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십자 ‘혈액백 스캔들’ 막전막후

목 좋은 자리 딴 나라 주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정수 기자 = 녹십자가 사면초가에 빠졌다. ‘혈액백 담합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녹십자는 제재를 받았지만 효력 정지 가처분이 인용됐다. 다만 처분 취소 소송서 패소한다면 2년간 입찰에 참여할 수 없다. 사업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녹십자 혈액백 사업은 매각될 예정이다. 빈자리는 누가 대신하게 될까.
 

▲ 녹십자`

혈액백은 말 그대로 혈액을 담는 용기다. 둥그스름한 사각형 모양으로 혈액을 저장한다. 혈액사업서 혈액백은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다. 혈액백에 혈액이 저장돼야 비로소 전국 수요처로 이송될 수 있다.

혈액 사업
유통 핵심

혈액백 수요의 대부분은 헌혈기관서 발생한다. 대표적으로 대한적십자사(이하 적십자사)와 한마음혈액원이다. 특히 적십자사는 국내 혈액공급 90%를 도맡는다. 적십자사는 혈액백을 마련하기 위해 매년 입찰공고를 낸다. 압도적 경쟁력을 보인 곳이 있는데 바로 녹십자그룹이다.

녹십자그룹은 혈액백을 적십자사 등에 사실상 ‘독점 공급’했다. 낙찰점유율은 적십자사 70%, 한마음혈액원 100%에 달한다. 그룹 내 혈액백 담당 계열사는 ‘녹십자엠에스’다. 녹십자엠에스는 국내시장서 높은 점유율을 자랑한다.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녹십자엠에스 자체 분석 결과 지난 5년간(2014∼2018) 점유율은 평균 72% 정도다.

같은 기간 혈액백 매출은 172억원, 211억원, 206억원, 204억원, 244억원이었다. 녹십자엠에스 전체 매출서 20%대다. 많게는 30%까지 차지할 때도 있었다.


별 탈 없이 지속되던 녹십자 혈액백 사업은 ‘입찰 단가 담합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변곡점을 맞았다.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지난해 7월 녹십자엠에스에 과징금 부과와 검찰 고발을 단행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녹십자엠에스는 태창산업과 2011년, 2013년, 2015년 적십자사 혈액백 입찰서 예정 수량을 7대3으로 나눴다. 투찰 가격도 합의했다. 두 회사는 사전 합의대로 각각 70%, 30% 물량을 투찰했다. 이들은 모두 낙찰자가 됐다. 계약 금액만 모두 443억원이었다. 투찰률은 모두 99% 이상이었다.

공정위는 담합 배경을 ‘낙찰자 선정 방식 변경’으로 봤다. 당시 낙찰자 선정 방식은 ‘최저가 입찰제’서 ‘희망수량 입찰제’로 변경됐다. 최저가 입찰제는 1개 업체 100% 납품이다. 반면 희망수량 입찰제는 최저가 입찰자부터 희망 예정 수량을 공급하고, 후순위자가 나머지를 공급하는 방식이다.

결국 전체 물량을 담당하지 못하더라도 가격을 낮춘다면 원하는 물량을 낙찰 받을 수 있는 구조다.

공정위는 녹십자엠에스와 태창산업이 가격 경쟁을 피하기 위해 담합을 이뤘다고 봤다. 녹십자엠에스는 시정명령과 과징금 58억200만원을 부과 받았다. 녹십자엠에스와 소속 직원 1명은 검찰에 고발당했다.

녹십자엠에스 담합 의혹 사실로
패소하면 2년 동안 참여 불가

공정위는 이를 ‘악성담합’으로 봤다. 공정위는 “국민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혈액백 구매 입찰에 장기간 진행된 담합 행위를 제재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며 “대다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헌혈 과정에 필요한 용기를 통해 취한 부당이익을 환수했다”고 평가했다.


설상가상으로 녹십자엠에스는 적십자사로부터 ‘부정당 업자 제재 처분’을 받았다. 부정당 업자 제재란 입찰담합 등 부정행위가 드러난 업체에 불이익을 주는 조치다.

