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 조세형 70년 절도사 풀스토리

  • 김성수 kimss@ilyosisa.co.kr
  • 등록 2013.04.11 10: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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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이 지경…좀도둑 된 왕년의 홍길동

[일요시사=경제1팀] '대도' 조세형씨가 또 다시 쇠고랑을 찼다. 1970∼80년대 암울한 시기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씨는 신출귀몰하게 고관대작 집만 골라서 털어 '현대판 홍길동'으로 회자된 인물. 한때 종교에 귀의해 개과천선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도 잠시. 잇따른 절도 행각으로 철창을 들락날락하면서 일개 '좀도둑'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씨는 어떤 삶을 살아 왔을까.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되짚어봤다.

 


조세형씨가 또 경찰에 붙잡혔다. 이번엔 강남 고급빌라를 털다 덜미가 잡혔다. 이번에 구속되면 그는 전과 11범이 된다. 서울 서초경찰서는 지난 4일 고급 주택가 빈집에 침입해 귀금속 등 금품을 훔친 혐의(특가법상 상습절도)로 조씨를 검거했다. 경찰에 따르면 조씨는 지난 3일 오후 8시30분께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고급 빌라 1층에 불이 꺼진 것을 보고 침입, 고급시계와 금반지 등 시가 3000만∼5000만원 상당의 귀금속 33점을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

5세 때 구걸 갔다가
은수저 처음 절도

모자와 마스크를 쓴 조씨는 빌라의 화단 쪽 1층 베란다 유리창문을 깨고 들어갔다. 미리 준비한 노루발못뽑이(속칭 빠루)와 펜치 등을 이용했다. 당시 집은 불 꺼진 채 비어 있었다. 조씨가 유리를 깨는 광경을 본 이웃주민은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현장에서 조씨를 체포했다. 롤렉스시계와 금목걸이 등 귀금속을 주워 담던 조씨는 만년필로 저항했으나 경찰이 총을 꺼내들자 이내 두 손을 들었다.

조씨는 "전처가 새 출발하라고 준 임대보증금 3000만원으로 선교사무실을 차리려다 무속인한테 사기를 당했다"며 "1년 동안 갖은 노력을 했는데 돈을 마련하지 못해 이성을 잃었다"고 진술했다.

1970∼80년대 암울한 시기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조씨에게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비단 이번 사건 뿐만 아니라 그가 철창을 들락날락할 때마다 그랬다. 드라이버 하나로 철통 경비를 뚫고 신출귀몰하게 '고관대작'들의 집만 골라 털어 '현대판 홍길동'으로 불린 인물이기 때문이다.


올해 75세인 조씨는 출생이 불분명하다. 호적이 없어 생년월일을 정확히 모르고, 부모도 누군지 모른 채 길거리에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학교문턱에도 못 가봤다. 조씨가 처음으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댄 것은 5세 때 깡통을 들고 밥을 얻으러 갔다가 남의 집 부엌에서 은수저를 훔친 일이다. 당연히 나이가 어려 '도둑질이 나쁘다'는 범죄 의식이 없었지만,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속담을 증명이나 하듯 범죄 유혹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조씨는 1963년 특수절도 혐의로 전과자 신세가 된 이후 1970년대까지 절도 혐의로 10여 차례나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16세께 소년원에서 처음으로 글을 배우면서 도둑질은 나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됐으나 '배가 고파서' '습관적으로'훔쳐온 그는 이미 전문 도둑이 돼 있었다.

강남 고급빌라 털다 쇠고랑
수천만원 귀금속 33점 훔쳐

그때까지만 해도 흔한 절도범에 지나지 않았던 조씨는 197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대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름의 원칙도 세웠다. 가난한 사람의 물건엔 손대지 않고,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나라 망신이란 생각에 외국인 집도 털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또 도둑질로 생긴 돈의 40%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겠다는 결심까지 했다. 이는 나중에 그가 '대도'로 불린 이유다.

