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 아동 출연자’ 학대 논란

  • 구동환 기자 9dong@ilyosisa.co.kr
  • 등록 2019.07.29 11:00:57
  • 호수 12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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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애 홍어 먹이고 회당 5만원?

[일요시사 취재1팀] 구동환 기자 = 방송가에는 여전히 열정페이가 존재한다. 아역 배우를 둔 학부모들은 최저임금을 지키는 표준계약서는 구경도 못했을 뿐더러, 아이들을 장시간 촬영에 방치하는 등의 열악한 조건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화려한 방송가 뒤에 숨겨진 민낯에 대해 <일요시사>가 살펴봤다. 
 

▲ 본 사진은 특정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S양은 “추운 밤길에 혼자 뛰어다니는 연기 등 고된 촬영을 많이 해봤지만, 가장 힘든 촬영은 모 방송국서 홍어나 광어회를 먹는 장면이었다. 또 같이 출연한 언니는 사춘기라는 이유로 편의를 봐줬지만, 나한테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 ‘나이도 어린 나에게 왜 그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일단 출연?
계약서 없이…

2017년 S양은 학원형 기획사인 D사에서 연기를 배웠다. D사는 모 방송국서 아이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S양에 관한 프로필을 모 방송국 프로그램 외주 제작사인 L사로 전달했다. 

L사는 S양의 프로필을 확인한 후 오디션 기회를 제공했다. S양은 같은 해 3월경 OO공개홀서 열린 모 방송국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당시 8세였던 S양은 오디션에 합격해 캐스팅되는 기쁨을 누렸다.

S양 어머니는 “오디션이 일주일 이상 진행된 것으로 안다. 우리 아이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처음에는 포함되지도 않았다. 프로그램 측에서 원하는 아이가 없어서 연령을 확대하다가 우리 아이가 눈에 띄어 발탁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제작진은 S양 어머니를 불러 스케줄만 맞으면 S양과 함께해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S양은 같이 출연하게 되는 출연자 A양과 함께 3번의 대본 리딩을 진행했다. 이때 S양 어머니는 제작진에게 계약서에 관해 운을 뗐다.

하지만 프로그램 관계자는 “그전에 하던 애들도 계약서 안 썼어요. 아이들이기 때문에 변수도 많이 있고, 3개월 묶어놔도 아이에 따라서 그 기간을 못 채우는 경우도 있고, 3개월 이상 촬영하는 경우도 있어 사실상 의미가 없어요”라고 답했다.

S양은 어머니는 촬영 경험상 아이들과 제작사가 원해야 계속 촬영이 진행되기 때문에 계약서 작성이 불가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아이 출연에 관해서는 계약사항을 서로 못 지키는 경우가 많다는 게 업계 전언이다.

S양 어머니는 “오디션에 참여해서 캐스팅된 아이들은 이러한 문제를 모르겠지만, 엄마들은 다 알고 있다. 불공정하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아이들이 힘들게 얻은 배역을 엄마가 괜히 나서서 놓치게 될까 봐 말을 못했다. 이 업계에선 성인·아이 할 것 없이 무명 배우들은 불합리한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아이 피해 갈까봐 항의도 못 해 
따로 쉬는 시간 없이 대본 연습

D사 관계자도 “원칙상으로는 출연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시간을 자꾸 미루더니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고 전했다.

2017년 5월23일 S양은 본격적인 첫 촬영을 시작했다. 촬영은 오전 8시부터 시작됐지만, 오전 7시까지 도착해 촬영 준비를 마쳐야 했다. 메인 MC였던 S양은 2주에 1번씩 촬영을 진행했는데, 오전 8시부터 이르면 오후 10∼12시까지 하루에 4회분의 촬영을 해야 했다.


8세 아이가 소화하기에는 상당히 타이트한 촬영 스케줄이었다. 
 