제재 결과 적십자사와 거래가 중단됐다. 녹십자엠에스는 그달 10일 ‘거래처와 거래중단’을 고시했다. 제재 기간은 2022년 1월20일까지로 2년 동안 혈액백 사업을 영위할 수 없게 됐다. 녹십자엠에스는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과 ‘처분 취소 민사소송’ 카드를 꺼내들었다.

녹십자엠에스는 지난달 13일 공시를 통해 가처분 신청이 인용됐다며 민사소송 선고 전까지 입찰 자격을 임시로 부여받았다고 전했다. 승소 시 사업 재개 가능성이 점쳐지지만 패소할 경우 2년간 사업이 불가능하다. 공고했던 혈액백 선두주자 자리가 위태로운 모양새다.

같은 날 녹십자엠에스는 혈액백 사업 부문 분할을 예고했다. 사실상 혈액백 사업을 그만두겠다는 해석이다. 녹십자엠에스는 혈액백 부문만 따로 떼서 전문회사를 설립할 방침이다. 신설 회사명은 ‘녹십자혈액백’이다.

녹십자엠에스는 이를 전부 매각할 예정이다. 매각이 어려울 경우 신설 회사 지분 100%를 보유할 계획이다. 녹십자엠에스 아래 자회사를 두는 방식으로 분석된다.

분할 명분은 ‘전문성 제고’와 ‘경영 효율화’다. 실제로 녹십자엠에스는 2018년에 이어 지난해에 적자를 기록했다. 2018년 녹십자엠에스 매출액과 영업손실, 당기순손실은 차례로 863억원, -59억원, -112억원이었다.

담합 적발
2년 정지

지난해 매출액은 8.99% 상승한 940억원이었다. 영업이익도 24.93% 상승했지만 -44억원에 그쳤다. 당기순손실은 오히려 큰 폭으로 늘었다. 무려 45.61% 감소한 -163억원이었다.

혈액백 사업에 제동이 걸린 가운데 재무구조 개선 필요성이 부각된 만큼 사업을 정리하겠다는 의중으로 풀이된다.

녹십자엠에스 혈액백 사업 분할 예정일은 오는 5월1일로 해당 안건은 주주총회서 통과 여부가 갈릴 예정이다. 주총은 이번달 24일 열린다.

안건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통과될 전망이다. 녹십자엠에스 최대주주는 ㈜녹십자로 특수관계인과 자기 지분 합은 63.24%다.

녹십자 관계자는 <일요시사>에 “(처분 취소)소송에 대한 선고 전까지 적십자사 혈액백 입찰 참여 자격이 있다”며 “혈액백 사업부가 녹십자엠에스서 벗어난다면 혈액백 입찰에 변화가 발생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 녹십자엠에스가 사업권을 갖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입찰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했다.

녹십자엠에스가 직격탄을 받은 사이 약진이 관측되는 업체가 있다. 독일계 다국적 기업인 ‘프레지니우스카비’로 글로벌 헬스케어 회사 프레지니우스 자회사다. 현재 100여개 나라에 혈액백을 공급한다.
 

▲ 혈액백 ⓒ본 사진은 특정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혈액백 세계시장 규모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지난해 3분기 녹십자엠에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매출액 기준 ‘혈액백 및 관련기기’ 상위 업체 중 프레지니우스카비가 이름을 올렸다. 프레지니우스카비는 북미·유럽·아시아 지역서 1위를 기록했다. 매출액만 12억3600만달러. 한화로 1조5000억원에 가깝다.

프레지니우스카비는 국내에 2개 법인을 뒀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와 프레제니우스메디칼케어다. 이 중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가 혈액백 사업을 진행 중이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의료기기와 수액제, 자가수혈 및 임상영양에 전문 치료제를 제공한다. 법인은 지난 2009년 설립됐다.

다국적 기업
시장에 입성?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2017년 말 국내 혈액백 시장 진출을 밝혔다. 당시 박주호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 대표는 “국내 제품으로만 공급하던 혈액백 사업에 다국적 기업이 참가해 우수한 품질과 유사 시 안정적 공급 등으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2012년부터 적십자사 혈액백 입찰에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장벽에 가로막혔다. 입찰 조건 때문이었다.