조씨는 1980년대 초까지 부유층과 고위권력층의 대저택만 찾아다니며 수십억원대의 귀금속, 현금, 기업어음 등을 훔쳤다. 당시 수십억원은 지금의 수백억원과 맞먹는다. 피해자는 전직 경제부 총리와 국회의원, 그룹 총수, 기업체 사장 등 정·재계 인사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뭐가 구린지 하나같이 피해 사실을 극구 부인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조씨에게 도둑질을 당한 몇몇 집은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 특히 조씨가 한 국회의원 집에서 훔친 수억원대에 달하는 2.2캐럿짜리 물방울 다이아몬드는 큰 화제가 됐다. 상류층의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끼던 서민들은 조씨를 '의적'이라 불렀다.

1982년 수개월에 걸친 경찰의 추적 끝에 검거된 조씨는 재판 중 탈주해 또 한 번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줬다. 1심에서 절도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조씨는 이듬해 서울형사지법에서 항소심 공판을 받고 구치소로 돌아가기 직전 수갑을 찬 채로 구치감 환풍기를 뜯고 탈주했다. 탈주 후에도 조씨의 절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5박6일간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서울 도심을 활보하며 5차례에 걸쳐 주택에 침입해 음식과 현금 등을 훔쳤다.


재판 중 6일간 탈주
선교활동 도중 재범

그러나 이도 잠시. 끈질긴 추적을 벌인 경찰이 쏜 총에 가슴을 맞고 붙잡힌 조씨는 특수절도에 도주 혐의까지 추가돼 징역 15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재심청구 등을 통해 1998년 만기 출소했다.

1963년부터 시작된 조씨의 '절도인생'은 청송감호소를 나서며 끝나는 듯 했다. 조씨는 출감하자마자 "신앙인으로서 거듭나겠다"며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서울 종로에 늘빛선교원을 열고 교인으로서 착실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999년엔 자신을 검거했던 '수사반장' 최중락씨의 도움으로 에스원 범죄예방 자문위원으로 위촉, '범죄예방 전도사'로 새 길을 찾는 것처럼 보였다.

조씨는 당시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대도를 벗은 지 오래됐다"며 "직장인이고 신앙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해 약간 서운한 감정이 있다"고 밝혔다. 또 보안업체에 일하게 된 배경에 대해선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범죄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범죄자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라며 "회사가 신앙을 통해 변화된 인격을 인정해준 점에 대해 감사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눈앞에 천만금이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겠다"던 참회의 눈물은 금세 말랐다. 조씨는 2000년부터 선교활동 명목으로 일본 출장이 잦아졌고, 현지에서 또 절도행각을 벌였다. 신앙간증 차 간 일본 도쿄 시부야의 부촌을 돌며 라디오와 손목시계 등 13만엔 상당의 금품을 훔친 것. 2001년 그는 출동한 일본 경찰관이 쏜 총에 맞고 체포돼 3년6개월 동안 일본 고부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석방된 조씨는 2004년 극비리에 귀국해 한동안 두문불출했다.

그랬던 그가 세상에 얼굴을 드러낸 곳은 다름 아닌 경찰서였다. 조씨는 일본에서 출감한 지 1년 만인 2005년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가정집에 침입, 손목시계 6개 등 165만원 어치의 금품에 손을 댔다. 금품을 훔쳐 나오던 조씨는 집안에 설치된 전자탐지기에 감지됐고, 곧바로 출동한 사설 경비업체와 경찰에 발각됐다. 조씨는 옆집 담을 넘어 달아났지만 경찰이 쏜 공포탄에 놀라 넘어지면서 덜미를 잡혔다.

경찰에 붙잡힌 조씨는 자신이 '조세형'인 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조씨는 경찰에서 "나는 조세형이 아니라 48세 노숙자 '박성규'"라며 "노점상 장사 밑천을 마련하기 위해 범행했다"고 주장했다. 조씨는 지문감식 결과 신분이 확인되자 그때서야 "일본으로 밀항하기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고급주택을 털 계획을 짰다"고 털어놨다.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된 조씨는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철창신세를 졌다.

