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억울하게 희생된 '인혁당 8인'

  • 김민석 ideaed@ilyosisa.co.kr
  • 등록 2012.09.18 13: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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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년 지났지만…그들은 눈을 감지 못했다

[일요시사=김민석 기자] '인혁당 사건'을 두고 박근혜 후보가 적절치 못한 발언을 해 온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 빌미를 잡은 민주통합당은 총공세를 펼치고, 새누리당은 우왕좌왕 맥을 못 추고 있다. 정작 박 후보는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듯 일언반구 사과 한마디 없이 희생자 유가족을 만나고 싶단다. 인혁당 사건은 도대체 어떤 사건이기에 이토록 후폭풍이 큰 걸까. 그리고 '인혁당 희생자 8인'은 도대체 무슨 죄목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걸까.

지난 10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5·16쿠데타와 유신체제에 대해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데 이어 지난 12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인혁당 사건'을 두고 "대법원에서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같은 대답을 반복해 그 여파가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민주통합당은 절호의 기회를 놓칠세라 인혁당 사건의 당사자인 유인태 의원이 앞장서며 총공세를 폈다. 유 의원은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눈물을 흘리며 "대법원의 판결이 두 개라니,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어떻게 그런 말이 있을 수 있나"라며 포문을 열었다. 이어 "박 후보는 아직도 인혁당 사건의 무죄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결국 아버지의 유신도 잘한 일이고, 빨갱이로 누명을 씌워 사형 집행한 것도 잘했다고 하는 인식이 내면에 깔린 것 아니냐"며 직격탄을 날렸다.

유신체제도 잘한 일
사법살인도 잘한 일

민주당 지도부도 일제히 박 후보의 인혁당 발언을 문제 삼았다. 이해찬 대표는 지난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을 유신정권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한 조사 결과를 내놓았을 때, 당시 박 후보는 "가치 없는 모함"이라고 말했다며 "이런 역사인식을 갖고 감히 대통령이 되려고 하냐"며 힐난했다. 이종걸 최고위원도 "사법살인이 자행될 때 박 후보는 퍼스트레이디의 직무를 수행했다"며 꼬집었다.

반면 새누리당은 박 후보의 발언을 놓고 두 가지 반응을 표출했다. 역사적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박 후보를 감싸는 목소리가 동시에 나온 것. 또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은 박근혜 후보의 발언을 두고 사과했지만 정작 박 후보 측은 사과한 적이 없다고 밝히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 12일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에서 "박 후보의 표현에 일부 오해 소지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며 "박 후보는 유신체제의 그늘 속에 있었기에 역사 관련 발언이 미흡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친박 내부에서도 비판이 나왔는데 대선캠프 한 관계자는 "5·16은 논란이 될 수 있지만, 유신과 인혁당 사건은 논란이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역사인식 논란에 휩싸인 당시 '퍼스트레이디'
유신 "역사적 판단에" 인혁당 "판결 두 가지"

반면 박 후보의 발언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특히 이한구 원내대표는 오찬간담회에서 "다들 배가 부른가 보다. 민생 때문에 난리인데"라고 말한 데 이어 "딴지를 걸려고 하는 것까진 좋은데 정정당당하게 해야지"라고 말해, 대선후보의 법과 역사 인식에 대한 문제 제기를 '딴죽'으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인혁당 사건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박 후보의 말 몇 마디에 이리도 큰 후폭풍이 불게 된 걸까?
문제가 된 제2차 인혁당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1972년 12월 유신체제 발족과 1973년 8월 8일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1973년 10월 항쟁을 시작으로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이 본격화됐다.

1974년 4월3일 저녁, 박정희 전 대통령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이라는 지하조직이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해 인민혁명을 기도한다'는 요지의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했다.

감히 딴지를…
배가 불렀구먼!

4월25일,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사건 수사상황발표에서 민청학련을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학생을 주축으로 한, 정부를 전복하려는 불순 반정부세력'으로 규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긴급조치 제4호 및 국가보안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1024명이 체포되고, 그 중 253명이 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되었다.