적십자사는 지난 2013년 4월 입찰공고에 ‘국내 직접 제조가 가능한 자’라는 조건을 신설했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혈액백을 해외서 제조했다. 2018년 ‘국내 직접 제조’라는 제한이 풀리면서 문이 열렸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그 해 4월, 160억원 규모의 적십자사 혈액백 입찰에 도전했다.


하지만 포도량 미달로 고배를 마셨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 측은 즉각 반발했다. 이미 100여개 국가서 자사 혈액백을 사용하고 있고,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를 받았다는 이유였다.

당시 입찰 최종 낙찰자는 녹십자엠에스였다. 녹십자엠에스는 혈액백 이중·삼중·사중백 5개 품목서 모두 낙찰자로 선정됐다.

시민단체 역시 성명을 냈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적십자사가 입찰공고와 다르게 자의적 기준을 적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내 학계와 해외 혈액백 사용국 대부분은 포도당과 분리된 과당 전체량을 합산한다”며 “유독 적십자사는 과당을 불순물로 보고 제외해 전체 포도당 함량이 미달된다며 탈락시켰다”고 강조했다.

약 6개월 뒤 열린 국회 국정감사서도 입찰 관련 지적이 있었다. 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의원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적십자사 국감서 “혈액백 입찰을 둘러싼 적십자와 녹십자 관계는 동맹을 넘은 담합관계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 박경서 적십자 회장 ⓒ적십자사

신 의원은 “입찰 공고 때마다 입찰 조건이 자꾸 변동된다”며 “결국 녹십자엠에스 등 국내기업만 낙찰됐다”고 밝혔다. 당시 신 의원은 적십자사 감사실이 작성한 ‘혈액관리본부 혈액백 구매계약 관련 민원 조사 보고서’를 바탕으로 설명했다.

지난 2012년 적십자사는 입찰자격에 ‘3년간 연 13만 유니트 이상 납품 실적’ 요건을 추가하려고 했다. 당시 국내 혈액백 대부분이 녹십자엠에스서 비롯된 점을 미뤄봤을 때, 신규업체는 진입하기 어려웠다.

회사는 아예 사업 매각 예정
칠전팔기 해외기업 기회 얻나

다만 적십자사 감사실은 그해 12월 공정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해 해당 요건은 삭제됐다. ‘국내 제조시설 생산’이라는 요건도 지난 2013년 추가됐는데 결국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국내 혈액백 시장서 철저히 배제된 셈이다.

당시 박경서 적십자사 회장은 “전혀 죄가 없다고 해도 질의 내용을 보면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신 의원은 투명성 강화 방안 보고를 요청했고, 박 회장도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지난해 5월 혈액백 낙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적십자사는 혈액백 이중·사중백 긴급 공고를 게재했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최종 낙찰자가 됐다. 당시 경쟁자는 녹십자엠에스와 태창산업이었으며 낙찰금액은 45억원가량이었다.

일각에선 녹십자엠에스 혈액백 사업 전망이 흐릿해지면서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가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설 것으로 예측한다. 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측은 <일요시사>에 “올해 계약 일정에 맞춰 입찰을 통한 혈액백 공동구매를 진행할 예정”이라며 “프레지니우스카비가 입찰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앞서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 모기업 프레지니우스 슈테판 슈투름 회장은 지난 2018년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서 혈액백 사업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슈투름 회장은 적십자사 등 혈액백 입찰 참여에 대해 “프레지니우스가 한국 시장서 활발히 활동했다고 생각한다”며 “프레지니우스 포트폴리오 중 한국서 선보이는 제품 수는 일부에 불과하지만, 나머지 제품도 한국서 출시할 예정이다. 한국 소비자를 위해 어떤 제품을 공급하는 것이 적절한지 살펴보고 있다”고 운을 뗐다.

