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뮤지컬 시장 제패 멀지 않았죠”

뮤지컬 <드림걸즈>로 브로드웨이 진출 꿈 이룬 오디뮤지컬컴퍼니 신춘수 대표

화려한 무대·스타 배우·연출자·스태프 조화가 성공 비결
한·미 합작 프로젝트 ‘드림걸즈‘ 제작자로 본토 무대 도전장

        
“주위에서 많이 말렸어요. 하지만 꼭 성공하리라 믿습니다.” 요즘 뮤지컬계의 최고 이슈는 뮤지컬 <드림걸즈>를 통해 전세계 뮤지컬 시장 공략에 나선 오디뮤지컬컴퍼니(이하 오디)의 신춘수 대표다. 그가 미국 브로드웨이와 같이 손잡고 만든 <드림걸즈>는 올 상반기 최고 화제작이다. 경기침체에다 공연 비수기까지 겹친 이때 제작비 96억원짜리 뮤지컬은 모험이 아닐 수 없다. 경기 불황임에도 티켓 판매가 나쁘지 않다. 좌석 점유율 70%를 넘기고 있다. 초연인 탓에 제작비가 많이 들었지만 현재 추세라면 미미하나마 수익이 날 전망이다. 하지만 신 대표를 더욱 기분 좋게 만드는 건 다른 일이다. 제작자로 나선<드림걸즈>를 통해 세계 제패의 꿈이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시작, 브로드웨이로 뻗어나간다는 꿈으로 만든 <드림걸즈>는 지난 2월27일 오프닝 이후 관객과 언론의 호평으로 순조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96억원의 제작비, 한국 프로덕션이 주체가 되어 미국 브로드웨이의 제작자, 스태프들이 참여한 한·미 합작 프로젝트인 <드림걸즈>가 세계 최초로 닻을 올린 곳은 다름 아닌 한국이다.
신춘수 대표는‘월드 프리미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뮤지컬 <드림걸즈>를 만들고자 지난 2년 동안 뼈를 깎는 노력을 했다.
신 대표는 “<드림걸즈> 라이선스 계약을 위해 미국 측 프로듀서인 존 브릴리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를 보자마자 브로드웨이 진출에 대한 나의 구체적인 꿈을 이야기했다”며 “이미 많은 나라에서 라이선스 계약 문제로 그를 찾아왔지만 꿈 이야기로 자신을 설득한 사람은 미스터 신이 유일하다고 했다”고 계약 당시를 설명했다.

해외성공 쉽진 않지만
자신감은 최고조

<드림걸즈>는 공연제작자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게 그를 이끈 견인차라 할 수 있다.
뮤지컬 <드림걸즈>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화려함’이라 할 수 있다. 무대는 황홀함을 넘어 ‘쇼 뮤지컬이란 이런 것’이라는 듯 관객의 눈을 압도한다.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LED 패널 5개가 상하좌우 360도로 회전하며 무대를 자유자재로 변형시킨다. 거기에 400개의 조명기와 600여 벌의 의상, 112개의 가발, 무대는 스크린의 역할까지 겸한다.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다차원적인 무대 메커니즘은 경이로움에 가깝다.
신 대표는 “<드림걸즈>로 브로드웨이에서 인정받는 것이 꿈이다. 그들만의 리그에 뛰어드는 건 만만찮은 일이겠지만 해외에서 인지도를 쌓아나갈 자신도 있다. 이제 시작이다”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드림걸즈>는 가수가 꿈인 디나, 에피, 로렐 세 소녀의 꿈 이야기다. 신 대표의 인생 또한 뮤지컬만큼이나 꿈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그는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영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에 서울예대 영화과에 다시 들어갔다. 재학시절 작은 프로덕션에서 광고 제작, 편집, 카피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영화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이 조감독에서 물러나자 대타로 조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 작품이 <비오는 날의 수채화>다.

