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중(1월21일), 김준(1월22일), 김범(2월1일·9일), 구혜선(2월27일) 등 드라마 <꽃보다 남자> 주인공들이 연이어 교통사고가 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줄줄이 이어지는 사고로 인해 전반적인 한국 드라마 제작환경의 문제점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한류의 영향과 영상 콘텐츠의 수요 폭발로 외주제작사가 급증을 넘어 난립하고 있는 가운데 외주 제작사의 드라마 방송은 방송 인력과 인프라 확충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은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국 드라마의 질을 저하시키고 방송제작 환경을 열악하게 만드는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멜로드라마의 대가이자 스타 PD로 각광받는 A PD는 “드라마 제작 환경이 더욱 열악해지고 있어 안타깝다”는 탄식 섞인 말을 했다.
일주일에 쉬는 날 하루…하지만 촬영 밀리면 대기해야
학교 ‘대구’·죽집 ‘서울’…촬영 이동거리 먼 것도 문제
<꽃보다 남자>는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의 병폐로 지적되는 초치기 제작 즉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드라마’라는 비판을 받을 만한 당일치기식 제작으로 큰 문제를 야기했다. 구혜선 사고로 이틀 동안의 촬영분량 펑크로 급조된 스페셜로 대체해야 하는 현실은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미니시리즈의 경우 대본은 최소 일주일 전에 나오는 게 정상이다. 정상적인 드라마 제작을 위해선 연출자, 출연자들의 준비를 위해 최소한의 사전 제작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다.
시간에 쫓기는 제작 빈번
하지만 심지어 촬영 직전에야 연기자가 대본을 받아드는 당일치기 제작이 오히려 심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방송을 불과 몇 시간 남겨두고 끝나는 촬영도 태반이다. 한류열풍을 이끌고 있는 한국 드라마가 태어나는 촬영현장은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전쟁터에 가깝다. 방송을 불과 하루 앞두고 진행되는 드라마 촬영현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다.
<꽃보다 남자>에 출연하는 모 배우 매니저 A는 “일주일에 공식적으로 쉬는 날은 하루다. 하지만 촬영이 밀리면 대기를 하다 촬영에 임해야 하기 때문에 쉬는 날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거의 생방송으로 촬영하고 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모두 다 힘든 상황”이라고 전했다.
국내 배우들이 늘 드라마 보다 영화를 고집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너무나 빡빡한 일정 탓에 자신이 무슨 연기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찍는 경우도 다반사다.
외주제작사의 경우 사전 제작을 하고 싶어도 편성이 확정되기 전 제작을 시작할 수 없는 게 대부분 현실이다. 편성과 캐스팅, 작가 섭외를 끝내면 첫 방송이 채 2주도 안 남아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 방송 제작 관계자는 “기본적으로 마음의 여유도 시간도 없다. 작가들의 대본이 ‘쪽대본’을 넘어 휴대폰으로 불러주는 ‘줄대본’까지 나올 정도로 너무 늦게 전달된다”며 “때문에 시간에 쫓겨 제작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털어놨다.
<꽃보다 남자>가 다른 드라마보다 교통사고의 위험 요소가 많은 또 다른 이유는 장거리 이동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 드라마들은 정해진 세트장이나 공간들을 일정부분 최대한 활용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사극 같은 경우는 주로 민속촌이나 전통세트장에서 촬영이 진행되고 필요에 따라 장소가 약간씩 변형되는 형식으로 상대적으로 이동거리가 줄어든다.
물론 현대극의 경우도 그렇다. 서울 변두리 지역이나 경기도 주변을 벗어나지 않도록 세트를 만들어 최대한 시간을 단축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는 촉박한 드라마 제작 환경에 그만큼 용이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보다 남자>는 이동거리가 너무 멀다.
일단 <꽃보다 남자>의 주무대가 되는 학교가 대구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금잔디가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죽집 촬영장은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해 있다. 쪽대본이 나오는 상황이라면 대구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 학교에서 촬영분을 모두 끝내 놓고 늦은 시간에야 서울로 향해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서울에서도 용산, 홍대 주변 등 다양한 장소를 돌아다니고 파주의 레저타운에서도 촬영을 했으며 경기도 화성에 세트장이 있고 필요하면 뉴칼레도니아나 마카오 같은 해외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해외 촬영분만큼은 사전제작이었지만 해외 촬영분조차도 드라마 환경을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방송관계자는 “초반에 시청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해외로 날아간 후 엄청난 물량과 시간이 투입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나머지 촬영분에 힘이 빠지게 되고 제작일정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 같다”며 “또한 그런 제작환경은 드라마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드라마 촬영에는 엄청난 지장을 줬다고 본다”고 말했다.
팬 관리에도 문제점이 나타났다. 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며 대구 촬영장에는 수천명의 인파가 물리고 있다. 일단 촬영을 끝마친 상황이면 현장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음 촬영에 들어가야 하지만 현장에 모인 팬 통제를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촬영이 지연되고 출연진과 매니저들의 피로도는 당연히 증가한다.
결국 생방송 촬영, 장거리 이동, 해외 촬영, 팬 관리 등 등이 출연 배우들의 교통사고를 초래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장거리 이동 등 문제
한 시청자는 “시청률에 지나치게 목을 매게 됨에 따라 이런 결과가 초래됐고 결국 구혜선은 촬영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는 상황에까지 몰렸다. 이렇게 되면 <꽃보다 남자> 측은 반성해야 한다”며 “이렇게 주요 출연진들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결코 우연만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 볼 수 없다. 아직도 시청률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제작환경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런 단편적인 성공의 잣대가 사라져 질 높은 드라마를 보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