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부르는 ‘스토킹 공화국’실태

사랑과 집착, 스토킹‘종이 한 장 차이’

비뚤어진 사랑과 집착의 결과물인 스토킹. 원치 않는 사람에게 일방적인 관심과 구애를 받는 것은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극심한 고통이다. 피해자 대부분은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을 뿐만 아니라 수면장애나 우울증, 자살충동 등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문제는 스토킹 범죄의 경우 피해자를 보호할 장치나 피의자를 처벌할 법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를 악용한 스토커들이 갖가지 방법으로 구애를 펼치고 있다. 일방적으로 따라다니는 방식의 스토킹에서 사이버 스토킹, 첨단장치를 이용한 교묘한 스토킹까지 스토킹 공화국의 실태를 추적했다.
  
“집 밖에 나가는 것도, 집 안에 있는 것도 무서워요. 이사를 가야 할까요.”
서울에 사는 A(27·여)씨는 잠을 설칠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니다. 2년간 자신을 따라 다니는 스토커 B씨 때문이다. A씨가 B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7년 3월쯤이었다. 당시 친구의 남자친구와 만나는 자리에서 남자친구의 친구로 합석한 것이 B씨였다. 첫인상은 멀쩡해 보였다. 유난히 부끄러움을 많이 탈 뿐 성격도 무난했다고 한다. 그 후 A씨와 B씨가 만난 일은 없었다. 문자 몇 통을 주고받긴 했지만 인사치레가 전부였다.

“한번만 만나줘”
끈질긴 집착과 구애

그러던 B씨가 갑자기 스토커로 돌변한 것은 그해 4월경. 뜬금없이 자신과 교제해 달라는 내용의 문자가 온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잘못 온 문자려니 넘겼던 A씨는 그 후에도 비슷한 내용의 문자를 몇 통 받았다. 그러나 번번이 A씨는 답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섬뜩하기도 했고 B씨에게 이성적인 호감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내 살인으로 마무리된 스토킹사건 벌어져 심각성 보여줘
피해자 보호장치·처벌법 마련돼 있지 않아 양산 우려
첨단장비 이용 스토킹하거나 미니홈피 해킹하는 등 방법 교묘해져
여성 10명 중 3명 스토킹 피해 경험 당해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 


그런데 그 후 어떻게 알았는지 B씨는 A씨의 자취집 앞에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놀란 A씨는 “관심 없으니 이러지 말아라”라고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지만 B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물공세를 펼치며 A씨를 괴롭혔다.
그렇게 몇 달 동안 괴롭힘을 당한 A씨는 결국 경찰서에 B씨를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두 사람이 원만하게 해결을 보라”며 A씨를 돌려보낼 뿐 뾰족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남자친구를 만들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갈 것이라고 충고했지만 스토커 때문에 아무 남자와 교제를 하는 것은 더욱 싫었다. 계속된 괴롭힘에 지친 A씨가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있는 방법은 가짜 결혼사진을 찍어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이라고 한다.

A씨는 “설마 결혼한 여자를 쫓아다니겠느냐”며 “대행업체에 가짜 신랑노릇을 할 사람을 찾을까 생각 중”이라며 괴로운 심경을 토로했다. 결별한 연인으로부터 스토킹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경우 스토커가 피해자에 대한 정보를 낱낱이 알고 있다는 점에서 위험성은 더 커진다.

이모(29·여)씨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씨는 남자친구 김모(28)씨와 2년간 교제를 하다 지난 1월에 결별을 선언했다.
이별을 통보할 때만 해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듯 보였던 김씨. 그러나 김씨가 본색을 드러낸 것은 1주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김씨는 사귈 때와 다름없이 매일 밤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지 않으면 이씨의 집 앞으로 와 그녀를 불러냈다.

초기에는 이씨도 순순히 김씨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미안한 마음과 옛정이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속된 김씨의 남자친구 행세에 화가 난 이씨는 그때부터 김씨와 연락을 끊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김씨는 이씨의 집과 직장, 자주 가는 음식점, 친한 친구의 전화번호 등 각종 정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씨를 스토킹하기가 수월했던 것. 심지어 김씨는 폭력까지 행사하며 이씨를 자신의 옆에 두려고 했다. 퇴근시간 즈음 회사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가 강제로 차에 태우는 등의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김씨의 스토킹 행각은 이씨의 부모님을 찾아 결혼약속을 했다고 거짓말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씨는 “내 행동반경을 모두 알고 있으니 어딜 가든 뒷통수가 따갑다”며 불안감을 호소했다.
이들처럼 스토커로부터 피해를 보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 최근 사회정신건강연구소가 여성 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30%가 스토킹을 당했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스토킹 피해자는 연간 18만명 이상으로 대중범죄로 부상한 지 오래다.

최근에는 스토킹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참극까지 벌어져 그 심각성을 알리기도 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은 지난 4월29일, 군산의 한 미용실이다. 대낮 사람들이 드나드는 미용실에서 미용실 여주인 C(37)씨를 총기로 살해한 이는 군산경찰서 나운지구대 소속이었던 조모(46) 경위. 조씨가 C씨를 향해 총을 겨눈 이유는 ‘짝사랑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

끝내 살인으로 마무리
대낮 총기 난사까지

2007년 6월 미용실 부근에서 벌어진 도난사건을 조사하던 조씨는 C씨를 보고 호감을 느껴 구애를 시작했다. 유부녀인 C씨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토킹 행각으로 발전하며 C씨를 괴롭혔다.

