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격 인터뷰> 영화 ‘내가 죽던 날’ 신예 박지완 감독의 뚝심

[일요시사 취재2팀] 함상범 기자 = 국내에는 상업영화 흥행공식처럼 따라다니는 것들이 있다. 먼저 이야기의 전개 속도가 빨라야 하며, 카체이싱처럼 화려한 볼거리가 동반되면 더 좋다. 인물 간의 갈등은 자극적인 소재일 때 더욱 끌리고, 배우들이 연기할 때 감정선도 진폭이 클수록 관심을 받는다. 엔딩은 힐링이나 위로보다 복수로 마무리돼야 더 짜릿하다. 이런 부분에 충실했을 때 흥행 요소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신작 <내가 죽던 날>은 앞서 언급한 흥행 요소를 철저히 피해갔다. 느린 속도감에 화려한 장면은 거의 없다. 충분히 자극적인 요소를 앞세울만한 소재도 깔아놓았는데, 활용하지 않는다. 배우들의 감정선도 전반적으로 절제돼있다. 주인공의 눈을 따라 사건으로 들어가는데, 도착점은 인물들의 깊은 감정이다. 새로운 화법의 이 영화가 강조하는 메시지는 위로다. 

흥행 요소를 비껴간 <내가 죽던 날>은 엄청난 여운을 남긴다. 사건 중심에서 인물 중심으로 변주하는 화법이나 인류애가 느껴지는 메시지, 배우들의 절제되고 차분한 연기, 존중과 배려가 담긴 연출자의 배려심이 영화에서 전달된다. 혹자는 지난해 국내 영화계를 강타한 <벌새>의 그것과 비슷하다고도 한다. 

박지완 감독의 뚝심이 없었더라면, <내가 죽던 날>은 색감이 분명한 좋은 영화로 탄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걸출한 신인 감독의 출현이다. 다음은 박 감독과의 일문일답.

- <내가 죽던 날> 시나리오를 직접 썼다. 어떻게 출발하게 된 작품인가?

▲  2013년에 처음 시작해서, 컴퓨터에 넣어놓고 종종 꺼내서 붙이고 한 작품이다. 가끔 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초고나 개봉작이나 엔딩은 비슷하다. 처음에 보여드렸을 때는 보신 분들의 욕망이 투영됐다. 


어떤 분들은 세진(노정의 분) 아빠 사건을 중심으로 범죄 스릴러를 만들자고 했다. 또는 현수의 아픔을 더 강하게 드러내서 극복기를 그려보자고 한 분들도 있었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서 기다렸다. 

그러다 권남진 PD님을 2018년 말에 만났다. 별 기대 없이 나갔는데, 제가 하고 싶은 걸 잘 읽어주셨고, 그러면서 시나리오가 확장됐다. 이 작품은 임자를 만나지 않으면 오해가 많을 수 있는 시나리오다. 

배우들도 잘 이해해야 하는데, 김혜수 선배가 정확하게 읽어줬다. 당시에는 ‘이게 뭐지?’ 싶었다. 혜수 선배가 캐스팅되고 나서는 일이 수월하게 풀렸다. 힘이 컸던 것 같다. 

- 놀라운 점은 작품의 뚝심이다. 기존의 흥행 공식을 벗어난 화법이다. 말 그대로 뚝심이 보인다.  

▲ 대단한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얘기가 명확하게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는 사라진 소녀의 코드를 따라가는데, 기존 이런 미스터리 영화와 도착지가 다르다. 샛길로 셀 수 있는 길이 많아서 섬세하게 지도를 그려야 하는 게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원하는 길을 갈 수 있었다. 

- 이 영화를 통해서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 저는 사실 그 당시에 재밌는 것들을 넣은 것이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서로 영향을 준다. 방금 전까지도 몰랐던 사람인데, 그 사람들 때문에 다음날을 잘 살 수 있는 그런 경우들이 있다. 나쁜 경우도 있겠지만, 좋은 경우도 많다. 그 부분을 영화적으로 보여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 섬세한 지도를 그려야 한다고 했는데, 중점적으로 생각한 부분이 뭔가. 

▲ 현수(김혜수 분)는 직업이 남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감정이 들어갈 것도 없고, 냉정하게 사건 속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수사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어떤 상황이었건 결과만을 보는 직업인데, 본인이 어떤 사건을 경험하면서 상황을 접해보니 다른 게 보인다는 걸 표현해야 했다. 이걸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만들고 싶은 욕심은 강했다.

관객들이 따라갔으면 하는 바람도 컸다. 요즘 영화들은 신이 시작하면 가져가는 게 있어야 하는데, 현수는 사람을 만나는데 얻어가는 게 없다. 관객들에게 견디라고 하는 거다. 그것을 모두 견디고 나면 어떤 깊은 여운을 얻을 것인데, 견뎌줄지 궁금하다. 그래도 관객들이 워낙 똑똑하고 현명해졌기 때문에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제목이 강렬하다. 이 제목은 어떻게 선택하게 됐나. 

