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삼성가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 정혜경 jhk@ilyosisa.co.kr
  • 등록 2012.02.21 11:40:34
  • 댓글 0개

잊혀진 ‘은둔의 제왕’…세상 밖으로 나온 이유 뭘까?

[일요시사=정혜경 기자] 삼성가 ‘비운의 황태자’로 불리는 이맹희씨의 이름이 연일 언론을 떠들썩하게 장식하고 있다. 최근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주식인도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이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형, 이재현 CJ 회장의 아버지인 그는 오랫동안 잊혀진 존재였다. 간혹 혼외정사로 인한 친자확인 소송, 양육비 소송 등으로 구설수에 올랐을 뿐이다. 삼성가의 황태자로 조명 받다 일순간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그의 굴곡진 인생사를 <일요시사>가 공개한다.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삼성그룹 사실상 진두지휘
차남 이창희씨 모반 사건으로 이 창업주 눈 밖에

올해 81세인 이맹희씨는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와 부인 고 박두을씨와의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부터 삼성그룹 안팎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지목됐다. 삼남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겐 미디어 관련 계열사가 맡겨질 예정이었다.

맹희씨 삶의 변곡점은 1966년 9월 찾아왔다. 아버지 이 창업주가 이른바 ‘사카린 밀수 사건’에 연루되면서다. 이 일로 이 창업주는 삼성그룹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고 당시 중앙일보, 삼성전자 부사장 등 그룹 내 요직을 맡고 있던 맹희씨가 사실상 그룹을 진두지휘하게 됐다. 눈앞에 탄탄대로가 펼쳐진 셈이다.

이병철 창업주
8남매 중 장남

그러나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맹희씨는 1971년 이 창업주의 눈 밖에 나면서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했다. 이 창업주는 회고록인 <호암자전>에서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 경영을 맡겨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 돼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맹희씨는 자신이 경영일선에서 밀려난 이유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 “6개월이 아니라 7년이었고, 물러난 것은 기업이 혼란에 빠져서가 아니라 몇 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였다”는 게 맹희씨의 변이다. 여기서 ‘복잡한 사정’이란 이 창업주의 차남인 이창희씨의 ‘모반’을 말한다.


당시 창희씨는 사카린 밀수 사건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고 6개월 정도 형을 살고 난 다음, 출옥 후 5년간 공식적으로 활동을 못하게 하는 법률상 제재조항으로 비공식적으로 제일모직 부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1969년말 맹희씨는 필립스와 합작 문제로 해외 출장길에 오른 상태였다. 왠지 기분이 이상해서 국내로 전화해 동생인 창희씨에게 “그동안 아버님께 문안을 드렸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시원찮았다고 한다. 무엇인가 숨기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황급히 일을 마무리 짓고 돌아왔다.

알고 보니 그 무렵 창희씨가 ‘도저히 해서는 안 될 일’을 했다고 한다. 이 창업주 및 삼성의 조직적 비리에 대해 청와대에 투서를 했다는 것. 여기에는 이 창업주가 영원히 기업에서 손을 떼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 외화 밀반출 등 당시엔 특히 심각하게 여겨지던 경제범죄 사실도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이런 투서 내용을 처음 접한 것은 당시 중령 계급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이는 박종규 당시 경호실장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됐다고 한다. 당시 이 창업주는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이 자신의 아들들을 ‘이용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이 창업주는 창희씨에게 불신을 품었다고 한다. 또 장님 맹희씨에 대해서도 비슷한 의심을 가졌다고 한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적어도 묵인은 했으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맹희씨는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 문제에는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고 맹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후 이 창업주는 1972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회장 복귀 의사를 내비치며 경영 전반을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맹희씨는 “창희 사건의 여파로 아버지와 나 사이에 내부적으로 보이지 않는 금이 생겼다”며 “아버지는 나와 함께 출근하고 퇴근하면서도 나에게 늘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을 풍기곤 했다”고 전했다.