그렇게 2년여 동안 끈질긴 스토킹 행각을 벌이던 조 경위는 4월29일 오전 10시쯤 C씨와 말다툼을 벌이다 총으로 그녀를 살해했다. 짝사랑하는 여인에게 총을 겨눴다는 사실을 인지한 조 경위는 결국 자신의 머리에도 총을 쏴 C씨를 따라갔다.

짝사랑에서 스토킹으로, 스토킹에서 살인으로 번진 사건은 또 있다. 옛 애인을 스토킹하다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다. 지난 5월25일 경북 경산시의 한 아파트 앞에서 D(42)씨는 임신상태이던 자신의 옛 애인 E(32·여)씨를 흉기로 마구 찔러 살해했다.

4년여 간 E씨와 사귀던 D씨가 스토커로 돌변한 것은 2006년 4월경이다. 당시 자신과 헤어진 E씨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끈질긴 스토킹 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 경찰에 따르면 D씨는 “나와 사귄 사실을 남편에게 폭로하겠다”는 내용의 협박 문자를 보내는 등의 몹쓸 행각을 벌이다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앙심을 품고 대로변에서 살인을 벌인 것.

이처럼 지독한 스토킹은 사람까지 잡는 무서운 사건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에는 첨단장비를 이용한 스토킹까지 등장했다. 스토킹의 대상이 되는 여성의 차에 몰래 위치추적 장치를 달아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한 것.

서울 서초경찰서는 헤어진 여자친구의 차량에 몰래 위치추적장치를 단 혐의(위치정보보호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 회사원 김모(26)씨를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2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 이모(26)씨를 잊지 못하고 다시 만나기 위해 지난 5월 이씨의 차량 범퍼에 위치추적장치를 부착했다. 그리고 위치추적 장치에서 이씨의 차량이 서울 용산 인근을 지나간 것을 확인한 뒤 실제로 그 장소로 찾아가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싸이월드 등 미니홈피나 블로그를 해킹해 스토킹을 하는 상대에 대해 알아내는 스토커들도 적지 않다. 최근 돈을 받고 미니홈피를 해킹해 접속정보를 알게 해 준 일당이 잡힌 사건도 이 같은 세태를 보여줬다. 일당에게 돈을 주고 옛 애인 등의 접속정보를 알아내려 한 이들이 1만6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밝혀져 잠재된 스토커의 규모를 짐작케 했다.

처벌 법안 없어
마음 놓고 스토킹

이처럼 스토킹을 하는 방식이 날로 교묘해지고 악랄해지면서 피해자들이 받는 고통 또한 심화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의하면 많은 피해자들이 심한 공포와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수면장애를 겪거나 심한 경우 자살충동까지 느끼는 피해자들도 적지 않다.
사회생활에도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스토커를 피하기 위해 자주 연락처를 바꾸거나 외출을 자제하고 주변과 연락을 단절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 가해자를 만났던 자신을 자책하거나 가해자에게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포자기하는 삶을 사는 피해자까지 있다. 휴직이나 휴학, 이사 등을 통해 가해자로부터 도망치려 노력했지만 허사로 돌아갔을 때 자포자기의 심경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스토킹은 피해자의 인생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범죄지만 뚜렷한 규제방법도, 관련법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스토킹 방지법의 경우 지난 1999년과 2003년 두 차례 발의된 적이 있지만 스토킹을 어디까지 범죄행위로 규정할지를 놓고 논란만 거듭하다가 번번이 폐기된 바 있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스토킹 법안 역시 폐기될 위험에 처해있다.

이에 경찰이 스토킹을 경범죄로 처벌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실효성을 거둘 것인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하는 의견이 많다.
결국 자기 스스로 스토커를 물리치기 위한 대처방안을 만들어 실천하는 것이 방법 아닌 방법. 전문가들은 “스토커에게 싫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하게 한 뒤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아야 하고 말로 타일러 볼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며 “경찰에게 신고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더라도 스토커에게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적극적인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스토킹 자가 진단법

1.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계속 전화를 건다.
2. 직장, 학교, 집 근처에서 기다린다.
3. 만나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등 위협한다.
4. 만나기 위한 거짓 상황을 연출한다.
5. 일방적으로 편지, 문자메시지 등을 보낸다.
6. 꽃, 사탕, 피 묻은 깃털 등 선물공세를 한다.
7. 피해자의 순결 등 악성소문을 퍼트린다.
8. ‘너는 내 것’이라는 등 사람을 물건 취급한다.

※ 8개 문항 중 3개 이상 해당되면 스토킹 가해자 또는 피해자



스토킹 대처 10계명

1.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기보다 소유하려는 사람은 조심한다.
2. 상식을 벗어난 호의를 베풀거나 상대의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조심한다.
3. 스토킹 의심이 들면 단호하고 분명하게 거절하는 태도를 보인다.
4. 타이르거나 설득하지 말고 상대에게 말려들지 않도록 대화를
   간단히 끝낸다.
5.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말고 주변사람에게 보호를 요청한다.
6. 피해를 계속 수집하고 사건 경위를 육하원칙에 따라 기록해 둔다.
7. 단호한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미약한 처벌이 나와도 계속 신고한다.
8. 전화번호 변경이나 이사 등 적극적으로 피하는 것도 필요하다.
9. 가해자 가족에게 알려 교정치료를 받도록 유도한다.
10. 피해를 드러내고 여론화해 처벌법안을 제정하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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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