▲ 본 사진은 특정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음

S양 어머니는 “촬영 시간 동안 별도의 쉬는 시간은 없었다. 필름이나 메모리 교체할 때나 촬영 환경을 바꿔야 할 경우 틈틈이 쉬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그 시간마저도 대본 연습하느라 바빴다. 온전히 쉬는 시간이라 하기도 민망하다”며 “체력적으로 무리가 가는 건 당연하다. 촬영을 다 마치고 차를 타고 집으로 올 때 녹초가 된 아이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찢어졌다. 특히 촬영이 오후 12시에 끝난 다음 날에는 학교에 가지 못한 적도 있다”고 토로했다.

이와 관련해 당시 촬영을 담당했던 작가는 “촬영은 8시부터 시작한 게 맞다. 하지만 아이들이 온전히 그때부터 촬영을 시작하는 것은 아니다. 인서트(화면이 없어도 장면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는 영상) 촬영을 앞에서 몰아서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휴식시간을 넉넉히 제공했다”고 항변했다.

S양 어머니에 따르면 촬영 특성상 아이들은 서서 촬영에 임해야 했고, 나이가 어려 키가 작은 아이는 같이 출연한 성인 연기자와 키를 맞추기 위해 발 받침대를 사용했다.

새벽부터 
자정까지 

S양 어머니는 “촬영 당시 프로그램 제작진은 주위 소품 중에 키를 맞출 수 있을 만한 물건을 급한대로 사용했다. 아이가 그 받침대서 떨어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건의를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열악한 촬영환경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라고 말했다.

S양은 프로그램 특성상 음식을 먹고 맛을 평가해야 했다. 출연자들은 홍어, 광어회, 청양고추가 담긴 김치 등을 먹어야만 했다.

S양은 가장 힘들었던 음식으로 홍어를 꼽았다. S양은 82회 때 같이 출연했던 출연자 A양과 함께 홍어를 시식했다. S양은 고기, 김치와 함께 홍어를 먹어야 했다. S양은 “언니(A양)도 홍어를 먹고 콜라를 계속 마시면서 힘들어했다. 홍어를 맛있게 먹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고 밝혔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녹취록서도 S양은 고등어회를 시식하는 과정이 힘들었다고 밝혔다.

S양은 “고등어회가 너무 비려서 토할 뻔했어요. 다른 회를 먹어도 고등어회 맛이 계속 나서 ‘아, 이게 비린내구나’ 했어요. 물도 계속 마셔봤지만, PD님과 대표님이 계속 맛있다고 하라 하시니까…. 솔직히 먹기도 싫었고 맛있다고 하라는데 맛있다고 하기도 좀 그렇고 그랬어요”라고 말했다.

이어 “같이 출연한 언니는 사춘기라는 이유로 다독여주는데 저한테는 계속 ‘언니 대사인데 네가 좀 해봐라’ ‘이렇게 맛있다고 해줘’ 이런 식으로 언니보다는 나한테 자꾸 요구했다. 그 상황서 안 한다고 할 수 없으니까 일단 ‘예’ 하고, NG가 나면 계속 ‘이렇게 해야지’라고 하는데 좀 힘들었다. 저를 좀 거칠게 대한 거 같은(느낌이 들었다)…. 작가님들이 얘기하실 때는 친하니까 그냥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저를 좋다고 얘기하시는데, (L사 대표와 작가를) 못믿겠다”고 덧붙였다. 

S양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먹인 음식들은 제작진들도 먹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당시 촬영현장에 있던 작가는 “아이들에 중간에 맵다고 한 건 안 먹이고 넘어갔다. 억지로 먹인 적은 없다”고 답변했다. 
 


모 방송국 외주제작사서 촬영한 이 프로그램은 촬영 기준이 아니라, 방송 기준으로 출연료를 지급한다고 했다. S양이 처음 출연한 방송날짜는 2017년 7월10일이었다. 7월 6회, 8월 8회, 9월 6회, 10월 7회, 11월 8회, 12월 7회분이 방송됐다. 이후에도 2018년 1월 5회, 2월 3회, 3월 6회, 4월 9회, 5월 7회, 6월 7회, 7월 9회, 8월 5회, 9월 5회분에 출연했다. 

