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세의 골프 인문학>

‘골프의 신’으로 불린 사나이

어떤 분야든지 ‘신’이라는 칭호를 받는 사람이 존재한다. 골프에서도 ‘골프의 신’이라 불리는 이가 있었다. 174년 전인 1844년, 스코틀랜드에 내기골프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프로가 한 명 있었고 그가 바로 골프의 신으로 불린 알렌 로버트슨이다.

알렌 로버트슨은 올드 코스에서 현역 헤드프로를 겸한 신으로 불리는 골퍼였다. 당시 프로들은 지역에 기반을 두고 단둘이 맞짱을 떠서 진정한 고수를 가렸는데, 예를 들어 윌리와 멍고 파크 형제는 머슬버러에, 윌리와 제이미 던 형제는 잉글랜드 블랙히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식이었다.

전국구

세인트앤드루스뿐 아니라 알렌은 전국구로도 최고였다. 그에게는 늘 도전이 있기 마련. 날마다 찾아오는 도전자들의 등쌀에 골치가 아팠지만 알렌은 기꺼이 다 받아주었다.

1843년 블랙히스에 기반을 둔 떠오르는 별이었던 22세의 윌리 던이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코틀랜드의 문헌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프로골퍼 명승부’는 그렇게 열렸다. 알렌은 최고답게 “골프장과 경기 방식은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고, 윌리는 8홀밖에 없었던 머슬버러에서 하루 2라운드씩 열흘 동안 싸우자고 제안했다. 누가 이길지 초미의 관심사가 된 가운데 스코틀랜드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무패 내기골퍼
알렌 로버트슨 독보적 존재


세인트앤드루스 항구에서 자그마한 배에 몸을 싣고 진검승부를 떠나는 알렌은 북해의 바람을 맞으며 갑판 위에서 잠시 회상에 잠겼다. 1610년 6대조 할아버지가 가죽볼 제조업자의 사위가 된 인연으로 6대째 가업을 이어받았고, 성실히 페더리 볼과 클럽을 만들면서 올드 코스 공방의 주인이 됐다. 왕들의 경기에도 초청 1순위였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한 푼이라도 돈이 걸리는 내기에는 냉정한 전사로 변했다. 상대인 윌리 던 역시 골프명가의 자손이었다. 윌리는 기필코 알렌을 이겨 잉글랜드를 비롯해 명가인 스코틀랜드에서도 인정을 받고 싶었다.

머슬버러의 혈투가 시작되는 첫날,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알렌의 샷을 시작으로 대결은 시작됐다. 한 라운드씩 주고받으면서 숨 막히는 혈전의 연속이었지만 5일째가 돼도 매치플레이의 스코어는 1다운, 1업도 없는 동점, 올 스퀘어였다. 9일째 경기에 접어들어서야 알렌이 겨우 1라운드를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날 오전 대결에서 윌리가 이기면 다시 올 스퀘어가 되고 마지막 오후 라운딩까지 치러야 했다. 알렌은 오전에 승부수를 띄웠다. 마지막 라운딩에서 그는 평상시보다 클럽을 길게 잡았다. 170cm가 안 된 작은 키에 왜소했던 그는 거리를 늘리거나 승부수를 띄울 때는 손바닥이 골프채 위쪽의 그립 끝에 위치하게 바짝 잡는 버릇이 있었다. 자신의 클럽은 평균보다 1/2인치 정도를 길게 만들곤 했던 그였다. 알렌은 역시 골프의 신으로 손색이 없었다. 윌리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오전 라운드를 이겨 인류 최초의 프로골퍼 간 대결을 승리로 장식했다. 

알렌은 영국인들에게 더욱 큰 존경을 받았다. 이날의 대결은 선수들끼리의 대결에 큰 기폭제 역할을 했으며 이후 영국에서는 프로골퍼들 간의 내기와 자존심이 걸린 대결이 수없이 치러졌다. 영국 도처에서 치러진 많은 비공식 대결은 훗날 프로골퍼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축을 벌이는 오늘날 골프대회의 초석이 됐다.