‘그리스’, ‘지킬 앤 하이드’ 등 작품으로 흥행 능력 검증 받아
“성공하더라도 후진양성에 재투자하지 않으면 발전 가능 없어”


별명 ‘돈키호테’
추진력 아무도 못 말려

영화감독을 꿈꾸던 신 대표는 뮤지컬이 막 산업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한 시점에서 우연히 공연과 인연을 맺었다. 모든 일에 자신감이 넘쳤고 자신을 천재라 생각했던 신 대표는 1998년 20대 초반의 나이에 뜻이 맞는 친구들과 작은 기획사를 차렸고 창작 뮤지컬을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결과는 모든 것을 잃을 정도로 참담했다.  
이후 경험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설도윤 대표가 있는 ‘설앤컴퍼니’에 입사해 <사랑은 비를 타고>(1996)를 기획했고 흥행 성공에 힘입어 2001년에 그 작품을 들고 독립했다. ‘세계 공연예술의 문을 연다’는 의미의 ‘Open Door’에서 이름을 딴 오디뮤지컬컴퍼니를 차린 것도 꿈을 향한 첫 발걸음이었다.
신 대표는 “<사랑은 비를 타고> 기획 당시 뮤지컬이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재미있는 일이라고 여겼다. 대자본이 들어오고, 해외팀과의 작업이 시작되면서 빠른 시간 동안 제작 노하우를 익혔다. 그러면서 뮤지컬에 대한 애정이 싹텄다”고 말했다.
신 대표는 끊임없는 작업 속에서 노하우를 체득하고
단계적으로 발전을 했다. 2003년에는 ‘뮤지컬 열전’을 만들어 한국에선 공연이 힘들 것이라는 평을 받던 <리틀 샵 오브 호러스> <어쌔신> 같은 작품들에 도전했다.
또 <킹 앤 아이>(2003),
<크레이지 포 유> <지킬 앤 하이드>(2004), <맨 오브 라만차> 등을 줄기차게 무대에 올렸다. 오디는 지난 3년 동안 매출 250억원을 올리며 뮤지컬계에서 무시 못할 존재가 됐다.
비교적 이른 나이에 회사를 차려 ‘작품에 꽂혀있는 프로듀서’로 이름을 알리기까지 그에게도 실패와 좌절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확신이 들면 밀어붙이는 추진력은 아무도 말리지 못해 그의 또 다른 별명은 바로 ‘돈키호테’다. 돈키호테 정신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올여름 한국에서 미국의 비엔나 웨이츠 프로덕션과 함께 뮤지컬 <드림걸즈> 제작발표회를 가졌다. 2010년을 목표로 한·미 합작으로 제작되는 이 작품은 신 대표가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에 진출하기 위한 첫 번째 프로젝트다.
그는 “해외 진출은 절대적이다. 우리나라 시장은 내수에 한계가 있고, 수익 구조를 만들기가 어렵다. 뮤지컬도 콘텐츠를 수출해야 한다. 브로드웨이 진출의 꿈이 지금의 어려움을 견디게 해준다. 내게 최고의 목표다”라고 말했다.
뮤지컬 <드림걸즈>를 준비하면서 다들 말리는 공연을 뚝심 하나로 버텨왔고 솔직히 겁도 났다. 하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환상적인 메커니즘은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으로 시작하여 지금의 좋은 결과를 얻었다.
