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노건평 씨 구속에 이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정대근 전 농협회장이 구치소 신세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검찰의 수사가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참여정부 핵심 인사들에 대한 로비 의혹이 여전히 베일에 쌓여있어서다.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의 ‘맘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침묵으로 일관하며 김해 봉하마을에서 참여정부에 대한 사정향배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정치권에서는 친노인사들이 위기에 내몰린 만큼 친노세력 와해 등 노 전 대통령의 입지가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관측하고 있다. 결국 노 전 대통령에게 봉하마을은 지금 유배지 아닌 유배지인 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형 건평 씨 구속으로 침묵모드로 돌입했다. 그의 정치적 위상도 이젠 절대적 추락 위기에 빠진 셈이다. 노 전 대통령은 형 건평 씨의 구속과 관련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다만 참담하고 굳은 표정만을 짓고 있을 뿐이다. 노 전 대통령은 온종일 내부에서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실제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 비리와 관련, 형 건평 씨의 구속으로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방문객 맞이 행사’도 지난 12월5일부터 중단했다. 일주일에 하루를 빼고 매일 두 차례 이상 방문객들과 대화하고 사진을 찍는 일도 없어졌다. 이는 노 전 대통령의 심기가 간접적으로 드러난 것.
황폐해진 봉하마을
측근 인사들 줄줄이 구속
이에 따라 노 전 대통령을 보기 위해 봉하마을을 찾던 관광객들의 발길도 뚝 끊겼다. 노 전 대통령 얼굴에는 착잡함과 침통함이 . ‘친인척 게이트는 없다’며 참여정부의 도덕성만큼은 자신하던 그는 이제 더 이상 기댈 것도 바랄 것도 없는 칠흑같은 어둠에 빠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형 건평 씨 사건에 대해 아무 할 말이 없다”며 “지금 국민들한테 사과를 해야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전직 대통령으로서 도리도 있겠지만 형님의 동생으로서 도리도 있다”고 형이 구속된 마당에 어떠한 말도 할 입장이 아님을 밝혔다.
이어 그는 “형님이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사과를 해버리면 피의사실을 인정해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어서 국민들에게 뭐라 말씀도 드리기 어렵다”며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민에게 해야 할 도리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 사람의 가족으로서, 동생으로서 도리도 있는 것 아니냐. 모든 사실이 다 확정될 때까지는 형님의 말을 부정하는, 앞지른 판단을 말하거나 할 수는 없는 처지”라고 마지막으로 그를 찾아온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 전 대통령은 참여정부 초기에 “청탁하다 걸리면 패가망신시키겠다”며 측근 인사들의 부정 비리에는 가차없는 조치를 취하겠다는 발언을 했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뀐 후 속속 들어나고 있는 자신의 측근비리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 때부터 유독 측근들의 비리에 대해서는 사과를 주저하는 경향을 보였다. 최도술, 안희정 등 ‘측근비리’가 터져 나왔을 때 노 전 대통령은 “내가 감독하고 관리해야 할 사람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대선 이후에 저지른 어처구니없는 실수에 대해 나도 마음이 아프고 용서하기 어렵다. 그 사람들이 치부나 축재를 하기 위해 돈을 모은 게 아니라 대통령의 체면치레를 위해 앞으로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해 알아서 관리했던 것으로 본다”고 애써 두둔했다.
실제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이 형 건평 씨에게 수천만원을 주고 청탁을 했을 때도 화살은 남 전 사장을 향했다. 사실상 건평 씨에게 ‘면죄부’를 준 셈이다. 남 전 사장은 끝내 자살을 택했다. 자신의 발언으로 인해 그런 일이 생길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상황이 이런 가운데 검찰은 참여정부 핵심 인사들을 향해 사정의 칼날을 들이밀고 있다. 조만간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강철 전 청와대 정무특보도 소환할 예정이어서 측근들에 대한 형사처벌이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구속된 건평 씨에 대한 검찰 수사내용을 살펴보면 건평 씨는 동생인 노 전 대통령의 생각과는 다른 역행보를 걸어 온 것으로 나타났다. 2004년 3월 노 전 대통령이 탄핵 파문에 휩싸였을 때 건평 씨는 자신의 회사인 정원토건에서 10억원을 빼내 리얼아이디테크놀러지에 차명으로 주식투자를 했다. 동생의 정치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 고수익을 노리고 회사 돈으로 주식 투자를 한 셈이다.
건평 씨가 리얼아이디테크놀러지의 유상 증자에 참여해 주식을 교부받은 시점은 3월11일. 다음날인 3월12일 국회에서 당시 야3당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의결했다. 그후 건평 씨는 또 한 번 일을 저질렀다. 세종캐피탈 측이 로비성공사례금으로 건넨 30억원 중에서 10억5000만원을 투자한 경남 김해시의 사행성오락실이 개장한 시점은 2006년 7월. 검찰은 이 오락실을 건평 씨와 정화삼 씨 형제의 공동재산으로 보고 있다.
