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과 매니지먼트 관리에 관한 제도 마련이 시급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지난 3월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신인 탤런트 장자연이 죽기 직전 작성한 글의 일부다. 짧은 이 문장을 통해 장자연이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신인 배우로서 모종의 일들로 상당히 고통을 받았던 심경을 엿볼 수 있다.
과연 한국 연예계에서 신인들이 겪는 고통은 무엇일까. 크게 개인적인 부분과 구조적인 부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개인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가장 큰 신인들의 고통은 연예인으로서 성공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정신적인 불안감, 무명으로의 전락의 우려 등이다.
연예인을 옥죄는 것은 초조함. 즉 인기에 대한 불안감이다. 연예인은 인기를 먹고사는 존재다. 한 방에 대박 나고 한 방에 박살나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설사 이번에 잘됐다 하더라도 다음번에도 성공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신인일수록 더하다. “거기에서 오는 압박감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누구나 스타는 될 수 있지만 아무나 스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연예인 지망생과 신인들은 스타의 꿈을 키우며 연예계에 진출한다. 하지만 스타로 대변되는 연예계에서의 성공은 극소수에 달한다.
한 연예관계자는 “노력을 한다고 그렇다고 실력이 있다고 모두 스타로 성공한 것이 아니다. 출연기회를 담보 받을 수 없는 등 불안한 미래와 성공의 희박성으로 인해 초조함이나 고통들이 신인들에게 엄습한다”고 전했다.
신인들이 연예계 초창기 출연기회를 잡지 못하는 기간이 상당부분 흐르면 좌절과 절망에 빠지는 고통을 겪는다. 그리고 이 때문에 무명으로의 전락을 우려하게 된다. 무명생활은 스타나 연예계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신인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일 수 있다.
오랜 무명생활을 거쳐 스타로 부상한 K씨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민을 떠나려고까지 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고통을 토로한 적이 있다.
출연기회가 없고 수입창출력이 떨어지는 신인들은 이 때문에 초래되는 경제적인 고통도 엄청나다.
한 연예관계자는 “많은 연예인들이 연예계에 활동하고 있지만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인해 생계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은 스타로의 성공이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라고 전했다.
구조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 부분이 연예기획사와의 불공정 계약이 고통이다. 연예인 지망생이나 신인들과 연예기획사가 계약을 할 때 수입, 출연 및 스케줄 관리 등에 있어 불평등한 계약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신인들에 비해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갑의 위치의 일부 연예기획사가 신인들에게 가혹한 계약을 체결해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초래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A 기획사의 계약서에는 ‘을(연예인)의 모든 활동은 갑(기획사)의 승인·통제 아래하며 갑의 의견이 우선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연예 활동과 관련해 연예인이 아무 것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없고 무조건 기획사가 시키는 대로 따르도록 한 것이다.
‘병역·이성교제·학업·경제활동 등 사생활을 항상 사전에 기획사와 상의하고 지휘·감독에 따르도록 한다’, ‘위치를 항상 기획사에 알려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B 기획사는 신인 가수와 계약하면서 ‘기획사가 계약해지 의사를 통보하면 음반판매 수입을 연예인에게 지급할 의무를 면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음반을 만들어 놓고도 기획사가 ‘계약을 해지하자’고 한마디만 하면 그 뒤부터 판매금은 모두 기획사가 챙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표준계약서조차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는 사례가 비일비재한 상황에서 일부 신인들에게 불공정한 계약은 엄청난 족쇄로 작용하고 법정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방송사나 영화사 등의 캐스팅 시스템 또한 신인들에게 고통을 초래한다. 거대기획사의 스타 출연을 볼모로 신인들을 ‘끼워 팔기’식으로 출연을 시켜 원래 출연을 보장받았던 작품에서 다른 신인들이 배제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는 등 캐스팅을 둘러싼 시스템적인 문제도 상당수 신인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고통을 야기시킨다.
한 소형 연예기획사 대표는 “누가 봐도 실력 없는 배우가 단지 제작사 소속 혹은 톱스타와 같은 소속사기 때문에 캐스팅된 게 뻔히 눈에 보이면 다른 배우들 기분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상황이 이렇다보니 보다 많은 기회를 잡기 위해 대형 기획사나 매니지먼트로 신인이 몰리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결국 영세 연예기획사는 더 힘들어진 상황이다”라고 덧붙였다.
한 연예관계자는 “한국 연예계에서 신인들이 겪는 고통은 여러 가지 문제점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발생한다”며 “연예인을 발굴 육성하는 스타 시스템의 차이가 있는 미국과 일본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미국은 영화나 드라마 제작과 연예인 관리를 겸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국내는 아니다. 때문에 제작과 매니지먼트 관리에 관한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 더불어 투명한 캐스팅을 위한 관계자들의 노력도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