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탱크’ 박지성이 꿈의 무대에서 주연으로 떠올랐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 입단 후 4년 만에 챔피언스리그에서 시원한 골을 선보인 것. 그는 지난 6일 아스널과의 준결승에서 선제골을 넣으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퍼거슨 맨유 감독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박지성이 보여준 활약에 답했고 다가올 결승전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란 것을 시사했다. 박지성은 이로써 항간에 떠돌던 ‘위기설’을 깨부수고 당당히 주인공으로 거듭났다. 위기의 순간마다 어김없이 ‘한 방’을 보여준 그의 축구인생을 되돌아봤다.
챔피언스리스 준결승에서 선제골 넣어 팀 승리 견인
준결승 두 경기 골 넣어 골 결정력 부재 말끔히 해소
퍼거슨 감독, 강한 믿음 보이며 결승전 출장 가능성 시사
위기마다 발휘되는 진면목 또 한 번 나타나 축구팬 열광
“박지성이 맨유 이적 후 최고의 경기를 펼쳤다. 이번 결승전에서 박지성은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지난 6일 아스날과의 경기 후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은 박지성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박지성은 활약상에 비해 가장 과소평가를 받은 선수다. 올 시즌 맨유가 치른 중요 경기들을 보면 박지성은 항상 그 경기에 있었다”라며 다시 한 번 박지성이 팀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에 대해 역설했다.
두 경기 연속 골 행진
돌아온 ‘박지성’ 알려
퍼거슨 감독이 유례없이 박지성에 칭찬을 쏟아 부은 데는 이유가 있다. 부상 없이 올 시즌을 소화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던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박지성 부활에 서막을 알린 것은 지난 2일 미들즈브러와의 프리미어리그 정규리그 경기였다. 이날 박지성은 루니의 패스를 받아 환상적인 왼발 슛으로 골을 터트리며 팬들을 열광케 했다. 공간을 찾아내는 움직임이 돌아왔다는 것은 골 소식보다 더욱 값진 소득이기도 했다.
지난 6일 런던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서 그의 진가는 또 다시 발휘됐다. 이날 아스널과 2008-2009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2차전 원정경기에 선발로 나온 박지성은 전반 8분 선제골을 뽑아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전·후반 90분을 모두 뛴 박지성의 이날 경기 모습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호날두의 패스를 받아 오른발 슛으로 선제골을 터트린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후반 16분에는 호날두의 힐패스를 루니에게 연결하며 쐐기골을 뽑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날 박지성은 경기장 곳곳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며 날랜 몸놀림을 보여줬다. 맨유 선수 중 유일하게 선발출전한 모든 필드 플레이어와 패스를 주고받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경기를 주도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박지성이 챔피언스리그에서 득점을 올린 것은 2005년 7월 맨유 입단 후 처음이며 PSV에인트호벤(네덜란드) 소속이던 2005년 5월5일 AC밀란(이탈리아)과 2004-2005 시즌 4강 2차전(3-1 승)에서 선제골을 넣고 나서 4년 만이다. 올 시즌 4골, 맨유 유니폼을 입은 뒤로는 개인 통산 12호 골을 기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같은 눈부신 성과에 언론과 축구팬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영국 스포츠전문채널 ‘스카이스포츠’는 경기 후 “박지성의 골이 사실상 맨유의 결승 진출을 확정지었다”며 박지성에 평점 8점을 부여했다.
맨체스터 일간지 <맨체스터 이브닝뉴스> 인터넷 판은 촌평을 통해 박지성의 가치를 인정했다. 신문은 “박지성이 카를로스 테베스와 디미타르 베르바토프를 제치고 선발로 출전한 것은 놀랄 만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박지성은 8분 만에 침착하게 선제골을 터트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믿음에 화답했다. 루니에게 멋진 패스를 내줘 팀의 세 번째 골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날 경기장에서 맨유의 경기를 생중계한 맨체스터의 라디오 방송국 ‘Key 103’ 역시 박지성의 활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맨유의 전설’ 미키 토마스와 해설자 휴 페레이의 입에서는 전후반 90분 내내 박지성에 대한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전반 8분 박지성이 선제골을 넣자 “박지성의 골은 이곳 에미레이츠 경기장에서 1430㎞ 떨어진 로마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며 “지난 경기에 이어 저런 엄청난 골 마무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라고 중계했다.
후반 16분, 박지성의 발끝에서 시작돼 루니에서 호날두로 연결된 득점포가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박지성과 루니가 날카로운 패스로 호날두의 골을 넣었다.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들은 경기 종료 직전 박지성이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선보이자 “박지성이 90분이 거의 다 지나간 지금 이 시간에도 엄청나게 뛰어다니고 있다”며 극찬했다.
내친 김에 결승전까지
퍼거슨 감독 믿음 이어지나
이처럼 자신의 믿음에 골로 보답한 박지성에 대해 퍼거슨 감독은 ‘꿈의 무대’인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도 박지성이 뛸 수 있으리란 것을 시사했다. 오는 28일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결승전에 박지성을 출장시키겠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던 것. 만약 박지성이 이날 경기에 출전한다면 아시아선수로는 최초로 꿈의 무대에 서게 된다.