1974년 7월11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재판부는 군 검찰부가 구형한 그대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21명 중 서도원, 도예종 등 8명에게는 사형,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 피고인 6명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하였고 1975년 4월8일 상고를 기각한 채 판결을 확정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8명에 대한 사형 판결이 확정된 지 불과 18시간 만에 형을 집행해 버린 것. 그 외에도 복역 중 사망한 장석구,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전재권, 유진곤 등 많은 사람들이 인혁당 사건에 연루돼 목숨을 잃었다. 

시간이 흘러 오늘날 인혁당 사건은 국가가 법으로 무고한 국민을 죽인 사법살인 사건이자 박정희 정권 시기에 일어난 인권 탄압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2005년 12월에 이르러 재판부는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심 소를 받아들여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같은 해 8월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시국사건 사상 최대의 배상액수인 637억여 원(원금 245여억 원+이자 392여억 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렇다면 인혁당 사형수 8인은 무슨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걸까?

오늘날 인혁당 희생자 8인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행히 인혁당 사형수 8인이 수감돼 사형될 때까지 바로 옆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던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이었던 전병용씨가 기록을 남겨 두어 인용하고자 한다. 전병용 교도관은 인혁당 사건의 조작성을 폭로하면서 세상을 뒤흔들었던 김지하 시인의 '고행...1974'라는 글을 감옥 밖으로 빼내기도 했다.

고문, 날조… 확정 판결 다음 날 새벽 사형 집행
박정희 정권 유지용…국가가 국민 죽인 사법살인

1975년 4월9일의 희생당한 8인의 이름과 신상은 다음과 같다.

▲서도원 : 1923년 경남 창녕 생,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민주민족청년동맹 위원장.

하재완 : 1932년 경남 창녕 생, 건축업, 중사 제대, 경북민족자주통일협의회 참가.

도예종 : 1924년 경북 경주 생, 삼화토건 회장, 대구대경제학과 졸,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

이수병 : 1937년 경남 의령 생, 삼락일어학원 강사, 경희대경제학과 졸, 민족통일연맹 위원장, 민족일보 기자.

김용원 : 1935년 경남 함안 생, 경기여고 교사, 서울대물리학과 졸, 민족통일연맹 참가.


우홍선 : 1930년 경남 울산 생,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이사, 육군 대위 예편,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

송상진 : 1928년 경북 대구 생, 양봉업, 대구대경제학과 졸, 교원노조활동 및 민주민족청년동맹 사무국장.

여정남 : 1944년 경북 대구 생, 경북대 학생회장, 경북대정치외교학과 졸, 3선개헌·유신헌법 반대투쟁.

당시 이들을 사형으로 몰아갔던 박 전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의 시나리오에 의하면 인혁당 중심인물인 서도원, 도예종 등은 경북대 졸업생 고 여정남에게 폭력에 의한 전부 전복을 선동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등 전국 대학생 조직 '민청학련'을 결성토록 지령을 내렸다는 죄목이었다.

하지만 재판과정을 들여다보면 이는 모두 날조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또 2003년 의문사위원회 2005년 국정원 진실위에 의해 인혁당 사건 공작의 전모가 밝혀졌고 2007년 인혁당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확정됐다. 당시 국정원 진실위는 인혁당에 대해 '유신체제 등장을 전후해 정세인식과 통일운동에 대해 토론하는 서클 수준'으로 판단했다.

전기고문, 조서날조
…이유 없는 사형


재판 당시 경북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고 이강철씨는 법정에서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차례나 받았다"라고 또렷또렷한 목소리로 증언했으며 도예종씨는 상고이유서에서 "4월20일에서 25일까지 철야조사를 받았고 검사에게 중앙정보부 조서가 사실과 다르다고 부인하면 즉시 중앙정보부로 또 불려 가 고문을 당하며 조서를 다시 작성했다"고 말했다.

고 하재완씨는 상고이유서와 항소이유서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탈장됐으며 폐농양이 생겨 취조관이 시키는 대로 조서가 작성됐다"고 기술했고 고 김용원씨도 "중앙정보부에서 수사관들이 미리 진술서를 가지고 와 베껴 쓰라고 해 거부했더니 몽둥이질을 했다"고 말했다.  