1973년 어느날 이 창업주가 맹희씨를 불렀다. “너 지금 직함을 몇 개나 가지고 있냐”고 물었고 맹희씨는 “열댓 개는 되는 것 같다”고 답했다. 이 창업주는 “네가 다 할 수 있냐”고 다시 물었고 “네가 할 수 있는 것만 하라”고 선언했다고 한다.


직함 빼앗은 일 계기
눈에 띄게 반항적

맹희씨는 당시 삼성전자, 중앙일보, 삼성물산, 제일제당, 신세계, 동방생명, 안국화재, 제일모직, 성균관대, 삼성문화재단 등에서 부사장, 전무, 상무 등 17개의 타이틀을 갖고 있었고 이 창업주는 연필로 직함들에 줄을 죽죽 그으며 삼성물산, 삼성전자, 제일제당의 부사장 직함 3개만을 남겨놨다고 전했다. 그 뒤 이 창업주는 그룹 회장으로 경영에 복귀했다.

이 일을 계기로 맹희씨는 눈에 띄게 반항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맹희씨는 당장 일본으로 떠났다. 이 창업주가 일본을 찾았을 때도 그는 공항에 마중조차 나가지 않았다. 또 이 창업주가 도쿄지점 직원들과 회식을 하며 지시를 하는데 제동을 걸기도 했다고 한다. 맹희씨는 이 창업주가 자신의 권위에 대한 반기를 든 것으로 판단, 관계가 더욱 멀어지게 됐다고 회상했다.

1975년 봄에 귀국하고 나서도 ‘반항’은 이어졌다. 겨울에는 사냥하러 다니고 여름에는 워커힐에서 말을 타는 생활을 했다. 맹희씨는 “그때라도 자존심을 죽이고 매달렸으면 어떤 형태로든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차마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후 1976년 9월쯤 이 창업주는 암수술 차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날 밤, 가족회의에서 삼성의 차기 경영자로 삼남 건희를 염두에 두고 있다면서 구두로 유언을 밝혔다. 삼남 건희씨에게 삼성을 물려준다는 내용 이외에 삼성의 주식을 형제들에게 나누는 방식에 대한 지시는 없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맹희씨는 “그 말을 듣는 순간의 충격을 나는 잊지 못한다”며 “그 무렵엔 벌써 아버지와의 사이에 상당한 틈새가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언젠가는 나에게 삼성의 대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대권 받을 줄 알았는데 삼남 이건희 회장에 밀려
현재 베이징 초호화 주택 거주 대외 활동은 없어

1987년 이 창업주가 작고한 뒤 맹희씨는 해외로 떠났다. 그 이유에 대해 맹희씨는 “동생 건희가 정식으로 삼성의 총수가 된 마당에 그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며 “혹시 조금이라도 건희가 나를 부담스러워하면 그것이 바로 삼성의 경영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외국에서 영원히 살면서 귀국하지 않을 생각을 했었다”고 했다.

맹희씨는 이후 5년여 동안 아프리카, 남미, 미국,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여러 나라를 다니며 노력했지만 한 곳에 6개월 이상 머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아버지와의 갈등, 동생들에 대한 이야기 등이 공개된 것은 지난 1993년 맹희씨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묻어둔 이야기> 등의 책을 내면서다. 맹희씨는 책 출간 이후 다시 은둔에 들어갔고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자신의 장남인 이재현 CJ 회장의 딸이자 직계손녀인 경민씨의 결혼식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맹희씨는 이렇게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간혹 혼외정사로 인한 친자확인 소송, 양육비 소송 등으로 구설수에 올랐을 뿐이다. 1961년부터 맹희씨와 3년간 동거하다 1964년 아들 이모씨를 출산한 것으로 알려진 배우 박모씨는 호적에 입적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자 아들을 양육해 오다 2004년 부산지방법원 가정지원에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박씨는 이 재판에서 승소했고 대법원은 2006년 10월 박씨의 아들이 맹희씨의 친자임을 확정했다. 박씨는 이어 2010년 6월 서울중앙지법에 과거 양육비상환소송을 제기했고 최근 재판부는 양육비로 4억8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그 뿐 맹희씨의 거취는 베일에 싸여있었다. 그러나 이번 소송을 통해 맹희씨의 근황이 드러났다. 우선 맹희씨는 현재 중국 베이징 창핑구 후이롱관진의 별장에 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베이징의 3대 별장촌으로 꼽히는 이곳은 비싼 가격과 완벽한 시설 및 주변환경 등으로 중국의 고관대작 들이나 최부유층들이 대거 몰려 사는 것으로 유명하다. 호수와 녹지공간은 물론 실내수영장, 골프연습장, 사격장도 갖추고 있다.

