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4대 메이저 대회가 특별한 이유

대접부터 다른 역사적 가치

메이저는 왜 메이저인가. 왜 특별할 수밖에 없는가. 프로골퍼가 PGA 일반 대회에서 아무리 우승을 많이 기록해도 메이저 대회에서의 우승이 없으면 사람들은 ‘미완의 골퍼’라고 부른다. 하지만 단 한차례 우승이라도 메이저라면 큰 대접을 받는다. 일반 대회의 우승이 아무리 많아도 메이저의 우승이 없으면 명예의 전당에도 오르지 못한다. 그만큼 메이저의 우승은 선수들에게는 생애 최고의 영광이다.

4대 메이저 중에서 매년 첫 번째로 치르는 대회가 마스터즈이다. 4월 둘째 주부터 일주일간 열리는 마스터즈는 메이저 대회 중 유일하게 장소를 바꾸지 않고 단 한 곳인 어거스타 내셔널에서만 개최된다. 이 때문에 팬들에게조차 일 년 중 딱 한 번 대회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만 이 골프장을 구경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진다. 

또 다른 차원

대회 초청 자격도 까다롭기 그지없다. 전년도와 올해 상금 랭킹 각 50위, 메이저 챔피언 등 총 17가지 조항에 부합되는 선수 150명만 참가시킨다. 우승자는 클럽하우스를 본떠 만든 건물 모양의 트로피와 오직 마스터즈에서만 준비되는 그린재킷을 입게 되는 영광을 차지한다. 프로선수들의 평생 소원은 마스터즈에서 경기를 하는 것이고, 참가만으로도 생애 최고의 영광으로 여긴다.
골프대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디 오픈은 1860년 10월17일 프레스트윅골프장에서 아마추어와 프로 등 8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제1회 대회는 당시 프레스트 윅이 12홀이었던 관계로 3라운드 36홀을 하루에 도는 방식을 택했고, 원년 대회에서 윌리 팍이 초대 챔피언이 됐다. 
12년간 프로스트윅 한 곳에서만 열리던 디 오픈은 1872년부터 비로서 올드코스 등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10여 골프장을 순번제로 돌면서 개최되고 있다. 4대 메이저 중 영국에서 열리는 유일하면서 유서 깊은 세계 최초의 공식 오픈 대회로 그 명맥을 공고히 하고 있다.
1888년 존 리드가 미국에 골프를 선보인 지 불과 6년 만인 1894년 미국골프협회(USGA)가 결성됐고, 이듬해 로드 아일랜드주의 뉴포트 골프장에서 10명의 프로와 1명의 아마추어가 참가한 가운데 US오픈이 열렸다. 9홀을 4차례 도는 36홀 스트로크 방식으로 단 하루 만에 치러졌다.
US오픈은 일 년간 전 세계의 아마추어와 프로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예선대회를 열어 자격을 부여한다. 누구든지 실력으로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이다. 매년 미국 전역의 골프장을 순회하며 개최한다. 쉬네콕 힐, 윙드 풋, 올림피아 필드, 메다이나, 페블 비치, 파인허스트 등에서 교대로 개최된다. 대부분 100년 가까운 골프장으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서 깊은 곳들이다.

마스터스, 까다로운 장벽
디 오픈, 가장 오랜 전통

메이저 대회로는 마지막인 8월에 열리는 PGA챔피언쉽대회는 20세기 초 아마추어가 대우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던 뉴욕의 백화점 거부인 레드맨 워너메이커가 1916년 자신의 이름을 딴 1미터도 넘는 트로피를 제작하면서 뉴욕의 시와노이골프장에서 원년대회를 열었다. 그동안 지역에서 머물던 골프 대회를 전국 대회로 만든 것이다. 
더불어 현재의 PGA프로골프협회도 탄생했다. 디 오픈과 US오픈, 마스터즈 모두 스트로크 플레이지만, 이 대회만큼은 매치플레이 방식으로 했다. 당시의 선수들 대부분이 매치플레이를 더 선호한다는 여론에 입각한 것이다. 
1958년에 스트로크방식으로 바뀌기 전까지 매치플레이는 40여년간 지속됐다. 초창기에는 4년 연속 우승을 한 월터 하겐이 트로피를 택시에 두고 내릴 정도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골프의 계보를 잇는 샘 스니드, 벤 호건, 아놀드 파머 등 선수들이 등장하면서 상금도 많아지고 대우도 좋아지자 이 대회는 어느덧 메이저 대회로 탈바꿈했다.
한 가지 의문점은 156년 전통의 디 오픈이 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골프의 성지인 올드코스에서 열리지 않고, 프레스트윅이라는 생소한 골프장에서 열렸을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톰 모리스였다. 
디 오픈의 개최는 당시 ‘골퍼의 신’이라 불리던 올드코스의 헤드프로였던 앨런 로버트슨이 1859년 사망한 것을 추모하기 위함이었다. 이듬해인 1860년 프레스트윅골프장의 헤드였던 올드 톰 모리스는 앨런 추모의 명분을 세우면서 원년대회를 자신의 골프장에서 개최하고자 했다. 세계 최초의 골프 대회 개최를 주관하면서 그는 에딘버러시에 공식적으로 대회를 요청했고, 무려 12년간 개최할 수 있는 권리까지 따냈다.
 


US 오픈, 개방된 참여 기회
PGA챔피언십, 스타 등용문

디 오픈이 역사적인 관점이나 명분상으로나 당연히 올드코스에서 열려야 했지만 불행히도 절대 지존이었던 앨런 로버트슨을 잃은 세인트 앤드루스시와 올드코스는 대회 개최의 힘이 없었다. 
모리스의 스승이자 가죽볼의 마지막 장인이었던 앨런은 새 시대의 고무볼을 고집하는 제자 모리스와의 다툼 끝에 그를 쫓아냈다. 올드코스를 떠나 15㎞ 인근의 프레스트윅에서 자리를 잡은 모리스는 언젠가는 스승을 능가하는 장인이 되리라고 복수를 다짐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스승이 사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모리스는 올드코스로 당장 갈 수는 없었다. 대신 모든 것을 묻으면서 프레스트윅에서 추모 대회를 열기로 했다. 
모리스와 에딘버러시의 계약대로 12년이 흘렀고, 1873년에야 비로서 올드코스에서 디 오픈이 개최될 수 있었다. 물론 미래를 꿈꾸며 절치부심하던 모리스가 앨런이 사망한 뒤에야 비로소 꿈에 그리던 올드코스 공방의 주인이 됐고, 이는 올드코스에서 오픈이 열린 이유와 무관하지 않다. 

유구한 발자취

그 후 30여년간 서너 군데의 골프장을 돌면서 개최되던 디 오픈은 1892년부터 현재와 같은 4일간 72홀을 도는 스트로크대회로 바뀌었다. 1894년부터 비로서 스코틀랜드를 벗어나 잉글랜드의 여러 곳에서도 순번제로 치르는 오늘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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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