박지성은 지난해에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지만 아쉽게도 출전이 무산된 경험이 있다. FC바르셀로나와의 준결승에서 맹활약을 펼쳤음에도 첼시와의 결승전에는 대기명단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것. 당시 박지성은 출장이 무산된 데 대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고 퍼거슨 감독도 어려운 결정이었음을 내비쳤다.
그러나 올해 박지성이 보여준 모습은 퍼거슨 감독이 지난해와는 다른 선택을 하리라는 기대를 높이고 있다. 그동안 박지성에게 아쉬움으로 남아있던 ‘골 결정력 부재’가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산소탱크’라는 별명에 걸맞게 좌, 우, 중앙에서 뛰어난 위치선정 능력을 보이고 있고 빠른 스피드와 골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진 그가 골 결정력에서는 늘 부족한 면을 보였지만 이번 시즌에서는 전혀 다른 면모를 선보였다.
박지성 본인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꼭 출전하고 싶다는 의지를 서슴없이 보였다. 박지성은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두 골로 결정력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앞으로 꾸준히 보여줘야 한다”라며 “(결승전은) 나뿐 아니라 모두가 뛰고 싶은 경기다. 나도 뛰고 싶다. 일단 작년에 경기장에 설 수 없었기에 이번엔 경기장에 서고 싶다. 꼭 결승전에 나서고 싶다”고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이처럼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꿈의 경기 출장을 눈앞에 둔 박지성. 축구선수로서의 그의 인생 역시 한 방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닥쳐오는 위기를 극복하면서 한 단계 한 단계 꾸준히 나아간 결과물이다.
수원 세류초등학교 4학년 재학 당시 축구를 시작한 그는 차범근 축구상을 수상할 정도로 축구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였다. 그러나 축구선수를 하기엔 왜소한 체격은 늘 그를 따라다니는 콤플렉스였다. 각종 보양식을 챙겨 먹었지만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해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도 가벼운 훈련만 할 정도였다. 성장에 방해가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명지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2000년 올림픽 축구 대표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당시 올림픽 대표팀 허정무 감독의 눈에 띄어 올림픽 대표로 선발됐다. 또 그해 일본 J리그에 스카웃을 받고 연봉 5000만 엔과 주전급 대우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교토 퍼플 상가에 진출했다.
그리고 2002년, 박지성은 운명의 스승을 만났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대표팀 감독이었던 거스 히딩크가 바로 그다. 월드컵 4강 진출에 크게 기여를 한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유럽행 제안을 받았고 프리미어리그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박지성은 연봉 100만 달러를 받고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PSV에인트호벤으로 이적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선수생활이 그리 순탄치는 못했다. 부상으로 인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해 들쭉날쭉한 플레이를 펼쳤던 것. 이 때문에 홈팬에게조차 야유를 받을 정도에 이르렀고 플레이가 위축되는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
그러나 위기에 강한 박지성은 부상 치료 후 서서히 실력을 끌어 올려 발군의 기량을 보이기 시작했고 팀내 주요 선수로 발돋움했다. 이에 야유를 보냈던 에인트호벤 팬들이 ‘위숭 빠르크’라는 박지성 응원가까지 만들면서 달라진 그에게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박지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맨유는 2005 UEFA 챔피언스리그 16강전에서 AC 밀란에 2연패를 당하며 탈락했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PSV 에인트호벤 소속이었던 박지성은 AC밀란과의 4강 2차전 홈경기에서 불과 전반 9분 만에 순간적인 돌파를 통해 선제골을 기록했고 이것이 퍼거슨 감독으로부터 박지성 영입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박지성은 2005년 6월 맨유와 계약을 맺고 2005년 7월4일 입단식을 가진 뒤 등번호 13번을 배정받으면서 공식 입단했다.
그리고 2005년 7월23일, 홍콩에서 열린 홍콩 프로 선발팀과의 친선경기로 맨유 입단 후 첫 공식 경기를 가졌고 7월26일 중국에서 열린 베이징 현대와의 친선경기에서 데뷔 골을 넣었다.
입단 당시만 해도 기대의 시선 이면에 후보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시선도 함께 받았던 박지성은 첫 번째 시즌을 성공적으로 보내게 됐다.
그러나 계속된 부상이 그의 질주를 가로막았다. 2006년 9월10일 토트넘 홋스퍼FC와의 경기에서 얻은 부상으로 수술을 했고 2007년에도 무릎 부상으로 또 한 차례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2008년 3월, 박지성은 풀럼FC와의 원정 경기로 돌아와 폴 스콜스의 크로스를 헤딩으로 받아 넣으며 2007-2008시즌 첫 득점을 기록했다. 또 그해 4월6일, 미들즈브러 FC와의 원정 경기에서 웨인 루니에게 결정적인 동점골 어시스트를 함으로써 맨유를 패배의 위기에서 구출했다.
특유의 성실함
위기극복 도와
같은 해 4월9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다시 선발 출장한 박지성은 엄청난 활동량을 보이며 공격은 물론 수비에서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써 맨유는 4강에 진출했고 박지성은 아시아선수로는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얻었다.
그리고 준결승전 두 경기에 모두 선발 출장해 결승을 이끌었으나 결승전에 출장하지는 못했다. 이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나서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올해 결승전에서 그를 볼 수 있을지 없을지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위기의 순간을 특유의 성실함과 노력, 그리고 축구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극복한 박지성. 그의 발끝에 국민들의 시선과 희망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