맹희씨는 베이징의 교민들과 접촉하거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베이징 시내 한인들이 많이 사는 왕징이나 근처의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거나 쑨이 지역의 골프장에서 연습을 하는 모습이 이따금씩 포착될 뿐이었다.


맹희씨는 팔순이 넘은 고령에도 매우 건강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에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한 소장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고 소송도 계속 진행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맹희씨가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소송을 준비하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소송 준비 이유에
대해서는 함구

맹희씨는 아들인 CJ 이 회장 등 자식들과의 교류도 제한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등 은둔생활에 익숙한 터여서 그의 이번 소송제기가 의외라는 것이 대체적 시각이다. 맹희씨가 이제 와서 소송을 준비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지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갑자기?’ 법률수석 부활 속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4·10 총선이 범야권의 승리로 끝났다. 집권여당은 참패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집권 3년차인 윤석열정부는 국정운영의 동력을 잃게 생겼다. 레임덕을 넘어 데드덕이라는 표현까지 나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인생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한 윤 대통령의 다음 행보는 엇일까? 속사정이야 어떻든 숫자만 놓고 봤을 때 이견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범야권은 192석을 얻어 ‘반윤 거야’ 전선을 형성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161석, 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 14석, 조국혁신당 12석, 개혁신당 3석, 새로운미래 1석, 진보당 1석 등을 모두 합친 수치다. 국민의힘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의석(18석)을 포함해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완벽한 참패 식물 대통령 선거를 진두지휘한 각 당 대표의 희비도 엇갈렸다.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게 됐고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 생명에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은 실제 선거를 뛴 선수보다 더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윤 대통령은 임기 내내 의회 주도권을 야당에 내준 상태로 정국을 운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해도 여당의 이탈표를 걱정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서 권력의 무게추가 당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거부권을 9차례나 사용한 이력이 민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각 당은 이번 총선서 ‘정권 심판론’을 정면에 내세웠다. 민주당은 윤석열정부 심판, 국민의힘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 프레임으로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국민은 범야권에 의석을 몰아주면서 정부 심판의 손을 들어줬다. 윤석열정부에 대한 중간평가에 ‘낙제점’을 준 것이다. 윤석열정부는 당장 밀어붙이고 있던 정책에 차질을 빚게 됐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골자로 하는 의료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총선 패배 메시지를 통해 의료개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지만 추진력에 대해서는 의문부호가 붙는다. ‘카르텔 타파’라는 국정기조도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윤 대통령은 지난 16일, 총선 결과와 관련해 첫 육성 메시지를 내놨다. 총선 참패 후 엿새 만이다. 민정수석실 폐지 대선공약 민심 청취 명분 부활 예고 윤 대통령은 “총선을 통해 나타난 민심을 우리 모두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올바른 국정의 방향을 잡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국민들께서 체감하실 만큼의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며 “큰 틀에서 국민을 위한 정책이라 해도 세심한 영역서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윤석열정부서 추진하고 있던 개혁은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과 의료개혁을 계속 추진하되, 합리적인 의견을 더 챙기고 귀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국회와의 긴밀한 협력을 말했지만 