드라이버 하나로 철통경비 뚫고
'신출귀몰'고관대작 집만 털어

이후 다시 종적을 감췄던 조씨는 장물아비 사건으로 '대도'란 호칭에 먹칠을 했다.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2010년 5월 훔친 물건을 팔아주고 돈을 챙긴 조씨를 장물알선 혐의로 구속했다. 조씨는 청송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당시 방을 함께 쓴 노모씨가 훔친 귀금속을 처분해줬다. 노씨를 포함한 4인조 강도는 지난해 4월 광주 남구 한 금은방에 침입해 현금과 보석 3억원어치를 훔쳤다. 조씨는 노씨 등이 훔친 귀금속 가운데 1000여돈(시가 1억1000만원)을 서울 종로구 귀금속 상가에 팔아주고 수고비 1000만원을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조씨가 장물아비를 자처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궁핍하게 살다 내연녀와 살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조씨는 경찰이 들이닥치자 창문에서 뛰어내려 도망쳤고,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다리미를 휘두르며 격렬히 저항했다는 후문이다. 70대 나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른 몸놀림이었다는 게 경찰의 전언이다.

조씨는 이 사건으로 징역 1년4개월을 선고받고 안양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2011년 9월 형을 마치고 출소하던 조씨는 바깥공기도 제대로 맡지 못하고 또 다시 경찰서로 향했다. 서울 광진경찰서는 2009년 금은방 주인과 가족을 흉기로 위협해 금품을 빼앗은 혐의로 조씨를 구속했다. 조씨는 2009년 4월 청송교도소 수감 동료인 공범 2명과 함께 경기 부천시 원미구 소사동에 있는 금은방 주인 유모씨 집에 침입, 흉기로 위협해 현금 30만원과 금목걸이 등을 빼앗아 달아난 혐의를 받았다. "내 평생 도둑질은 했어도 강도는 안 했다"던 조씨의 말대로 재판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국민참여재판 배심원도 9명 전원 무죄평결을 내렸다.

'가화만사성'이라 했던가. 조씨가 쉽게 손을 씻지 못하는 것은 반복된 가정불화도 한 원인인 것으로 파악된다. 조씨는 3번 가정을 꾸렸지만 모두 순탄치 않았다.


1963년부터 철창 들락날락 
손 씻었다 도벽 다시 도져

처음 결혼한 것은 도피 시절이다. 조씨는 사회 상류층 집을 잇달아 턴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던 1982년 6월 서울 모 살롱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던 나모씨와 만나 결혼했다. H여대를 중퇴한 나씨는 조씨를 보석가공업자로 알았다고 한다. 둘은 동거하다 정식으로 결혼했으나, 결혼식을 올린 지 27일 만인 11월25일 혼인신고를 하러 가던 중 경찰이 조씨를 체포하면서 신혼의 보금자리가 깨졌다. 나씨는 조씨의 실체를 뒤늦게 알고 충격을 받아 임신 5개월 된 아이를 유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씨는 수감 초기만 해도 나씨의 극진한 내조를 받았다. 그러나 나씨는 조씨가 까마득한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되자 이내 변심했다. 국내 생활을 접고 해외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11월 출소한 조씨는 2년 뒤 16세 연하인 이모씨와 결혼했다. 조씨가 자동차 부품생산 회사를 운영하던 이씨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3월. 지방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경부고속도로 망향휴게소에서 자신을 다른 목사로 알고 인사를 건네 온 이씨와 우연한 첫 만나게 됐다. 이후 둘은 용인 강남대학교에서 매주 만나 함께 선교관련 강의를 듣고 조씨가 이끌고 있는 늘빛선교회에서 함께 선교활동을 하며 사랑을 키웠다. 2000년 2월엔 아들도 낳았다. 두 사람은 그해 5월 경기도 여주 알로에마임 연수원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후에도 조씨는 절도 행각으로 교도소를 들락날락했고, 이 사이 가정은 방치되다 시피 했다. 둘 사이에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조씨가 마포 사건으로 구속된 뒤부터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이씨는 '반야화 법사'란 이름으로 서울 중랑구에 포교원을 차렸고, 2009년 '청아'란 불명의 비구니가 되면서 조씨와 이혼했다.