신 대표는 “1000석이 넘는 대극장 장기공연은 모험이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정말 뭔가에 홀리지 않았나 할 정도로 무모한 시도였지만 똑같은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면 분명 그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다”며 “주변에서 우려도 많이 했지만 한국 뮤지컬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해서는 좋은 작품으로 장기공연에 도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현재까지 우리나라 뮤지컬은 성장일로에 있으며 향후 몇 년간은 영화시장처럼 더 좋은 작품들이 활성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양적인 팽창은 기대 이상일 것이고 질의 차이가 관건이 될 것이란다. 지금보다도 더 심하게 질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양극화가 될 것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뮤지컬 기업들로 인해 멀지 않은 미래에 몇 차례 지각변동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신 대표는 “도태될 회사와 그렇지 않을 회사가 향후 몇 년 안에 결정지어질 것 같다”며 “오디를 포함한 제작사들이 사명감을 갖고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 대표는 공연프로듀서 3세대에 해당한다. ‘공연프로듀서’란 작품의 선택에서부터 기획, 제작은 물론 연출가와 스태프 선정까지 공연의 전반적인 면을 모두 관장하는 공연기획자를 말한다.
신 대표는 “공연의 예술적인 면을 책임져야 할 연출자가 스폰서 만나고 흥행까지 신경 써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연출자는 공연의 완성도에만 신경 쓰고 제작자가 흥행을 위한 아이디어를 내는 시대가 돼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뮤지컬이 이벤트화 되어 가는 것 같아 아쉽다”며 “돈이 된다고 하니까 연극·뮤지컬에 뿌리를 두지 않은 이들이 몰려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 대표는 “뮤지컬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작자의 작품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고 “성공하더라도 후진양성에 재투자하지 않아 발전이 없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어 “수익이 나면 다음 작품을 위해 재투자함으로써 새로운 배우, 우수한 스태프를 확보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다음 공연이 성공할 수 있었다”며 “스타 한 명에 의존하는 작품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중소규모 뮤지컬을 통해 새로운 인력을 키우고 저변확대에 힘쓰는 것이 오디의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책임감을 나타냈다.
신 대표는 한국 뮤지컬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뮤지컬이 이제 막 산업화되는 시기인 만큼 번안이나 창작, 번역 뮤지컬 구분보다는 좋은 작품으로 장기공연해 관객 흡입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공연이 왠지 어렵고 꺼려진다는 사람들도 노래 듣고 박수치다 보면 감동받게 되는 것이 뮤지컬의 진짜 재미”라고 설명하는 신 대표는 “뮤지컬계의 발전을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펼칠 것이며 최선을 다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내년엔 가정도 꾸리고
영화감독 데뷔도 계획