이어 “프레지니우스 제품은 경쟁품 대비 적절한 가격에 선보일 수 있는 여지를 갖고 있고, 제품과 서비스는 품질 측면서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본다”며 “대량 생산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장점에 주목해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낙찰 경험
언제 시작?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는 매년 흑자를 내고 있지만 실적은 하락세다. 2016∼2018년 회사 매출은 655억원, 649억원, 640억원 순이다. 영업이익은 59억원, 46억원, 23억원으로 감소했다. 당기순이익 역시 32억원, 18억원, 5억원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률은 9.0%, 7.1%, 3.6% 이었다. 프레지니우스카비 코리아 관계자는 <일요시사>에 “지난해 5월 적십자사 혈액백 입찰서 낙찰자로 선정돼 그해 8월부터 혈액백을 공급하고 있다”며 “올해 역시 적십자사 혈액백 수급 계획에 따라 입찰에 참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kjs0814@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적십자사 회장의 읍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혈액 수급난으로 적십자사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지난달 4일, 박경서 적십자사 회장은 호소문을 통해 “전 국민 헌혈과 혈액공급을 책임지고 있는 적십자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발생에 대응해 등록헌혈자 헌혈 참여 요청, 약정단체 헌혈 확대 등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혈액수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박 회장은 “개인 헌혈자 수가 지난해 보다 2만명 이상 감소했고, 2월2일까지 헌혈 예정이었던 145개 단체가 헌혈을 취소했다”며 어려움을 전했다. 이어 “대한적십자사는 체온 측정, 마스크 착용 등 직원 개인위생을 강화했고, 헌혈의집과 헌혈버스에 대한 소독 작업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며 헌혈 동참을 독려했다.

지난 1월 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장도 비슷한 내용의 헌혈 참여 호소문을 발표한 바 있다. 상황이 당장 급반전을 보일 가능성은 적지만 헌혈 동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서울시의회 의원과 직원 30여명은 자발적으로 헌혈에 참여했다. 같은 날 해군작전사령부는 사흘간 헌혈 운동에 동참했다. 장병, 군무원 등 참가 인원만 430명이었다.