▲ 너무 어둡다고 해서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죽던 날은 세진의 기준에서 죽던 날이다. 다시 말하면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하다. 현수가 세진을 보니까 나도 죽었던 날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고, 다시 살아가야겠다는 힘도 얻는다. 어떤 날을 기준으로 같이 겪은 것도 아니고, 시공간도 다른데, 만나는 지점이 있다. 이 아이러니를 읽어주길 바랬다. 

- 이 작품이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충분히 자극적인 요소를 깔아놨는데 하나도 활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세 수준으로 잘라낸다. 현수의 이혼 과정에서의 문제점, 세진과 남성의 하룻밤 등 여러 가지가 정황상 보이는데 장면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연출자의 배려심인가? 

▲ 현수의 사연 같은 경우는 이혼이 시작점이 됐을 수 있다. 정확히 말해서 이혼으로 인해 질문이 시작된 것이다. ‘괜찮은 삶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내 인생은 맞는 건가?’ ‘내 잘못인가? 아닌가?’ 이런 류의 질문이다. 

어찌 됐든 그 질문들로 인해 잠도 잘 수 없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다. 어떤 면에서 현수는 모욕을 겪은 사람이다. 일부 사람들을 보면 너무 심한 모욕은 언급도 하지 않는다. 해명할 힘도 없고, 해명을 하면 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장면으로 보여주기보다 현수의 태도로 드러나길 바랐는데, 혜수 선배가 정말 잘해줬다고 생각한다. 

- 현수는 동료와 바람을 핀 건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한 지점이다. 현수가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고 해도 후배인 경찰 파트너와 좋은 관계였고 한 번 의심의 눈초리를 받으면 그렇게 볼 수도 있는 다정함과 배려가 있는 관계였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배의 아내와도 관계가 좋았을 테지만 결혼을 앞둔 상태에서 그런 소문을 맞닥뜨리게 되면 보통은 그 관계를 이어가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수 입장에서는 굉장한 모욕을 겪은 데다 친한 동료와 관계가 끊어야 하는 상황이었을 텐데, 현수의 캐릭터에서는 그 모욕과 관계된 그 어떤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수근거림에 대해 대놓고 해명을 하지도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변호사가 남편의 주장에 대해서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냐고 물었을 때 해명이 아니라 ‘그 어떤 부탁도 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죠. 아마 남편은 그런 현수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 ▲ⓒ워너브라더스코리아

- 세진의 경우도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2차 가해를 피하고 싶었던 것인지. 


▲ 세진이 주위에는 오빠를 제외하고는 각자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선과 악이 딱히 없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 희생까지는 하지 않는다. 형준(이상엽 분)도 좋은 의도였을 것이다. 세진이 아빠에 대해 알고 있으니 세진에게 뭔가 더 듣고 싶었을 것이고, 그러면 사건도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고 싶었다. 만약 그게 형준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이 모든 불행이 형준 탓이 되버리니까. 그걸 바라지는 않았다. 그러면 변질이 되니까.

- 이 영화는 김혜수의 역할이 크다. 우울감을 기저에 깔고 있는 인물을 정말 훌륭히 표현했다고 본다. 

▲ 현장에서는 찍는 데 바쁘다 보니까, 연기를 잘하시는구나 정도였는데 편집하면서 보니까 정말 대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산이 넉넉한 것도 아니라서 스케줄이 정말 빡빡했다. 원룸은 뛰고 감정 잡고 등등 모든 장면을 하루에 해결했다. 그렇게 모든 걸 하루에 하는데 잘하는 분이 또 있을까 싶다. 척하면 척하고 알아 들으시고, 아이디어도 많이 주신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혜수라는 배우에서 슬픈 눈이 보였다. 섬세한 선이 마음에 들었다. 연약한 김혜수를 오래 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2019년 김혜수의 현재를 잘 담아내고 싶었다. 현수를 얼마나 따라갔느냐에 따라 영화를 보고 느끼는 폭이 클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많이 느끼길 바람이 있고. 김혜수라는 배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따라오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 김혜수에 대한 첫 인상은 어땠나. 


▲ 선배님의 첫 인상은 매우 배려심 깊은 스타로 보였다. 제가 만난 선배님은 굉장히 작품에 대해 열정적으로 감상을 얘기해주셨고 정말 꼼꼼히 읽고 얘기해주시는 정성스러운 사람이었다. 다만 인물들의 상황에 매우 공감하고 그걸 표현하는 부분에서 아이디어도 주시고 해서 처음 만난 자리고 하시겠다고 답을 주는 자리는 아니라서 마음 속으로 거절 하시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렇게 뵙고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 기대 이상으로 연기를 잘한 배우가 세진을 연기한 노정의다. 이번 작품으로 연기력이 완전히 증명됐다고 생각한다. 

