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경기침체, 실업률증가, 물가인상, 주가폭락. 듣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단어들이 뉴스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웬만큼 쇼킹한 소식이 아니라면 이젠 어떤 경제사정을 들어도 무덤덤하다. 그러나 얇아진 지갑만큼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특히 출근길부터 퇴근길까지 돈을 쓰게 되는 직장인들은 초라한 통장잔고와 텅 빈 지갑으로 인한 상실감을 매순간 느끼게 된다. 이 때문에 소비습관과 생활패턴을 바꾸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도시락열풍으로 인해 지하철에서 김치냄새가 풍기는 것은 이 현상의 신호탄 격이었다. 불황극복을 위한 직장인들의 달라진 일상생활을 살펴보자.
서울 강남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이모(28·여)씨. 최근 그의 기상시간은 1시간 정도 늦춰졌다. 지난달까지 다녔던 새벽수영을 그만뒀기 때문이다. 1년 동안 꾸준히 했던 수영을 그만둔 것은 임금이 동결됐다는 소식을 듣고부터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월급쟁이들의 푸념이 자신에게도 현실이 되자 꼭 필요하지 않은 지출은 안하기로 결심하게 됐다.
아침운동을 그만둔 대신 이씨는 아침밥을 지어먹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샌드위치나 김밥 등 아침거리를 사서 회사에서 동료들과 아침식사를 했지만 그마저도 아까운 생각이 들어 직접 아침밥을 차려먹게 된 것.
회사에 입고 갈 옷을 고를 때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엔 화려한 정장이나 튀는 캐주얼복장을 선호했다면 최근엔 평범한 정장을 자주 고른다고 한다. 자주 입어도 그리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의류비도 대폭 줄인 만큼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입어도 알아채지 못하는 무난한 정장을 자주 입는다고. 치마 대신 바지를 선호하기도 한다. 이유는 스타킹에 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예전엔 푼돈으로 여겼던 팬티스타킹도 따져보니 만만치 않게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다.
출근길도 바뀌었다. 회사와 20분 거리의 오피스텔에서 살고 있어 종종 택시를 이용해 출근을 했지만 이젠 지각을 하는 일이 있더라도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한다. 또 환승할인에 집착을 하게 됐다. 단돈 100원이라도 할인받기 위해 버스를 탈 때도 전략을 짤 정도라고 한다.
습관적으로 들렀던 회사 앞 테이크아웃 커피점도 거침없이 지나친다. 5000원이 넘는 커피를 사마실 바에는 좀 더 돈을 보태 원두커피 한 봉지를 사서 직접 내려 마시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불황 이전에도 이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몸에 밴 습관을 떨치는 것이 어려웠다. 아니 굳이 떨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습관적 낭비습관 버리고 현명한 소비하는 이들 늘어
생활패턴에서 데이트코스까지 돈 아끼는 방법 연구
달콤한 카라멜 맛 커피를 포기한 대신 이씨는 탕비실로 직행해 머그컵에 믹스커피를 타서 마신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방커피라 비웃었던 커피였다. 때론 한두 개씩 집어와 책상서랍에 보관하기도 한다.
요즘 들어 탕비실에 있는 커피믹스와 녹차티백 등이 자주 떨어져 미리 챙겨두기 위해서란다. 며칠 전 회사 비품을 챙기는 총무실 직원이 “요즘 커피나 볼펜, A4용지 같은 비품들이 왜 이렇게 빨리 없어지지”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이후 생긴 습관이란다.
점심메뉴는 물론 집에서 싸온 도시락이다. 5000원으로도 마땅히 먹을 게 없어 동료들과 도시락을 싸와 사무실에서 먹기 시작한 것. 이를 위해 거금 5만원을 들여 보온도시락을 사기도 했다. 처음엔 별로 내키지 않았던 도시락 싸기에도 이제 재미가 붙어 인터넷에서 밑반찬 레시피를 자주 찾아보고 있다.
후식으로 아기자기하게 포장된 비싼 과일이나 생과일쥬스 등을 사먹던 습관도 버렸다. 시장에서 산 사과나 귤 등을 가져와 동료들과 나눠 먹는 게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퇴근 후 남자친구와의 데이트코스도 바뀌었다. 영화보기를 즐기는 이씨와 남자친구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대신 DVD를 빌려 이씨의 집에서 오붓하게 데이트를 즐긴다. 그리고 근처 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와 함께 만들어 먹어 외식비를 대폭 줄였다. 주말여행지도 달라졌다. 기름 값을 줄이기 위해 가까운 경기도 인근으로 여행코스를 잡게 됐다.
친구들과의 모임도 달라졌다. 이전엔 여자친구들과 와인바에서 수다 떠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10만원이 훌쩍 넘는 술값을 감당하기가 벅차 집으로 친구들을 불러 와인파티를 열게 됐다. 마트에서 산 1만원대의 와인과 치즈 등의 안주로 저렴하게 와인을 즐기는 방법을 택한 것. 와인을 들고 와인바로 가 콜키지(Corkage: 식당에 와인을 들고 가 병당 금액을 지불하고 마시는 방식)를 내고 마시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옷, 화장품, 생필품 등 각종 제품의 쇼핑방식도 달라졌다. 백화점 대신 아울렛에서 이월상품의 옷을 구매하고 화장품도 정품보다 작은 샘플화장품을 인터넷에서 사서 사용한다. 휴지 등 생필품이나 과일, 채소 등도 인터넷에서 구입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씨는 “그동안 습관처럼 몸에 밴 소비패턴을 바꾸는 것이 아직은 쉽지 않지만 아끼고 절약하는 소비생활이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다”며 “불황과 얼어붙은 월급통장이 힘 빠지게 해도 푼돈이라도 아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 것은 큰 수확”이라고 말했다.
이씨처럼 많은 직장인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예전의 소비생활을 버리고 절약하는 습관을 몸으로 익히고 있다. 금방 스쳐 지나갈 불황이 아니라 장기전으로 갈 태세를 보이고 있다는 우울한 뉴스는 허리띠 졸라매는 이들을 증가시키고 있다. 보온도시락, 가계부, 내복 등의 제품이 인기상품으로 떠오른 현상 등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통계로도 나타난다. CJONmart가 지난달 25일부터 30일까지 회원고객 8870명을 대상으로 ‘소비자 연말 소비 계획’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53%(4662명)가 ‘생활비를 줄였다’고 답했다. 절약 항목별로는 ‘문화·레저활동비(44%·3926명)’가 1위를 차지했으며 의류(25%·2212명), 식비(19%·1692명) 순이었다.
이처럼 경기불황은 불필요한 낭비를 최대한 줄이고 현명한 소비생활을 계획하는 이들을 증가시키는 뜻밖의 수확을 안겨주고 있다. 불황의 그늘 속에서 희미하게 새 나오는 희망의 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