같은 달 26일에는 동아오츠카 임직원들이 본사 앞 헌혈버스서 헌혈 릴레이를 이어갔다.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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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사분오열’ 의료계 내분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뚝심인가, 고집인가?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대통령의 뜻이 확고해도 너무 확고하다. 겉으로는 유연한 대처를 언급하면서 ‘2000명’이라는 수치는 굽히지 않을 기세다. 강 대 강 대치에 나섰던 의료계는 우왕좌왕하는 모양새다. 의료계 내부의 의견을 모으는 일도 쉽지 않아 보인다. <일요시사>와 인터뷰한 지방의대 A 교수는 의과대학 정원 확대를 밀어붙이는 윤석열정부의 강경 기조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정규군은 수뇌부만 처리하면 와해되기 쉽다. 하지만 현재 의료계는 게릴라 방식으로 대응 중이다. 주동자를 찾기 어렵고 실제 주동자도 없다. 전공의, 의대생 모두 조직의 통제하에 움직이는 게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 윤정부 입장에서는 협상 대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일괄 협상에 따른 일괄 타결은 어렵다고 본다.” 2월 이후 평행선만 실제 의료계는 대학의사협회(의협),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 대한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학생협회(의대협) 등 여러 단체가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 반대’를 큰 틀로 하되 대응 방식이나 세부적인 요구사항은 각각 다른 상황이다. A 교수의 말대로 의료계는 현재 단일협의체가 없다. 협상테이블이 마련된다 해도 앞에 대표로 나설 사람이 없는 셈이다. 과거 의정갈등이 일어났을 때 주로 의협이 나서서 의료계 입장을 전달하고 대응을 이끌었다면 현재는 각개전투를 진행하고 있다. 이미 정부는 의협의 대표성에 대해 의문을 표한 상태다. 정부는 지난 2월 말 의협 대신 ‘대표성을 갖춘 협의체’를 구성해 의대 정원 확대 등에 대해 대화하자고 의료계에 요청했다. 의협이 전체 의사들의 대표성을 띠기 어렵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당시 주수호 의협 비상대책위원회 언론홍보위원장은 “의협 회원엔 전공의·봉직의 등 모든 직역이 포함돼있고 모든 직역이 배출한 대의원 총회 의결을 거쳐 만들어진 조직이 비대위”라며 “정부가 의협의 대표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내부 분열을 조장하기 위함”이라고 반발했다. 의협은 의료법에 근거해 모든 의사가 가입하는 법정 단체지만 개원의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번 의정갈등 국면서 가장 선봉에 선 단체는 전공의가 모인 대전협이 꼽힌다. 전공의가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병원을 떠나는 등 집단 강경 투쟁에 나서면서 의정갈등에 불이 붙었다. 의대생은 집단 휴학으로 힘을 실었다. 유급 마지노선에 이른 대학들이 수업을 재개했지만 의대생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집단사직에 나선 전공의가 여전히 버티고 있는 상황서 의대생의 복귀 가능성 역시 낮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대통령실 1년 유예안 일축하면서도 ‘2000명 정원’ 논의 가능성 제시해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기준 학칙에 따른 형식적인 신청 요건을 지킨 의대생의 휴학 신청은 누적 1만242명으로 전체 의대 재학생 대비 54.5% 규모에 이른다. 의대생들의 집단 휴학과 수업 거부는 지난 2월부터 시작됐다. 대학 사이에선 이달 중순이 지나면 여름방학까지 총동원해도 유급을 막을 수 없다. 의대는 특정 수업서 3분의 1 또는 4분의 1 이상을 결석하면 낙제(F) 처리되고 F가 하나라도 나올 경우 유급이 되도록 학칙을 세워둔 곳이 많다. 전공의의 집단사직으로 병원 업무가 마비되고 일부 의료진에 업무가 과중되는 이른바 ‘의료대란’이 벌어졌다. 여기에 의대생의 집단 휴학은 의사 수급 부족 현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의료현장에 구멍이 생기면서 의사를 찾지 못해 환자가 사망하는 ‘응급실 뺑뺑이’ 사건도 일어났다. 문제는 정부의 태도다. 지난 2월6일 2025학년도 의대 입학 정원을 5058명으로 현행보다 2000명 늘리겠다고 발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요지부동 상태다. 정부는 2035년까지 1만명의 의사 인력을 확충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006년 이후 19년 동안 동결됐던 의대 정원 확대를 예고한 것이다. 당시 보건복지부(이하 복지부)는 발표 당시 의료계와 소통한 결과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10월26일 ‘의대정원 확대 추진계획’을 발표한 이후 40개 대학으로부터 증원 수요와 교육역량에 대한 자료를 받았고 현장점검을 포함한 검증을 마쳤다고 밝혔다. 의료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과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특히 정부는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강조했다. 언론사 여론조사 등에서 의대 정원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 국민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을 의미있게 언급했다. “흔들림 없는 의료개혁을 완수하겠다”는 정부의 입장에 국민의 응원을 지지대로 삼은 것이다. 요구 다른 의사단체 윤석열 대통령의 의지는 더 강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국민께 드리는 말씀’ 대국민담화서 “역대 정부들이 9번 싸워 9번 모두 졌고 의사들의 직역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졌다”며 “이제는 결코 그런 실패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2000명이라는 숫자는 정부가 꼼꼼하게 계산해 산출한 최소한의 증원 규모”라며 “이를 결정하기까지 의사단체를 비롯한 의료계와 충분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연구 결과를 들어 그 배경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는 국책연구소 등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된 의사 인력 수급 체계를 검토했다. 