▲ 10대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처음 정의를 만났을 때 가만히 있을 때는 표정이 서늘하다가 웃을 때는 활짝 핀다. 호기심이 가는 웃음이었다. 만나서 얘기해보니 어린 나이같지 않게 영민하고 똘똘하다. 경력도 많다. 아역 치고 학교도 열심히 다녔다. 친구들하고 잘 지내기도 하고, 특이한 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진이도 그럴 것 같았다. 주어진 조건에서 열심히 사는 친구. 

실제로 촬영할 때 정의는 좀 힘든 상태였다. 입시 때문에. 사실 연기만 하기도 벅찬 숙제인 정의 입장에서는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한테 ‘괜찮니?’라고 하면 눈으로는 ‘안 괜찮아요’라고 하는데, 다른 내색은 안 했다. 

정의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의 세계에 있다 보니 지나치게 똘똘하다. 스크립터가 말하길 정의는 연결을 맞출 게 없다. 자기가 알아서 왼손 오른손을 다 맞추고 있다. 솔직히 안쓰러웠다. 얼마나 이 현장에서 많은 요구를 받았으면, 그런 것까지 다 고민하고 익혔겠나. 아마 세세하게 아역을 배려하는 현장이 많지 않았을 텐데, 본인이 이렇게 저렇게 하면서 스스로 기술을 익힌 거다.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랬다. 태국 촬영 쯤에 학교에 합격했다고 해서 정말 기뻤다. 

- 이번에 입봉을 하게 됐는데, 이전의 이력은 어떻게 되나?

▲ 영화사 봄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다. <쓰리 몬스터> <달콤한 인생> <너는 내 운명>을 담당했다. 영화 학교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스크립터 일을 2008년부터 했다. 언제 데뷔할지 모르는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을 잘 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많았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했다. 

- 영화에 대한 설명, 스스로에 대한 판단, 타인에 대한 생각 등 전반적으로 냉철하다. 객관화가 매우 잘된 느낌이다. 

▲ 냉철하게 봐야만 한다. 주위에 조급하게 데뷔해서 실력 발휘를 못하는 친구들도 많이 봤다. 스스로 감독이라 칭하기 부끄럽다. 몇 편을 찍어야 감독이라는 칭호가 어울릴지도 고민해 봤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이야기를 계속 잘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럴려면 냉정해야만 한다. 나와 관객들과 이 세상이 원하는 이야기를 좋은 타이밍에 해야 한다. 

- 이번 영화를 하면서 힘들었던 게 있다면 혹시 무엇이었나. 

▲ 영화감독의 위치에서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게 있지만 마음대로 되는 건 없다. 혜수 선배님이 아무리 잘해도 내가 실수하면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 내가 유지할 수 있는 건 내 태도 밖에 없었다. 왜 만들려고 하고, 왜 이 영화를 선택했고, 어떤 마음을 갖고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더이상 영화를 찍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뿐 아니라 대다수 배우가 이 영화의 의미를 읽고 들어와 줬다.

신인 감독에게 있어서는 과분한 이름이다. 근데 그 의미가 영화에 나오지 않으면, 저에게는 정말 악몽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게 마음을 많이 졸이게 했다. 제가 분명히 어설펐을 것이고, 참견하고 싶었을 텐데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날 믿고 기다려줬다. 정말 판이 잘 깔렸고, 나에게는 투정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래서 결과가 좋아야만 했다.

- 힘든 순간이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내가 잘 가고 있구나라고 느낀 장면이 있을까. 

▲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장면이기도 한데, 후반부에 현수와 순천댁(이정은 분)이 만나는 장면이다. 촬영을 준비 중인데, 정은 선배가 울려고 한다. 눈물이 나오면 안 된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는데 감정이 격해진 것이다. 배우들의 이해도가 높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고민은 누구부터 찍을 것이었냐였다. 연출자로서는 복이었다. 

또 촬영과 편집 기간을 거치는 내내 어떤 게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현수의 감정을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이해를 돕고자 편집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코로나19 때문에 편집할 시간이 넉넉했다. 그래서 고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 똑똑해진 관객들이 이 감정선을 이해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 이제 첫 걸음을 뗐다. 워낙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포부가 있다면?

▲ 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 이야기의 단점에 대한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제가 생각한 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 맞다고 생각하고 밀어붙인 면이 없지 않은데 다행히 저와 생각이 같은 제작자들을 만나서 완성할 수 있었다. 만들고 보니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사실 관객들과 어떻게 만나게 될지 그래서 더 기대 되고 두렵기도 하다. 이미 세상에는 너무 많은 영화와 이야기가 존재하고 앞으로도 많을 테지만 그래도 제가 만들 영화를 위한 자리가 있다면 그래도 조금 다른, 좀 더 새로운 지점을 도전하는 영화였으면 한다. 또 그런 이야기를 기다리는 관객과 잘 만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래야 영화 만드는 일이 비로소 제 직업이 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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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