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KBS 2TV 수목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 번> 제작발표회에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날 오후 1시 제작발표회가 시작되자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연기자인 박상원, 최명길, 전인화, 박예진, 정겨운 등이 무대에 오르고 이들을 향해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가 터졌으나 기자들이 “현장에 있는 KBS 출입기자들은 지금 나갑시다”라는 말과 함께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는 KBS가 최근 실시한 출입기자 신·본관 출입 통제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취재를 거부한 것. KBS 출입기자들이 방송사 측에 항의하며 집단으로 취재를 거부하며 단체 행동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KBS 측 “홍보팀 거치지 않으면 취재 제한 있을 수 있다”
취재 제한 조치에 항의…“취재 자유 수호는 기자의 의무”
KBS는 지난 1월19일 오전 KBS를 출입하는 언론사 기자들의 휴대폰으로 ‘홍보팀을 거치지 않으면 취재 제한이 있을 수 있습니다’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KBS 측은 사무실과 기자실 등이 본관에서 자료동 건물로 이전함에 따라 기자들이 기존 출입증으로 신관 출입을 할 수 없게 됐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밝혔다.
실제 사무실 이전이 시작된 지난 1월18일부터 출입기자들은 신·본관을 단독 취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기존 출입증으로 기자실이 있는 자료동 이외의 곳은 출입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KBS 측의 한 관계자는 “홍보팀의 안내를 받으면 어떤 취재라도 예전과 다름없이 지원되기 때문에 취재 제한이 아니다. 신?본관을 그냥 열어두면 자칫 생방송 등이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에 이 같은 방법을 도입한 것 뿐”이라고 해명했다.
“취재 접근권 박탈” 반발 일어
하지만 KBS의 이번 조치에 대해 일부 출입기자들은 “공영방송인 KBS가 기자들의 취재 접근을 박탈했다”고 반발했다.
일부 출입기자들이 KBS의 조치를 취재 제한으로 보는 이유는 기존 방식대로 출입증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방송 스튜디오와 주조정실 등 주요 방송 시설의 접근은 불가능하는 것.
한 출입기자는 “KBS는 공공기관이기에 외교부와 같은 엄격한 취재 통제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강변했지만 반대로 공영방송이기에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더욱 더 방송사의 문은 열려 있어야 한다”며 “외교부도 현재 출입기자들로 하여금 공용 패스카드를 이용해 대부분의 청사 내부 취재를 허가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이런 상황에서 KBS의 이번 취재 제한 조치는 참여정부가 기자실을 통·폐합하고 정부 청사의 출입을 막아 언론사의 취재를 제한해 논란이 된 ‘언론 길들이기’의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며 “사회 통합과 소통에 앞장서야 할 공영 방송사가 오히려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시대를 역행하는 취재 시스템을 출입 기자들과의 의견 조율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KBS의 이번 조치가 비판적 기사를 막기 위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한 방송관계자는 “정연주 전 사장 사태 이후 다시 사원 중징계로 떠들썩해지자 KBS가 비판적 기사가 나오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기자들의 출입을 제한한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전했다. 일부 기자들은 “KBS가 노무현 정부 당시 문제가 됐던 ‘취재 선진화 방안’을 재현한 것이다”라며 성명을 내는 등 공동대응할 방침도 밝혔다.
KBS 출입기자들은 <미워도 다시 한 번> 제작발표회에서 성명을 통해 “‘제작발표회 취재 보이콧’이라는 직접 행동을 택해야 하는 우리의 심정은 씁쓸하다. 이로 인해 본의 아니게 불편함을 끼칠 제작진이나 연기자들에게는 유감이다. 독자와 네티즌들께도 양해를 구한다”면서 “그러나 취재의 자유 수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자들의 권리이자 의무다. 우리의 의지를 담아 취재 통제 조처를 반대하는 단호한 행동에 돌입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들은 “취재 통제에 반대하는 우리 출입기자들은 강선규 홍보팀장 면담을 통해 KBS의 이번 조처가 얼마나 근거가 없는 것인지 다시 확인했다”며 “KBS 측의 논리는 한마디로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대화를 통한 합의조차 거부하면서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또 “KBS는 계속 ‘중요 방송 시설의 보호’가 이번 취재 통제의 이유라고 계속 주장했다”며 “그러나 출입기자들에게 기존에 지급됐던 출입증으로는 이런 시설에 이미 들어갈 수 없다. 또 무단으로 출입한 일조차 없다”고 반박했다.
이들은 이어 “KBS는 더 이상 불합리한 논리와 억지 논리로 취재 통제 조처를 고집하지 말라. 즉각 철회하고 대화에 나서라”면서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이번 취재 보이콧에 이어 제2, 3의 직접 행동에 들어갈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고 덧붙였다.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나온 기자들은 KBS가 취재 통제를 고집할 경우 향후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KBS 관련 기사 전면 보이콧, KBS의 홍보성 기사 발행 자제, 기사 하단에 항의의 입장 게재 등이 논의됐으며 기자들은 각 회사와의 논의를 거쳐 이중 하나를 택해 직접 행동에 나갈 예정이다.
KBS 취재 보이콧
한 출입기자는 “KBS 출입기자들의 취재 보이콧은 방송사 측의 과도한 취재 제한에 강력하게 대응하고 언론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됐다. KBS 출입기자들의 취재 제한 철회 요구에 방송사 측은 여전히 ‘철회는 없다’는 고자세로 일관하고 있다”며 “하지만 KBS 측이 최근 단행한 이 같은 취재 제한 시스템이 ‘과연 누구를 위한 제도냐’라는 점에서만큼은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