교통비도… 
1회당 5만원

마지막 촬영은 2018년 7월31일이었다. S양 어머니는 “촬영을 며칠 앞두고 해고 통보를 받았다. 아이는 잘하고 있었는데…. 제작진에선 아이가 오래 일하기도 해서 교체를 해야 한다고 전했다. 아이가 촬영은 힘들어했지만, 막상 끝난다고 하니 아쉬워했다”고 말했다.

S양 출연을 두고 처음부터 계약서를 쓰지 않은 게 화근이 되었다. 2018년 7월31일 마지막 촬영을 끝냈을 때도 S양 어머니는 출연료를 한 푼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회당 출연료는 5만원으로 책정됐는데,한참이 지나서야 일부분만 지급됐다.

S양의 새 소속사 B사 대표는 “7월 6회 차에 관해서 L사는 D사로 출연료를 입금했다고 말했고, D사는 L사로부터 입금된 돈이 없다고 하며 말이 서로 달랐다”고 말했다. 이어 “출연료 5만원으로 책정해서 6회 차는 30만원이다. L사는 D사로 송금했다고 하나 우리는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2017년 8월부터 11월까지 총 29회 차에 대한 출연료는 1년도 지난 2018년 12월3일 L사로부터 받았다. 2017년 12월부터 2018년 6월까지 총 48회 차에 대한 출연료는 같은 해 8월13일 B사가 L사로부터 받아 S양 어머니에게 지급했다. 


B사 대표는 “지난해 8월 S양이 프로그램서 퇴출당하고 난 후 출연료가 급하게 지급됐다. 그 이유는 타인이 항의하자 프로그램에 손상이 갈까 봐 지급한 것”이라며 “출연료 5만원은 근로 기준 시간을 초과한 미성년자 보호에 관한 법률을 위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S양 어머니는 2017년 7월 6회분인 출연료 30만원을 받지 못한 상태라고 호소하고 있다.

S양 어머니는 “이러한 일들이 여기만 그런 게 아니고 비일비재하다. 이전 방송활동서도 출연료를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이전 프로그램 작가한테 입금됐는지 물어보니 입금명세서까지 보여주며 확인시켜줬다. 당시 D사 대표에게 물어보니 출연료에 대해서 별말은 없고, ‘출연시켜줬는데 그 까짓 돈 얼마나 되느냐고 난리냐’ 이런 말을 들었다”고 토로했다.

트라우마…못 먹는 음식은 ‘홍어’
출연료도…항의하자 뒤늦게 지급

D사 대표는 “우리도 억울하다. 우리가 2017년 S양을 케어 하는데 인건비, 교통비, 식사비, 헤어 메이크업 등 들어가는 돈이 많았다. 그런데 우리가 받아야 하는 돈을 새로운 소속사가 받아갔다. L사는 계약서를 우리랑 안 쓰고 B사와 쓴 것일 수도 있지 않느냐. 우리도 피해자”라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L사 대표는 “출연료 지급은 다 했다”며 전화를 끊었다. 

근로기준법상 18세 미만의 청소년은 하루에 7시간, 1주일에 40시간을 초과해 일할 수 없다. 다만 사용자와 근로 청소년이 합의한 경우에는 하루에 1시간, 1주일에 6시간을 한도로 연장해 일할 수 있다.
 

해당법에 따르면 S양에 관해서는 근로기준법 위반의 여지가 있다. 현재 B사는 L사에게 S양을 비롯해 소속 아역 배우들의 미지급된 출연료를 요구하고 있다. 

해당 프로그램 PD는 B사 대표에게 S양의 촬영본을 보내 S양의 시선과 표현에 대해서 지적을 하기도 했다. PD는 S양이 방송본만 확인하다 보니 (문제점을)잘 모를 수 있다면서 촬영본을 전송했다. 

