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지의 프로그램 편집권 요구논란과 관련해 파장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최근 서태지는 SBS <김정은의 초콜릿(이하 초콜릿)> 출연을 앞두고 제작진과 의견을 조율했다. 이 과정에서 서태지가 출연조건으로 일부 편집 및 최적의 음향 장비 설치 등에 관한 관여를 허가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현 국내 방송사 프로그램상 처음 있는 일이라 난항 끝에 결국 출연이 무산됐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네티즌들 사이에서 뜨거운 장외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초콜릿> 한 관계자는 “무대 미술적인 부분과 음향 설비는 제작비 한도 내에서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좋은 그림을 만들기 위해 녹화 전이나 녹화가 끝난 후에 가수와 협의를 할 수는 있지만 서태지 측에서 PD의 고유 권한인 편집권을 요구했다. 서태지의 무대는 욕심이 나지만 용납할 수 없는 요구라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같은 방송출연 무산 배경이 알려지며 네티즌들은 한쪽에선 “가수가 방송 편집권까지 요구하는 건 지나친 개입”이라고 주장하고 또 다른 측에선 “요구할 수 있는 뮤지션의 권리”라며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서태지를 비난하는 네티즌들은 “아무리 완벽한 무대를 꾸미는 것도 좋지만 지켜야할 선을 지켜야 한다”, “톱가수 일수록 겸손해야 하는데 너무 건방지다”며 날 선 시선을 보냈다. “노래하고 편집하고 다 하려면 차라리 자기 방송사를 따로 차리는 것이 낫겠다”며 독설을 퍼붓는 이도 있었다.
<초콜릿> 측 “PD의 고유 권한인 편집권 요구해 거절했다”
서태지 측 “음향 장비 가져가고 편집권은 공연부분만 요구”
서태지의 입장을 옹호하는 네티즌들은 “뮤지션으로 그리고 문화 대통령다운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울러 자신의 음악에 틀에 박힌 방송국 음향장치와 편집 형태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솔직한 뮤지션의 양심이었을 것이다”란 반응이 지배적이다.
서태지 소속사 측의 한 관계자는 “음악이 중심이 되는 프로그램에서 아티스트의 능력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요구한 것이다”라며 “음향 장비는 우리 쪽에서 가져가는 것이고 편집권은 공연부분만 요구했다”고 해명했다.
서태지 솔로 데뷔 이후
방송 편집 참여
한 문화평론가는 “서태지의 까다로운 요구에 대해 ‘특별대우를 요구한다’며 비난의 목소리가 크지만 과연 뮤지션이 방송사의 기존 시스템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그저 비난받아야 하는지는 재론의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는 보통 15~20개 팀이 출연한다. 짧은 방송 시간과 한정된 제작비 등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하면 개개인의 음악과 컨셉트에 맞게 음향과 조명·영상 등이 제대로 따라 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라며 “게다가 방송사 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시스템이 100% 뮤지션들의 역량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문에 보통 록밴드들은 방송사 사정에 따라서 라이브 연주가 아닌 ‘핸드싱크’를 하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뮤지션형 가수들은 방송사 출연을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다른 가수들도 각각 다른 요구들을 하기 마련이다. 가치판단이 들어가는 시사·보도 프로그램도 아니고, 단순히 노래 부르는 장면의 커트를 구성하는 일이 방송사의 편집권을 크게 해치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방송사의 낙후된 여건을 따르지 않고 가수 측에서 방송사에 보다 좋은 음악을 들려줄 수 있도록 요구조건을 걸었다고 해서 월권이라고 보는 것은 방송의 권력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라며 “방송에 대해 자신이 비용을 투자하고 보다 좋은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요구를 한 것 모두 서태지이기 때문에 가능한 상황이 아니겠냐”고 전했다.
서태지의 방송 편집권 요구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태지는 솔로 데뷔 이후 자신이 출연하는 음악 프로그램 등에 있어 줄곧 방송 편집에 직접 참여해왔다. 서태지가 최근 출연했던 SBS <인기가요>와 MBC <쇼! 음악중심>도 마찬가지다.
편집권 요구는
여러 문제점 양산
서태지의 편집권 요구는 여러 문제점을 양산한다. 첫 번째는 서태지의 편집권 요구가 명백한 월권이라는 것.
한 방송관계자는 “편집권은 방송 고유의 권한이다. 따라서 외부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 출연진과 방송사는 의견 조율과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되는 의무는 있다. 하지만 사전에 녹화된 내용을 미리 보여 달라고 요구하고, 그 내용을 임의적으로 편집하겠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편집권 요구가 자신이 출연하는 무대를 좀 더 잘 부각시키기 위한 애정과 열의라는 말도 있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 가수는 가수로서 해야 될 부분이 있고 제작진은 제작진으로서의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타 가수들의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것. 디지털 싱글의 발달로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대거 가수들이 컴백하고 있다. 톱가수들이 대거 컴백하면 신인들은 설 자리가 없다.
당초 출연 예정이었던 일정도 연기되고 계속 뒤로 밀리기도 한다. 앨범을 발매했어도 공중파 음악방송에 한 번도 출연하지 못하는 가수들도 허다하고, 2~3개월 후에 ‘쌩뚱’ 맞게 데뷔 무대를 치르기도 한다.
한 신인 매니저는 “방송 3사에 출연하는 것은 하늘에 별을 따는 것보다도 어렵다. 대형 가수들이 나란히 컴백하고 스페셜 방송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10여분 할애하면 출연은 포기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한 가요관계자는 “이런 첨예한 대립 의견 속에서도 서태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는 것에는 공통적인 모습을 보여 결국 이번 서태지의 요구는 비록 무산됐지만 보다 좋은 음악으로 팬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한 뮤지션의 이유 있는 행보는 널리 알려져 당분간 신선한 화제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