문헌 기록상 유일무이
80타를 깬 최초 선수

너무나 완벽하면 신도 질투를 하던가. 승승장구하던 알렌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왔다. 1858년 새로 발명된 고무공은 가죽볼을 만드는 알렌의 종말을 재촉했다. 고무공은 열을 가해서 다시 만들 수도 있고 깨지지도 않았으며 비싸지도 않았다. 골퍼들이 고무공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했다. 알렌의 수제자이며 훗날 올드 코스 공방을 이끌어 나갈 영국 골프의 아버지라 불리는 톰 모리스와의 결별도 고무공 때문이었다. 고무공을 쳐본 알렌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비싼 가죽볼보다도 50야드는 더 나갔다. 온화한 성격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알렌이지만 집안을 망하게 하는 데는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즉각 주워 온 고무공들을 모두 태워버리라’면서 고무공을 가져온 모리스를 내쫓았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페더리 가죽볼 장인들이 괴질을 앓더니 알렌은 급기야 폐렴을 동반한 황달로 44세 나이에 세상을 뜨게 되었다. 마지막 타오르는 골프에 대한 열정이었던가. 죽기 1년 전 그는 골프 역사에 영원히 남을 족적을 남겼다. 역사상 최초로 올드 코스 18홀에서 79타를 쳐, 80타를 깬 최초의 골퍼가 됐다.