2017년 5월부터 S양과 함께 출연한 A양도 홍어에 관한 기억이 좋지 않다고 했다. 1년 후 A양이 SNS를 통해 “싫어하면서 못 먹는 음식이 홍어”라고 말한 것. 텐**는 S양과 A양이 홍어를 먹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애가 못 먹겠다고 먹기 싫다는 거 굳이 저렇게 먹이는 건 아동학대 아니냐?? 성인들도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고 불호가 더 많은 음식인데”라는 댓글을 달았다. 

성인도 못먹는
음식을 강요?

권상집 동국대학교 상경대학 경영학부 교수는 “방송업계서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그렇게 출연료와 처우에 대해 요구할 거면 하지 마’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 이들, 솔직히 많다. 드라마가 생방송처럼 촬영되다 보니 근로계약서를 바탕으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스태프는 방송업계서 이른바 매장되기 쉽다”고 말했다.
 

<9do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연기학원의 사기

아역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이용해 금품을 가로채는 일이 기획사뿐 아니라 일부 연기학원서도 벌어지고 있다. 이를 이용해 돈을 갈취하는 드라마 제작 감독까지 있다. 아역 배우 지망생 부모들에 따르면 ‘꿈팔이’는 연기학원서 상습적으로 일어난다. 연기학원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면서 학원이 폐업을 하면, 수업료를 돌려받지 못하기도 한다. 

한 웹드라마 제작사 A 감독이 꿈 팔이 의혹에 휩싸였다. 그는 ‘아이가 오디션에 합격하려면 연기 트레이닝이 필요하다’며 아역 배우 부모들에게 25회에 300만원짜리 연기 수업을 제안했다. 수업은 5차례가량만 이뤄졌고 이후 그와의 연락은 끊겼다. 

“돈 주면 데뷔”

고소하겠다고 항의해 돈을 일부 돌려받은 부모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 아이 앞가림에 방해가 될까봐 쉬쉬했다. 전국출연자노조에 따르면 피해자는 수십명이다.

피해 부모들에 따르면 A 감독은 출연료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은 채 인당 3만∼4만원의 출연료를 지급한 사실도 있다. 일반적인 1회 보조출연료보다도 적은 금액이다.

A 감독은 지난 23일 출연자노조 측에 사실을 인정하고 문제를 해결해나가겠다고 밝혔다. <구>
 

<기사 속 기사> 보람튜브 아동학대 논란

최근 건물을 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화제가 된 ‘보람튜브’가 아동학대 논란에 휩싸였다. 2017년 보람튜브는 전기 모기채로 아이를 협박해 춤을 추게 하는 연출, 임신과 출산을 흉내 내게 한 연출, 아빠 지갑서 돈을 훔치는 상황 연출 등으로 그해 9월 국제구호개발단체 ‘세이브더칠드런’으로부터 몇몇 아동 채널 운영자와 함께 고발당한 바 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당시 “해당 유아뿐만 아니라 영상의 주 시청자인 유아와 어린이들에게도 정서적 학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또 보람튜브는 과거 다소 과한 설정 때문에 일부 맘카페서 논란이 되거나 유튜브로부터 몇 차례 경고를 받기도 했다. 

재주는 아이가 돈은 부모가?

논란이 불거진 후 보람튜브는 사과했고 논란이 된 영상을 모두 비공개로 전환했다.

보람튜브 측은 “초창기 업로드 영상을 포함 일부 비판을 받았던 영상에 책임을 통감하고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아이를 키우는 부모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이후 1년 이상 큰 논란이 될 만한 자극적인 콘텐츠는 제작되지 않았다. 현재 일부 부모들은 보람튜브가 대다수 ‘키즈 크리에이터’ 채널에 비해 유해한 것은 아니라고 평한다.  

과거 논란에 대해서 오히려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부모도 있다.

보람튜브를 향한 비난이 뜨거워지자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비난이 ‘질투’에 기인한 것이 아니냐”는 내용의 게시글이 올라와 인기를 끌었다.

이번 비난이 일반인은 열심히 노력해도 평생 못 벌 돈을 한 달 만에 번 데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라는 이유다.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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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