업을 재개했지만 의대생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집단사직에 나선 전공의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상황서 의대생의 복귀 가능성 역시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대통령실 1년 유예안 일축하면서도 ‘2000명 정원’ 논의 가능성 제시해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기준 학칙에 따른 형식적인 신청 요건을 지킨 의대생의 휴학 신청은 누적 1만242명으로 전체 의대 재학생 대비 54.5% 규모에 이른다.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과 수업 거부는 지난 2월부터 시작됐다. 대학 사이에선 이달 중순이 지나면 여름방학까지 총동원해도 유급을 막을 수 없다. 의대는 특정 수업서 3분의 1 또는 4분의 1 이상을 결석하면 낙제(F) 처리되고 F가 하나라도 나올 경우 유급이 되도록 학칙을 세워둔 곳이 많다. 전공의의 집단사직으로 병원 업무가 마비되고 일부 의료진에 업무가 과중되는 이른바 ‘의료대란’이 벌어졌다. 여기에 의대생의 집단 휴학은 의사 수급 부족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의료현장에 구멍이 생기면서 의사를 찾지 못해 환자가 사망하는 ‘응급실 뺑뺑이’ 사건도 일어났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지난 2월6일 2025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을 5058명으로 현행보다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요지부동 상태다. 정부는 2035년까지 1만명의 의사 인력을 확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006년 이후 19년 동안 동결됐던 의대 정원 확대를 예고한 것이다. 당시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발표 당시 의료계와 소통한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10월26일 ‘의대정원 확대 추진계획’을 발표한 이후 40개 대학으로부터 증원 수요와 교육역량에 대한 자료를 받았고 현장점검을 포함한 검증을 마쳤다고 밝혔다. 의료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특히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강조했다. 언론사 여론조사 등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 국민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을 의미있게 언급했다. “흔들림 없는 의료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에 국민의 응원을 지지대로 삼은 것이다. 요구 다른 의사단체 윤석열 대통령의 의지는 더 강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 대국민담화서 “역대 정부들이 9번 싸워 9번 모두 졌고 의사들의 직역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졌다”며 “이제는 결코 그런 실패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며 “이를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연구 결과를 들어 그 배경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는 국책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된 의사 인력 수급 체계를 검토했다. 수요 측면서 저출산 고령화와 같은 인구구조의 변화, 만성질환의 증가와 같은 질병구조의 변화, 소득 증가에 따른 의료수요 변화까지 반영했다”며 “어떤 방법론이더라도 지금부터 10년 후인 2035년에는 자연 증감분을 고려하고도 최소 1만명 이상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결론은 동일하다”고 말했다. 의대 정원 확대 시기에 대해서도 정부는 가차없는 태도를 보인다. 대통령실은 지난 8일, 의협이 제안한 의대 증원 1년 유예안에 대해 “정부는 그간 검토한 바 없고 앞으로도 검토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박민수 복지부 차관이 “내부 검토는 하겠고 현재로서 수용 여부를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내놓은 답변서 더 강경해진 입장이다. 대통령실은 1년 유예안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만약 의료계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그리고 통일된 의견으로 제시한다면 논의할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다”며 “열린 마음으로 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팔짱 낀 정부 공은 의료계로 일각에서는 정부는 초지일관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현재로선 ‘2000명’이 정부와 의료계 간 대화의 장벽이 되고 있다. 정부는 2000명이라는 수치를 꿋꿋하게 고수하고 의료계는 2000명 백지화가 대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는 중이다. 정부든 의료계든 어느 한쪽이라도 구부려야 맞닿는 법인데 평행선만 그리는 모양새다. 이 와중에 의료계는 내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의료계에 요구하는 ‘통일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새 회장을 선출한 의협이 그 중심에 있는 상황이다. ‘강성’으로 꼽히는 임현택 의협 회장 당선인과 의협 비대위가 엇박자를 내고 있고 대전협의 박단 비대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갈등 조짐을 보이는 중이다. 현재 의협은 비대위원장과 차기 회장이 공존하는 상태다. 의협은 지난달 26일, 임 당선인을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임 당선인은 결선투표서 65%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고 임기는 다음 달 1일부터다. 임 당선인의 등장으로 의협의 대정부 투쟁 수위가 올라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임 당선인은 의대 정원 증원 철회를 비롯해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파면을 요구하는 등 다른 의사단체에 비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마찰음이 나온 건 ‘단일대오’를 구성하는 과정에서였다. 의협 비대위는 지난 7일, 기자회견서 전의교협, 대전협, 의대협 등과 함께 합동 기자회견을 이번주 안에 열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임 당선인이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의협 비대위, 차기 회장·전공의 회장 갈등 삐걱거리는 단일대오에 대화 공전 가능성도 의협 회장직 인수위원회는 의협 비대위와 대의원회에 공문을 보내 임 당선인이 김택우 현 비대위원장 대신 의협 비대위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한 지붕 두 가족’ 상황의 의협 창구를 단일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전협 박 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박 위원장은 자신의 SNS에 “의협 비대위 김택우 위원장, 전의교협 김창수 회장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지만 합동 브리핑 진행에 합의한 적은 없다”고 적었다. 합동 기자회견은 일단 취소된 상태다. 박 위원장과 임 당선인의 갈등도 관심사다. 임 당선인은 지난 4일,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비공개 만남에 불만을 드러냈다. 의협 비대위는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만남을 ‘의미 있다’고 평가했지만 임 당선인은 SNS에 ‘내부의 적’을 운운하며 박 위원장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듯한 글을 남겼다. 박 위원장은 이 같은 보도 내용을 게시글에 공유하며 ‘유감’이라고 적었다. 전의교협은 의대 비대위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전의교협은 전국 40개 의과대학 교수협의회로 구성된 단체다.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이 의협 비대위에 합류하면서 의료계 단일대오 구성이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통일된 의견을 내놓을 단일협의체 구성 속도에 따라 의정갈등의 타결 가능성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협 비대위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구성하려던 시도가 임 당선인과 박 위원장의 행보로 삐걱거리면서 의료계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여기에 협상테이블이 마련돼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가 이뤄진다 해도 합의까지 가는 데는 하 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만만찮다. 입장차가 그만큼 첨예하다는 뜻이다. 타결까지 첩첩산중 일각에서는 정부와 의료계 모두 환자에 대한 배려는 뒷전에 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월 이후 두 달 넘게 갈등이 계속되면서 환자들은 불편을 겪고 있고 일부 의료진은 업무 과중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전공의가 떠난 병원은 매일 막대한 손해를 입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의 10번째 갈등이 어떤 결론으로 끝나느냐에 따라 의료계 지각변동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