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고 장자연 자살 사건과 관련해 형사처벌 대상에 오른 인사는 5명 이상인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처벌 대상자 가운데는 이른바 ‘장자연 문건’에 등장하거나 장씨 유족에게 고소당한 신문사 대표 등 유력 인사는 대부분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조금이나마 정화가 되길 기대했던 연예계 일각에선 ‘2002년 연예계 비리 사건과 비슷한 전철을 밟는구나’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조현오 경기지방경찰청장은 지난 4월15일 기자간담회에서 “이번 사건 수사는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고 있지만 수사 대상자 대부분이 유력 인사들로 자기방어를 강하게 하고 있어 매우 힘든 게 사실이다”라며 “다만 장씨 소속사 관련 연예계 비리 쪽은 수사 결과 처벌 대상자가 한두 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조 청장의 발언은 처벌 대상자가 연예기획사 임원들이나 드라마 감독(PD)들에 한정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조 청장은 이어 “유력 인사 가운데는 ‘혐의를 입증할 만한 근거를 갖고 오면 조사에 응하겠다’는 식으로 버티는 사람도 있다”며 “반대로 일부는 ‘빨리 수사를 끝내 명예를 회복해 달라’고 요구하는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이날 “연예계 비리로 처벌 대상에 오른 사람은 5명 이상이다”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어 “성상납 강요 등과 관련해 수사 대상에 오른 인사들에 대해 통화내역은 물론 당일 행적까지 모두 조사를 마쳤다”며 “이 가운데 일부는 장씨와 술자리를 하거나 식사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이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버티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특히 일본으로 도피한 장씨 소속사 대표 K씨의 국내 송환이 이뤄질 때까지 유력 인사 관련 수사를 사실상 중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장자연이 자살한 지 20일로 45일째다. 그동안 경찰은 41명의 대규모 수사팀을 투입해 최소 20곳을 압수수색하고 60명이 넘는 참고인을 조사했다.
그 결과 경찰이 형사 입건한 사람은 장씨의 전 매니저인 유장호씨 한 명뿐이다. 유씨는 이른바 ‘장자연 문건’ 작성에 깊숙이 개입하고도 수시로 말을 바꿔 경찰 스스로 “죄질이 나쁘다”고 밝힌 인물이다.
그러나 경찰은 유씨에 대해 구속영장은 신청조차 못했다. “장씨의 소속사 대표 K씨가 일본에 있어 사실 관계 확인이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나머지 수사 대상자들의 경우 혐의를 밝히지도 못하고 혐의가 없다고 밝히지도 못하면서 시간만 보내고 있다. 때문에 경찰 안팎에서는 “지난 한 달간 수사팀이 뭘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경찰 고위 관계자는 “사실상 수사 착수 때부터 예상됐던 결과”라고 했다. 일본에 있는 K씨를 데리고 오는 것이 사건 해결의 관건인데 여기에 실패한 이상 수사가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찰은 수사에 착수할 당시 이번 사건을 ‘국민적 의혹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반드시 의혹의 실체를 밝히겠다고 했다. 경찰은 그러나 사건의 핵심인물인 K씨에 대해선 과연 붙잡을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발언을 한 달 내내 되풀이했다.
“K씨와 연결이 안 된다”(3월16~22일)→“도쿄 주재관이 열심히 뛰고 있지만 아직 못 만났다”(3월25일)→“K씨가 경찰 전화만 안 받는다”(3월29일)→“아직 접촉하지 못했다”(4월1일)→“도쿄 주재관이 뛰고 있으나 검거 가능성은 자신할 수 없다”(4월9일)는 식이었다.
처벌 대상자는 연예기획사 임원들이나 드라마 감독들에게 한정될 것임을 시사
소속사 대표 K씨 국내 송환 이뤄질 때까지 유력 인사 관련 수사 사실상 중단
경찰 내부에선 “K씨와 연락하고 있는 인사들을 조사하면 충분히 K씨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수사관과 현지 주재관이 정보를 공유하며 적극적으로 뛰면 얼마든지 K씨의 소재를 알아내 일본 경찰에 제보하고 K씨가 조기에 소환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수사팀은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다”는 말만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찰이 K씨를 못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안 데려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K씨가 연예기획 사업을 하면서 각계 유력 인사들과 광범위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K씨의 네트워크가 K씨의 보호막으로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경찰의 수사와 언론의 취재를 통해 드러난 K씨의 인맥은 연예계와 광고주, PD와 언론계 등 예상할 수 있는 활동범위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사건이 이쯤 되자 연예계 일각에선 이번 사건을 2002년 연예계 비리 사건에 빗대어 ‘몸통은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고 있다.
2002년 7월10일 서울지검 강력부는 연예인과 정·관·재계 유력 인사들의 부적절한 관계를 수사했다. 검찰은 주요 연예기획사 4곳을 전격 압수수색하며 연예계 비리 수사에 나서 기획사 대표와 방송사 PD, 스포츠지 기자 등 20여 명을 구속하고 30여 명을 불구속 기소하는 등 강도 높은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수사 1개월 보름 만인 8월24일 수사는 종결됐다.
한 매체는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으로 수사를 지휘했던 김규헌 서울고검 검사와의 인터뷰에서 “수사 내내 유무형의 외압이 엄청나게 많았으나 수사 강도를 줄이지 않자 갑자기 충북 충주지청장으로 발령이 났다. 이 때문에 성상납을 비롯한 추가 수사도 모두 중단됐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인 K씨도 내사대상이었다. 김규헌 검사는 “업계에서 ‘K씨가 너무 공격적이어서 업계 물을 흐려놓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기억했다. 당시 K씨는 홍콩으로 달아나 수사망을 피했다.
당시 K씨의 최측근이었던 A씨도 “K씨는 수사에 들어가자 홍콩으로 도피했다. K씨는 다른 기획사에서 연예인을 빼돌리는 것은 기본이고 연예 기획자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을 많이 했다. 이 바닥에서는 속된 말로 ‘삼류 양아치’라고 불렸다”고 말했다.
A씨는 이어 “K씨는 정치권과 재벌 2세, 기업체 대표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K씨를 홍콩으로 도피시키고 도피 자금도 대준 것도 그들로 안다. K씨는 홍콩에서 호텔에 머물며 호화생활을 즐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A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K씨는 정·재계에 전방위 로비를 했다는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A씨는 K씨가 3국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A씨는 “경찰 수사가 이렇게 늦어지고 있는데 일본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위조 여권이라도 만들어 다른 나라로 도피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7년 전과 마찬가지로 K씨는 일본에서 수사를 피하고 있다. K씨의 업계 내 위상과 각계에 걸친 인맥은 과거보다 훨씬 커졌다.
K씨의 주변에선 “그의 인맥은 전방위적이다”라는 말까지 나온다. K씨와 관련을 맺은 각계 유력 인사들이 K씨가 들어와 입을 열 경우 유탄이 튀는 것을 우려해 이런저런 경로로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것 아니냐는 추론이 가능한 것이다.
7년 전 검찰과 달리 지금의 경찰이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