수요 측면서 저출산 고령화와 같은 인구구조의 변화, 만성질환의 증가와 같은 질병구조의 변화, 소득 증가에 따른 의료수요 변화까지 반영했다”며 “어떤 방법론이더라도 지금부터 10년 후인 2035년에는 자연 증감분을 고려하고도 최소 1만명 이상의 의사가 부족하다는 결론은 동일하다”고 말했다. 의대 정원 확대 시기에 대해서도 정부는 가차없는 태도를 보인다. 대통령실은 지난 8일, 의협이 제안한 의대 증원 1년 유예안에 대해 “정부는 그간 검토한 바 없고 앞으로도 검토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앞서 박민수 복지부 차관이 “내부 검토는 하겠고 현재로서 수용 여부를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내놓은 답변서 더 강경해진 입장이다. 대통령실은 1년 유예안을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면서도 “만약 의료계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근거, 그리고 통일된 의견으로 제시한다면 논의할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다”며 “열린 마음으로 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팔짱 낀 정부 공은 의료계로 일각에서는 정부는 초지일관 원론적인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현재로선 ‘2000명’이 정부와 의료계 간 대화의 장벽이 되고 있다. 정부는 2000명이라는 수치를 꿋꿋하게 고수하고 의료계는 2000명 백지화가 대화의 선결 조건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는 중이다. 정부든 의료계든 어느 한쪽이라도 구부려야 맞닿는 법인데 평행선만 그리는 모양새다. 이 와중에 의료계는 내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의료계에 요구하는 ‘통일된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새 회장을 선출한 의협이 그 중심에 있는 상황이다. ‘강성’으로 꼽히는 임현택 의협 회장 당선인과 의협 비대위가 엇박자를 내고 있고 대전협의 박단 비대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갈등 조짐을 보이는 중이다. 현재 의협은 비대위원장과 차기 회장이 공존하는 상태다. 의협은 지난달 26일, 임 당선인을 차기 회장으로 선출했다. 임 당선인은 결선투표서 65%의 지지를 얻어 당선됐고 임기는 다음 달 1일부터다. 임 당선인의 등장으로 의협의 대정부 투쟁 수위가 올라갈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됐다. 임 당선인은 의대 정원 증원 철회를 비롯해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파면을 요구하는 등 다른 의사단체에 비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마찰음이 나온 건 ‘단일대오’를 구성하는 과정에서였다. 의협 비대위는 지난 7일, 기자회견서 전의교협, 대전협, 의대협 등과 함께 합동 기자회견을 이번주 안에 열겠다고 예고했다. 하지만 임 당선인이 이런 움직임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의협 비대위, 차기 회장·전공의 회장 갈등 삐걱거리는 단일대오에 대화 공전 가능성도 의협 회장직 인수위원회는 의협 비대위와 대의원회에 공문을 보내 임 당선인이 김택우 현 비대위원장 대신 의협 비대위원장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한 지붕 두 가족’ 상황의 의협 창구를 단일화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전협 박 위원장도 의협 비대위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 박 위원장은 자신의 SNS에 “의협 비대위 김택우 위원장, 전의교협 김창수 회장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있지만 합동 브리핑 진행에 합의한 적은 없다”고 적었다. 합동 기자회견은 일단 취소된 상태다. 박 위원장과 임 당선인의 갈등도 관심사다. 임 당선인은 지난 4일,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비공개 만남에 불만을 드러냈다. 의협 비대위는 윤 대통령과 박 위원장의 만남을 ‘의미 있다’고 평가했지만 임 당선인은 SNS에 ‘내부의 적’을 운운하며 박 위원장을 강도 높게 비난하는 듯한 글을 남겼다. 박 위원장은 이 같은 보도 내용을 게시글에 공유하며 ‘유감’이라고 적었다. 전의교협은 의대 비대위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새다. 전의교협은 전국 40개 의과대학 교수협의회로 구성된 단체다.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이 의협 비대위에 합류하면서 의료계 단일대오 구성이 빨라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통일된 의견을 내놓을 단일협의체 구성 속도에 따라 의정갈등의 타결 가능성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의협 비대위를 중심으로 단일대오를 구성하려던 시도가 임 당선인과 박 위원장의 행보로 삐걱거리면서 의료계 상황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여기에 협상테이블이 마련돼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가 이뤄진다 해도 합의까지 가는 데는 하 세월이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만만찮다. 입장차가 그만큼 첨예하다는 뜻이다. 타결까지 첩첩산중 일각에서는 정부와 의료계 모두 환자에 대한 배려는 뒷전에 두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월 이후 두 달 넘게 갈등이 계속되면서 환자들은 불편을 겪고 있고 일부 의료진은 업무 과중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전공의가 떠난 병원은 매일 막대한 손해를 입고 있다. 정부와 의료계의 10번째 갈등이 어떤 결론으로 끝나느냐에 따라 의료계 지각변동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