챔피언


당시는 나무채로 100타만 쳐도 챔피언이 될 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가 사망한 지 159년이 지난 2015년, 필자는 세인트앤드루스의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는 그를 찾았다. 묘비 뒤쪽은 돌로 깎은 골프채로 장식됐으며 앞쪽의 묘비명엔 그의 초상화와 함께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개인적으로 많은 존경을 받던, 스코틀랜드의 특출했던 챔피언이 여기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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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단독] ‘채 상병 사건’ 사단장 수상한 메시지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김철준 기자 = ‘채 상병 사건’의 핵심 관계자인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여러 차례 연락을 취한 것으로 파악됐다. 자신의 사건을 언급하면서 사실관계를 확인하려 한 게 핵심이다. 임 전 사단장과 연락이 닿은 인물들은 대부분 이해관계자다. 자칫하면 회유 정황으로 보일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임성근 전 해병대 제1사단장은 ‘채 상병 사건’의 핵심 피의자다. 수사외압 논란의 시발점이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직접 챙긴 인물이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의 수사 대상인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사건을 물밑에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다 왜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침묵 지키다… 임 전 사단장은 최근까지 복수의 해병대 간부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는 간부 A씨에게 “(공수처)수사가 종결되지 않은 상황서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어서 연락하지 못했다”며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은 없었다. 다만 “모두가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고, 현재도 겪고 있지만 아들을 잃은 채 상병의 유족 특히 모친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버티고 있다. 진실을 밝힐 때까지는 고통스러워도 견딜 생각이다.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전했다. 임 전 사단장은 A씨에게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하 대령)의 변호인이었던 김경호 변호사에게 내용증명을 보낸 것과 관련해 민·형사 소송을 준비 중이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뉘앙스로 연락을 취했다. 김 변호사가 자신을 고발한 게 무고에 해당하는지와 사실관계 확인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타 간부들에게도 비슷한 도움을 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 간부는 <일요시사>와의 연락서 “난감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모셨던 사람이긴 한데 임 전 사단장에 대해 개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사람이 채 상병 사건 진상규명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 전 사단장은 과거 박 대령에게도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바 있다. 자신은 물속 수색을 하지 말라는 지시를 수차례 했고 작전통제권이 육군 50사단장으로 넘어간 상황서 자신의 책임과 범위 내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며, 이에 대한 박 대령의 기억과 판단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공수처 수사 대상인데… 사건 연루자들에 연락 당시 임 전 사단장은 “상급지휘관(임 전 사단장)에게 작전통제권은 없지만, 부대를 방문해 전술토의할 수 있고 효율적인 작전이 되도록 유도할 권한은 있다”고 했다. 작전통제권이 없어 안전 책무가 없다면서도, 자신이 현장서 ‘수변을 수색하라’고 지휘한 건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이런 이유로 임 전 사단장은 자신의 직권남용 문제를 언급한 해병대수사단의 조사 결과 보고서가 잘못됐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해병대 수사단은 임 전 사단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적시하지 않았다. 수사단은 ‘작전통제권과 상관 없이’ 임 전 사단장을 실질적 수색작전 지휘관으로 보고, 안전지침을 부대에 하달하지 않아 채 상병 순직사고가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임 전 사단장은 김 변호사와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법적 대응까지 예고했다. 김 변호사가 SNS에 게시한 글 중 허위 사실이 포함된 내용이 있다는 게 임 전 사단장의 주장이다. 그는 김 변호사에게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한계 속에서 해석과 이해를 거쳐 어떤 주장을 하는 것에 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근에도 같은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악의적이라고 생각한다”며 “해병대 수사단 자료의 문제점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발견됐고, 제가 사안의 진상을 밝히면서 그걸 뒷받침하는 자료를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허위가 여론을 조작하고 진실을 가리는 불의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 나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을 공수처에 세 번째로 고발했다. 이번 혐의는 군형법 제79조 무단이탈죄다. 군인권센터에 따르면, 임 전 사단장은 지난 1월 말 서울 노원구에 있는 화랑대연구소가 아닌 영등포구에 위치한 해군 관사 ‘바다마을아파트’에 거주하며 인접한 해군 재경근무지원대대 사무실로 출근 중이다. 마음 급해졌나…어떤 의도? 갑자기? 특검 압박 느꼈나 이 사실은 그가 여러 곳에 자신이 결백하다는 취지의 문서를 내용증명, 등기우편 등으로 보내면서 드러났다. 등기 봉투의 발신지는 화랑대연구소였으나 배송 조회 결과 실제 발신지는 서울 신길7동 우편취급국이었다. 임 전 사단장이 거주 중인 서울 관사 인근이다. 발송 시간도 대부분 일과시간 직전이나 일과 중이었다. 임 전 사단장은 언론을 통해 “연수 초기에 육사에서 주로 근무했으나 장거리 출퇴근 비효율적이라서 최근엔 해군재경대대서 근무 중이다. 근무 장소 중 하나가 해군 재경대대”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김 변호사는 “정책 연수의 일시와 출퇴근 시간 및 장소가 명령으로 특정된다. 인사명령의 지정된 장소서 지정된 출퇴근 시간을 준수해야 한다”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인사명령이나 상급기관의 지휘관에게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최근 자주 번호를 변경하는 임 전 사단장의 핸드폰을 압수수색해 무단이탈한 장소와 상급지휘관인 해병대 사령관에게 정식으로 사전에 허가를 받았는지에 관한 진실을 밝혀 강력히 처벌해 달라는 취지”라고 전했다. 김 변호사는 “임 전 사단장이 해병대 간부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행동이 증거인멸 시도로 볼 수 있다”며 “자신의 책임을 부정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내며 같이 책임을 면하자는 회유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공수처는 지난 1월부터 해병대 수사단의 조사 결과와 경찰 이첩 과정서 외압이 있었는지에 대해 강제수사를 착수해 왔다. 박 대령에게 사실확인요청서를 보낸 것에서 임 전 사단장이 적극적인 책임 회피에 나섰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현재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권서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자 조용했던 임 전 사단장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부적절한 처신 한 해병대 간부는 “전우의 죽음 이후 형평성에 어긋나거나 석연치 않은 윗선의 처리는 진상규명 문제를 떠나 정치권 개입을 불렀다”며 “도의적 책임도 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일부 작자들의 행동으로 인해 해병대 전체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임 전 사단장은 <일요시사>가 사건 관계인에 연락한 이유에 관해 묻자 "사건 관계인에게 연락한 것은 사실 확인을 위한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hounder@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