오는 11월 미국 ‘아폴로씨어터’ 투어공연을 시작으로 전세계 뮤지컬 시장 제패에 나서는 신춘수 대표는 좋은 작품을 만들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겠다는 생각이다.
신 대표는 “‘국내의 좁은 시장을 벗어나 세계적인 콘텐츠를 갖고 해외로 나가 새 시장을 열어야 한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왔고 이제 현실이 됐다. 영국 프로듀서와 손잡고 뮤지컬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엔 가정도 꾸리고 영화감독으로도 데뷔할 것이다. 꿈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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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채 상병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취한 것으로 파악됐다. 자신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한 게 핵심이다. 임 전 사단장과 연락이 닿은 인물들은 대부분 이해관계자다. 자칫하면 회유 정황으로 보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은 ‘채 상병 사건’의 핵심 피의자다. 수사외압 논란의 시발점이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직접 챙긴 인물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의 수사 대상인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사건을 물밑에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다 왜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침묵 지키다… 임 전 사단장은 최근까지 복수의 해병대 간부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는 간부 A씨에게 “(공수처)수사가 종결되지 않은 상황서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서 연락하지 못했다”며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은 없었다. 다만 “모두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지만 아들을 잃은 채 상병의 유족 특히 모친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다. 진실을 밝힐 때까지는 고통스러워도 견딜 생각이다.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전했다. 임 전 사단장은 A씨에게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하 대령)의 변호인이었던 김경호 변호사에게 내용증명을 보낸 것과 관련해 민·형사 소송을 준비 중이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뉘앙스로 연락을 취했다. 김 변호사가 자신을 고발한 게 무고에 해당하는지와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타 간부들에게도 비슷한 도움을 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간부는 <일요시사>와의 연락서 “난감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모셨던 사람이긴 한데 임 전 사단장에 대해 개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사람이 채 상병 사건 진상규명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 전 사단장은 과거 박 대령에게도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바 있다. 자신은 물속 수색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수차례 했고 작전통제권이 육군 50사단장으로 넘어간 상황서 자신의 책임과 범위 내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며, 이에 대한 박 대령의 기억과 판단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공수처 수사 대상인데… 사건 연루자들에 연락 당시 임 전 사단장은 “상급지휘관(임 전 사단장)에게 작전통제권은 없지만, 부대를 방문해 전술토의할 수 있고 효율적인 작전이 되도록 유도할 권한은 있다”고 했다. 작전통제권이 없어 안전 책무가 없다면서도, 자신이 현장서 ‘수변을 수색하라’고 지휘한 건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이런 이유로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직권남용 문제를 언급한 해병대수사단의 조사 결과 보고서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해병대 수사단은 임 전 사단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적시하지 않았다. 수사단은 ‘작전통제권과 상관 없이’ 임 전 사단장을 실질적 수색작전 지휘관으로 보고, 안전지침을 부대에 하달하지 않아 채 상병 순직사고가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임 전 사단장은 김 변호사와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법적 대응까지 예고했다. 김 변호사가 SNS에 게시한 글 중 허위 사실이 포함된 내용이 있다는 게 임 전 사단장의 주장이다. 그는 김 변호사에게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한계 속에서 해석과 이해를 거쳐 어떤 주장을 하는 것에 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악의적이라고 생각한다”며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문제점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견됐고, 제가 사안의 진상을 밝히면서 그걸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허위가 여론을 조작하고 진실을 가리는 불의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 나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을 공수처에 세 번째로 고발했다. 이번 혐의는 군형법 제79조 무단이탈죄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임 전 사단장은 지난 1월 말 서울 노원구에 있는 화랑대연구소가 아닌 영등포구에 위치한 해군 관사 ‘바다마을아파트’에 거주하며 인접한 해군 재경근무지원대대 사무실로 출근 중이다. 마음 급해졌나…어떤 의도? 갑자기? 특검 압박 느꼈나 이 사실은 그가 여러 곳에 자신이 결백하다는 취지의 문서를 내용증명, 등기우편 등으로 보내면서 드러났다. 등기 봉투의 발신지는 화랑대연구소였으나 배송 조회 결과 실제 발신지는 서울 신길7동 우편취급국이었다. 임 전 사단장이 거주 중인 서울 관사 인근이다. 발송 시간도 대부분 일과시간 직전이나 일과 중이었다. 임 전 사단장은 언론을 통해 “연수 초기에 육사에서 주로 근무했으나 장거리 출퇴근 비효율적이라서 최근엔 해군재경대대서 근무 중이다. 근무 장소 중 하나가 해군 재경대대”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정책 연수의 일시와 출퇴근 시간 및 장소가 명령으로 특정된다. 인사명령의 지정된 장소서 지정된 출퇴근 시간을 준수해야 한다”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인사명령이나 상급기관의 지휘관에게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최근 자주 번호를 변경하는 임 전 사단장의 핸드폰을 압수수색해 무단이탈한 장소와 상급지휘관인 해병대 사령관에게 정식으로 사전에 허가를 받았는지에 관한 진실을 밝혀 강력히 처벌해 달라는 취지”라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행동이 증거인멸 시도로 볼 수 있다”며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내며 같이 책임을 면하자는 회유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공수처는 지난 1월부터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와 경찰 이첩 과정서 외압이 있었는지에 대해 강제수사를 착수해 왔다. 박 대령에게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것에서 임 전 사단장이 적극적인 책임 회피에 나섰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현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권서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자 조용했던 임 전 사단장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부적절한 처신 한 해병대 간부는 “전우의 죽음 이후 형평성에 어긋나거나 석연치 않은 윗선의 처리는 진상규명 문제를 떠나 정치권 개입을 불렀다”며 “도의적 책임도 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일부 작자들의 행동으로 인해 해병대 전체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 전 사단장은 <일요시사>가 사건 관계인에 연락한 이유에 관해 묻자 "사건 관계인에게 연락한 것은 사실 확인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