이때는 ‘바다이야기’ 등 사행성게임이 전국에 유행병처럼 번져 이를 방치한 참여정부가 여론의 비판을 받던 때였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도둑을 맞으려니 개도 안 짖더라”며 사행성 오락의 폐해를 미리 감지하지 못한 정부시스템을 개탄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때였다. 형인 건평 씨는 당시 사행성오락실 개장에 깊이 연루돼 있었다.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은 1971년 나이키 상표 신발 제조로 유명한 태광실업의 전신인 정일산업을 경남 김해에 세우면서 당시 세무공무원이었던 건평 씨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이 88년 부산에서 국회의원 후보로 나섰을 때, 동생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건평 씨가 내놓은 김해 땅을 사들였다. 17대 대선을 앞둔 2002년에는 건평 씨가 동생의 대선 출마를 돕겠다며 내놓은 거제 부동산도 샀다. 김해상공회의소 회장이던 그는 당시 부산 경남 일대에서 현금 동원력이 가장 높은 재력가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뗄레야 뗄 수 없다”
3인방과 얽히고설킨 사연
‘지역 유지’이던 박 회장이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때다. 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의 측근 안희정 씨에게 7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건넨 혐의로 기소돼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정치권에서는 이 때문에 ‘대통령의 후원자’라는 명성을 얻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나돈다. 노 전 대통령 주변에서는 박 회장이 ‘기피 대상’이었다는 말도 나오지만, 그와 참여정부의 인연은 계속 이어진다.
박 회장의 셋째 딸은 2003년 청와대 국정상황실에서 일하기도 했다. 또 2006년 5월 부인과 회사 임직원 등 5명의 이름으로 열린우리당 의원 20여명에게 300만~500만원씩 모두 9800만원의 후원금을 냈다가 벌금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10월 2차 남북정상회담 때 대기업 총수들과 함께 북한 방문단에 끼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마련한 봉하마을 사저 터는 박 회장의 최측근인 정모씨 이름으로 돼 있던 땅을 사들인 것이다. 박 회장이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으면서 그의 ‘입’은 태풍의 핵으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구속수감중인 정대근 전 농협 회장과의 유착관계를 이용해 농협의 자회사인 휴켐스를 인수했다는 의혹이 밝혀짐으로써 관심의 초점은 박 회장의 ‘정·관계 커넥션’ 여부에 맞춰지고 있다. 정 전 회장이 50억원을 참여정부 인사들에게 줬다고 진술함으로써 향후 이들 역시 검찰 문턱을 들락거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친노 인사 줄줄이 소환
노무현·친노세력 최대 위기
이 때문에 노 전 대통령 일가와 농협과의 ‘인연’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 인연은 참여정부시절 국정감사 과정에서 여러 차례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정도로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국감에서 한 야당의원은 “노무현 대통령과 정대근 농협중앙회장은 남다른 친분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노 전 대통령은 부산상고 졸업 후 농협 입사시험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경험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 전 대통령 당선직후 부산상고 동기생들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노 당선자가 젊은 시절 농협 입사시험에 낙방한 후에 어망회사에서 일하기도 하는 등 역경을 극복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대통령 당선 직후인 지난 2002년 12월25일 열린 노 전 대통령의 아들 건호 씨 결혼식장에는 5개의 화환만 놓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의 것이었던 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는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앞서 건호 씨는 결혼 발표 기자회견에서 “장인 될 분은 경남 김해에서 농협 전무를 지내다가 퇴직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농협측은 노 당선자에 대해 대대적인 축하광고를 도하 언론에 게재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 사돈인 배병렬 씨는 모 단위농협 전무 출신으로 노 전 대통령과 사돈을 맺은 지 한달만에 농협중앙회 자회사로 농협이 60%의 지분을 쥔 농협CA투자신탁(현 NHCA자산운용)의 비상임감사로 임명됐다.
또 6개월 후에는 상임감사가 됐으며 감사위원장으로 재직하다 얼마 전 사표를 낸 것으로 확인됐다. 농협 구조조정에 따라 8일 자회사 임원 50여명이 일괄 사표를 내면서 함께 사직서를 제출한 것.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친노세력 인사들에 대한 의혹들이 검찰 ‘레이더망’에 줄줄이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노 전 대통령 측과 친분이 두터운 정 전 회장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차제에 친노세력이 완전 와해되지 않겠느냐는 말들이 나돌고 있다. 여기엔 특히 386 정치인들이 대거 연루됨에 따라 친노진영은 ‘초토화’ 위기를 맞을 공산이 크다.
그간 친노세력은 ‘독자 신당’을 구상할 정도로 세를 확장하는 한편 주군인 노 전 대통령과 더불어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보여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검찰 수사 레이더망에 친노인사들이 대거 걸려들면서 ‘독자 신당’은 커녕 ‘친노세력 부활’도 먼 나라의 얘기라는 게 정치권의 일반적인 관측이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친노인사들은 궁극적으로 독자세력화를 꿈꿔왔다”며 “검찰 사정칼날로 인해 친노세력은 물론 노 전 대통령의 입지까지 축소돼, 당 내부에서는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끊어야 된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설명했다. 이는 민주당에서 배척 아닌 배척을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또 친노 내부에서도 친노인사들 간의 결집이 잘 되지 않고 있다는 말까지 전해지고 있다. 친노 핵심인사들이 바쁘다는 일정으로 모임에 빠지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많다. 그만큼 사정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대목이다.
자신을 지지하고 뒷받침해주는 세력이 완전 와해될 경우 가장 곤경에 처하는 이는 다름 아닌 노 전 대통령. 하지만 과거 행적에서 보듯 가장 어려움에 처했을 때 진가를 발휘했던 것도 역시 ‘역전의 용사’ 노 전 대통령이었다. 심지어 탄핵 위기에까지 내몰렸다가도 불사조처럼 되살아나 마지막 임기를 마쳤던 노 전 대통령이기에 이번 위기 역시 어떻게 극복해낼지에 초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