재범 가정불화 탓?
3번 결혼생활 실패

조씨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사실이 알려진 것은 2010년 5월 장물 사건 때다. 조씨는 경찰 조사에서 "내연녀와 살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조씨는 경찰에 붙잡힐 당시에도 내연녀와 함께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의 한 은신처에 살고 있었다.

무심코 은수저를 훔쳤던 5세 아이는 어느덧 70대 노인이 되서도 제 버릇을 남 주지 못했다. 한때 '대도'란 국민적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장물아비로 전락하더니 급기야 좀도둑 신세로 추락했다. 아직도 국민들의 뇌리 속에 '의적'으로 각인돼 있는 인물치곤 초라하기 그지없는 말년이다.



김성수 기자<kimss@ilyosisa.co.kr>

 

조세형-정홍원 인연 화제

그때 그 범인…그때 그 검사

조세형과 정홍원 국무총리의 특별한 인연이 화제다.

부유층과 고위권력층의 대저택만 찾아다니며 수십억원대의 귀금속, 현금, 기업어음 등을 훔친 조씨는 1982년 검거됐다가 재판 중 탈주했다. 탈주 6일 만에 경찰에 잡힌 조씨는 특수절도에 도주 혐의까지 추가돼 징역 15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재심청구 등을 통해 1998년 만기 출소했다.

