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세계 최초 ‘디 오픈’의 역사

‘디 오픈(THE OPEN)’은 스승 알렌 로버트슨을 기리기 위해 톰 모리스가 주최한 세계 최초의 공식 대회로 1860년에 시작해 21세기인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전설의 디 오픈의 시작을 확인했다.
 

첫 닭이 울던 새벽 5시경. 잠을 설치던 톰 모리스 시니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그는 9살 된 아들 톰 주니어를 깨웠다. 오늘 벌어질 경기는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대회였다. 아들 주니어는 아버지의 캐디를 자처했다.

구름 관중

1860년 10월17일 7시, 스코틀랜드 서쪽 해변가의 프레스트윅(PRESTWICK) 골프장에는 이른 시각에도 불구하고 1만여명의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영국에서 이름깨나 날리는 골퍼 8명이 한판 대결을 벌이기 위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날 대회는 스코틀랜드의 골프지존으로 군림하던 알렌 로버트슨의 사망 1주기를 기리는 한편, 그의 죽음으로 공석이 된 영국 골프의 최강자를 가리자는 취지였다.

이 대회는 모리스 한 사람의 노력으로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의견차이로 스승 알렌으로부터 올드코스 공방에서 쫓겨나 프레스트윅에 둥지를 틀었지만, 그는 늘 알렌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를 추도하면서 대회를 주최했고 스승의 영전에 우승트로피를 바치고자 했던 것이다. 골프의 신 알렌이 사망한 뒤 당대 최고의 고수로 불리는 그로서는 원년 대회에서 우승을 해야 하는 막중한 의무가 있었다. 

조촐하게 태동한 이날 경기는 세계 최초의 공식 대회이자 21세기까지 이어져 오는 디 오픈의 시초였다. 비록 8명이 참가한 작은 대회였지만 조직위원회 등 격식은 갖추었다. 참가한 프로들에게 상금은 없었지만, 대신 프레스트윅 회원들의 경기에서 우승자에게 수여되던 모로코가죽으로 만든 붉은색 벨트가 트로피를 대신했다. 가죽 벨트는 다섯 개의 은색 버클 위에 골프 치는 장식이 새겨진 화려하고 값져 보이는 것이었다.
 


최초의 디 오픈이 명실공히 올드코스에서 열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생소한 프레스트윅이라는 곳에서 열린 이유는 모리스의 노력 때문이었다. 새로 발명된 고무공을 사용하다 가죽볼의 장인인 스승 알렌으로부터 쫓겨난 뒤 거취를 정한 곳이 에든버러 서남쪽에 위치한 프레스트윅 골프장이었다. 모리스는 이미 5~ 6년 전부터 스코틀랜드를 대표할 골프대회를 열 계획을 차분히 다져가고 있었다. 알렌의 죽음으로 파워를 잃은 올드코스에서는 설상가상으로 옥수수밭 개간업자들과의 고소 건으로 대회는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모리스는 잔디의 촉감, 벙커의 모래까지 모두 머릿속에 꿰뚫고 있었다. 직접 페어웨이의 잔디를 깎고 그린을 보수하면서 프레스트윅을 당대 최고의 골프장으로 만들어가고 있던 것이다.

유력한 우승 후보는 알렌의 그늘에 가려졌던 모리스와 윌리 파크였다. 윌리는 당시 모리스 못지않게 골프 명가로 알려진 파크패밀리의 선봉장이었다. 경기는 단 하루, 프레스트윅 코스의 12홀을 3번 도는 36홀 스트로크 방식이었다. 12홀의 총 길이는 3800야드로 18홀을 하루에 두 번 도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스승에 대한 존경심서 출발
1860년 시작 현재까지 경기

경기는 정오에 시작됐다. 파크는 앞 조에, 모리스는 뒷 조에 속했다. 홈구장의 모리스는 차분히 경기에 임했다. 그러나 경기 초반부터 팽팽한 접전으로 생각됐던 예상은 깨지기 시작했다. 윌리의 샷이 모리스보다 10야드 이상 더 나가곤 했던 것이다. 모리스는 라운드 내내 신들린 샷을 보여주는 파크를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12홀의 첫 라운드 결과는 파크가 55타를 쳐 58타를 친 모리스에게 3타나 앞섰다.

휴식 시간 없이 두 번째 라운드가 속개됐다. 쌀쌀한 스코틀랜드 특유의 바람은 샷을 방해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두 선수는 바람이나 날씨를 탓할 수 없었다. 혼신을 다해 만회한 모리스와 도망가려는 파크의 접전이 이어졌다. 2라운드 결과는 두 선수 모두 59타로 동타를 이뤘다. 여전히 점수는 파크의 3타 차 리드였다. 1만여명의 갤러리들도 지칠 줄 몰랐다. 열심히 두 패로 갈라져 응원에 열을 올렸다. 

주최 측에서 제공한 짧은 점심식사 후 마지막 3라운드가 시작됐다. 드디어 1, 2위인 파크와 모리스 두 선수가 한 조가 돼 출발했다.

39세의 모리스가 27세의 파크를 상대하기에는 체력적으로 벅찼다. 모리스는 183센티미터의 장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크의 드라이버 샷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모리스는 대신 정교한 샷으로 맞섰다. 3라운드 결과 모리스는 59타, 파크는 60타를 쳤다. 모리스는 한 타를 따라잡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윌리의 팬들은 환호성을 올렸다. 모리스는 58-59-59로 176타를, 파크는 55-59-60로 2타를 앞선 174타를 기록했다. 그렇게 골프지존의 자존심이 걸린 제1회 디 오픈의 우승벨트는 파크의 허리춤에 채워졌다.


영국골프 가리는 성지
모리스 노력으로 성사

모리스의 패배 소식은 전 영국으로 퍼져 나갔다. 알렌 이후 당대 최고라는 명성을 누리던 모리스는 자존심을 구겼다. 더구나 홈그라운드에서 가진 초대대회에서 졌으니 그 상심이야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날 대결이 끝은 아니었다. 향후 수년간 두 사람의 자존심 대결은 계속됐고 두 집안은 대를 이어 영국골프를 이끌어 나가는 골프명가로 거듭나게 됐다.

자존심

절치부심한 모리스는 2회째를 비롯해 훗날 디 오픈에서 총 4번을 우승해, 3번 우승에 그친 윌리 파크에게 잃었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원년 대회의 우승보다 더욱 큰 것을 얻었다. 향후 10년간 오직 프레스트윅에서만 디 오픈을 치르는 자격을 얻어낸 것이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