고 우홍선씨는 재판장에서 "고문을 할 때는 3층에서 떨어져 죽고 싶었으며, 두 번만 더 (전기고문을)돌리면 심장이 파열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고 말했고 전창일씨는 "며칠간을 잠을 재우지 않으면서 수사관이 5, 6명씩 번갈아 드나들면서 죽음의 직전까지 끌고 갔으며, 온몸을 쥐어짜는 전기고문을 하여 몇 번씩 실신케 하였으며, 검찰에 넘어와서도 나는 무죄라고 주장하니 다시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 전기고문을 가했다"고 진술했다.

고문뿐만 아니라 공판조서를 날조해서 작성하기도 했다. 고 이수병씨의 공판조서 중 408쪽을 보면 "피고인 등이 모여 어떠한 조직과 결의를 하였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분명히 "그런 사실이 없다"고 대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공판기록에는 "네, 혁신계 동지들을 규합, 과거 인혁당과 같은 통일적 조직을 하여 대정부 투쟁에 합의하고, 4인 지도부를 조직 구성하여 활동상황을 조정하였습니다"로 되어있다. 또 "피고인 등 4인 지도부 정기회합은 매월 첫 일요일 10시로 정하고 지도위원에 도예종, 서도원을 추대하였다는데 사실인가"에 대하여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분명히 진술했는데, "네, 사실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되어있는 것. 또 고 도예종씨가 "조국이 하루빨리 적화통일 되기를 바란다"고 최후진술(유언)을 남긴 것을 두고 국정원 진실위는 최후진술조차 조작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내 남편, 내 아들, 우리 아버지 살려내라!"
빨갱이 가족으로 살아온 유족들의 피눈물

이처럼 고문으로 얻은 진술과 날조된 조서를 근거로 재판이 진행된 것이다. 이에 고 이수병씨는 사형 집행 직전 교수대 앞에서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한 것밖에 없고,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것밖에 없는데 왜 억울하게 죽어야 되느냐. 반드시 우리의 이번 억울한 희생은 정의가 밝힐 것"이라고 외쳤다.

다른 인혁당 사건 희생자들 역시 왜 자신이 사형당해야 하는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최후진술을 해야 했다. 최후진술에서 유진곤씨는 "나는 80년대 수출목표를 달성하느라 열심히 일하고 있다. 젊은 기업인의 장래를 막지 마라"라고 말했고 김한덕씨는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 모르겠다. 이유가 있다면 연행되기 전날 유진곤과 같이 술을 마셨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행되기 전 희생자들의 활동을 살펴보면 물론 4·19 직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혁신계 조직인 민족민주청년동맹, 민족통일학생연맹 등과 진보적 색채의 신문이었던 '민족일보' 등에서 활약했던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고 이수병씨의 경우 4·19 당시 경희대 민족통일연맹 위원장으로 있었으며, 논문 '만적론'의 필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 5·16쿠데타 후 혁명재판에서 15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7년 동안 복역했다.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과 민청학련을 연관시키기 위한 중간다리로 끼워 넣은 고 여정남씨도 경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6·3 사태 당시 학생 시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고 김용원씨의 경우 단지 이수병씨의 친구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희생당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서울대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자연과학도로서 정치적 이유보다는 이수병씨가 고등학교 동창이었기에 여러 차례 돈을 빌려줬고 모임에도 몇차례 참가했다. 그런데 이것이 혹독한 고문에 의해 조직자금으로 둔갑한 것이다.

희생자 8인 유족들
시체 확인도 못 해

이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975년 4월9일 아침, 서대문구치소 앞은 느닷없는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시체라도 찾기 위해 몰려온 희생자의 가족들에 그야말로 통곡의 바다였다. 당시 신부의 옷깃을 부여잡고 "신부님 안 죽을거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죽었지 않아요?"하고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이 유족들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가족의 시체마저 찾지 못했다. 시체는 벽제화장터(현 서울시립 승화원)로 강제로 이송되더니 유족들의 마지막 확인도 없이 화장돼 버렸다. 그일 이후 유족들은 재심 무죄판결이 나오기까지 빨갱이의 아내이자 자식들이라고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면서 평생을 숨죽이고 살아왔다.

2012년 9월 박 후보의 짧은 생각에서 나온 몇 마디 발언은 희생자 유족들이 1975년 구치소 앞에서 외쳤던 37년 전 구호를 다시 외치게 만들고 있다. "내 남편, 내 아들 살려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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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