조씨의 탈주사건을 맡은 검사가 정 총리였다. 당시 정 총리는 조씨에게 성경책을 건네며 마음을 가다듬기를 권했고, 조씨는 출소하자마자 "신앙인으로서 거듭나겠다"며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조씨는 "자신을 기소했던 검사를 보고 싶다"며 정 총리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결과적으로 조씨는 정 총리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후에도 수차례 철창신세를 면치 못했고, 이번에 다시 서울 강남 고급빌라를 털다 붙잡히면서 전과 11범이 될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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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채 상병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취한 것으로 파악됐다. 자신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한 게 핵심이다. 임 전 사단장과 연락이 닿은 인물들은 대부분 이해관계자다. 자칫하면 회유 정황으로 보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은 ‘채 상병 사건’의 핵심 피의자다. 수사외압 논란의 시발점이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직접 챙긴 인물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의 수사 대상인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사건을 물밑에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다 왜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침묵 지키다… 임 전 사단장은 최근까지 복수의 해병대 간부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는 간부 A씨에게 “(공수처)수사가 종결되지 않은 상황서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서 연락하지 못했다”며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은 없었다. 다만 “모두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지만 아들을 잃은 채 상병의 유족 특히 모친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다. 진실을 밝힐 때까지는 고통스러워도 견딜 생각이다.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전했다. 임 전 사단장은 A씨에게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하 대령)의 변호인이었던 김경호 변호사에게 내용증명을 보낸 것과 관련해 민·형사 소송을 준비 중이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뉘앙스로 연락을 취했다. 김 변호사가 자신을 고발한 게 무고에 해당하는지와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타 간부들에게도 비슷한 도움을 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간부는 <일요시사>와의 연락서 “난감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모셨던 사람이긴 한데 임 전 사단장에 대해 개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사람이 채 상병 사건 진상규명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 전 사단장은 과거 박 대령에게도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바 있다. 자신은 물속 수색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수차례 했고 작전통제권이 육군 50사단장으로 넘어간 상황서 자신의 책임과 범위 내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며, 이에 대한 박 대령의 기억과 판단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공수처 수사 대상인데… 사건 연루자들에 연락 당시 임 전 사단장은 “상급지휘관(임 전 사단장)에게 작전통제권은 없지만, 부대를 방문해 전술토의할 수 있고 효율적인 작전이 되도록 유도할 권한은 있다”고 했다. 작전통제권이 없어 안전 책무가 없다면서도, 자신이 현장서 ‘수변을 수색하라’고 지휘한 건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이런 이유로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직권남용 문제를 언급한 해병대수사단의 조사 결과 보고서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해병대 수사단은 임 전 사단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적시하지 않았다. 수사단은 ‘작전통제권과 상관 없이’ 임 전 사단장을 실질적 수색작전 지휘관으로 보고, 안전지침을 부대에 하달하지 않아 채 상병 순직사고가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임 전 사단장은 김 변호사와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법적 대응까지 예고했다. 김 변호사가 SNS에 게시한 글 중 허위 사실이 포함된 내용이 있다는 게 임 전 사단장의 주장이다. 그는 김 변호사에게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한계 속에서 해석과 이해를 거쳐 어떤 주장을 하는 것에 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악의적이라고 생각한다”며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문제점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견됐고, 제가 사안의 진상을 밝히면서 그걸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허위가 여론을 조작하고 진실을 가리는 불의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 나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을 공수처에 세 번째로 고발했다. 이번 혐의는 군형법 제79조 무단이탈죄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임 전 사단장은 지난 1월 말 서울 노원구에 있는 화랑대연구소가 아닌 영등포구에 위치한 해군 관사 ‘바다마을아파트’에 거주하며 인접한 해군 재경근무지원대대 사무실로 출근 중이다. 마음 급해졌나…어떤 의도? 갑자기? 특검 압박 느꼈나 이 사실은 그가 여러 곳에 자신이 결백하다는 취지의 문서를 내용증명, 등기우편 등으로 보내면서 드러났다. 등기 봉투의 발신지는 화랑대연구소였으나 배송 조회 결과 실제 발신지는 서울 신길7동 우편취급국이었다. 임 전 사단장이 거주 중인 서울 관사 인근이다. 발송 시간도 대부분 일과시간 직전이나 일과 중이었다. 임 전 사단장은 언론을 통해 “연수 초기에 육사에서 주로 근무했으나 장거리 출퇴근 비효율적이라서 최근엔 해군재경대대서 근무 중이다. 근무 장소 중 하나가 해군 재경대대”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정책 연수의 일시와 출퇴근 시간 및 장소가 명령으로 특정된다. 인사명령의 지정된 장소서 지정된 출퇴근 시간을 준수해야 한다”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인사명령이나 상급기관의 지휘관에게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최근 자주 번호를 변경하는 임 전 사단장의 핸드폰을 압수수색해 무단이탈한 장소와 상급지휘관인 해병대 사령관에게 정식으로 사전에 허가를 받았는지에 관한 진실을 밝혀 강력히 처벌해 달라는 취지”라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행동이 증거인멸 시도로 볼 수 있다”며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내며 같이 책임을 면하자는 회유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공수처는 지난 1월부터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와 경찰 이첩 과정서 외압이 있었는지에 대해 강제수사를 착수해 왔다. 박 대령에게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것에서 임 전 사단장이 적극적인 책임 회피에 나섰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현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권서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자 조용했던 임 전 사단장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부적절한 처신 한 해병대 간부는 “전우의 죽음 이후 형평성에 어긋나거나 석연치 않은 윗선의 처리는 진상규명 문제를 떠나 정치권 개입을 불렀다”며 “도의적 책임도 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일부 작자들의 행동으로 인해 해병대 전체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 전 사단장은 <일요시사>가 사건 관계인에 연락한 이유에 관해 묻자 "사건 관계인에게 연락한 것은 사실 확인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