야당을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야권에서는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개탄스럽다”며 “오만, 독선, 불통 정치를 계속하겠다는 마이웨이 선언”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번 총선서 확인한 민심은 국정기조 전면 전환과 민생경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해 달라는 주문”이라며 “윤 대통령은 국정 실패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민생경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실질적 대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이 총선 패배에 대한 목소리를 내면서 이후 내놓을 쇄신안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국무총리와 대통령비서실장 인선과 관련한 하마평이 나오는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대통령실서 국무총리로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을, 비서실장에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일단 대통령실에서는 “검토한 바 없다”고 대응한 상태다. 3대 개혁 밀어붙인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현재 비서실장 아래에 있는 공직기강비서관실과 법률비서관실을 관장할 ‘법률수석비서관실(가칭)’이 신설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심 청취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민정수석이 존재할 당시 폐해로 여겨졌던 사정 기능은 제한하고 민심을 읽는 방향의 조직을 만들 것이라는 구체적인 언급도 나오고 있다. 이 과정서 사실상 민정수석실이 부활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이 나왔다. 민정수석실 폐지는 윤 대통령의 대선공약 중 하나였다. 윤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앞으로 대통령실 업무서 사정, 정보 조사 기능을 철저히 배제하고 민정수석실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과거 사정기관을 장악한 민정수석실은 합법을 가장해 정적, 정치적 반대 세력을 통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세평 검증을 위장해 국민 신상 털기와 뒷조사를 벌여왔는데 이런 잔재를 청산하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석열정부 출범 직전 대통령실은 2실(비서실·국가안보실) 5수석(경제·사회·정무·홍보·시민사회) 체제로 개편됐다. 당시 당선인 신분이었던 윤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윤석열정부 출범 3개월 만에 정책기획수석이 신설되면서 2실6수석 체제가 됐다. 민정수석실서 맡고 있던 공직기강 업무와 인사검증 업무는 법률비서관, 법무부 등으로 이관됐다. 특히 법무부에 공직자 검증 업무를 전담하는 인사정보관리단이 신설되면서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던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사정 기능 제한한다? 지난해 11월 윤 대통령은 정책실장을 신설하는 등 대통령실 직제를 3실6수석 체제로 개편했다. 개편 과정서 기존 수석들을 물갈이하면서 대통령실 2기 체제의 출범을 알렸다. 이때도 민정수석실 관련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패배 이후 대통령실 쇄신안에 법률수석이 거론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민심 청취는 표면용일 뿐 결국 윤 대통령이 사정정국을 조성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민정수석실 폐지’라는 대선공약을 파기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자구책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에 야당서 예고한 특검을 방어하려는 선제적 조치가 아니냐는 비판도 나왔다. 당초 민정수석실은 민심 청취 기능과 무관하게 운영됐다. 오히려 폐지 가능성이 나오고 있는 시민사회수석실이 민심을 듣는 역할을 해왔다. 민정수석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 국정 관련 여론 수렴, 고위공직자 복무 동향 점검, 대통령 친인척 관리, 사정기관과 소통 등의 업무를 주로 했다. 하지만 역대 정부서 가장 부각됐던 기능은 국가정보원,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5대 사정기관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실제 2000년 김대중정부서 폐지되기 전까지 이른바 ‘사직동팀’이 청와대 하명수사를 전담했다. 사직동팀은 경찰청 형사국 조사과를 일컫는 말이다. 윤 대통령 역시 당선인 시절 대통령 인수위원회 첫 과제로 민정수석실 폐지를 밀어붙이며 “사직동팀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대통령실은 법률수석을 신설하더라도 사정 기능은 제한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의심의 눈초리는 여전하다. 김건희·채 상병 특검법 대기 신임 수석 검찰 출신 될 듯 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법률수석 신설은 앞으로 들이닥칠 영부인에 대한 특검 등을 방어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며 “이제 와서 법률수석비서관실을 신설한다는 것은 사법 리스크 방어 차원”이라고 주장했다. 21대 국회에 이어 22대 국회서도 여소야대 정국이 유지되면서 민주당 등 범야권은 ‘해병대 채 상병 사망사건 수사외압 의혹 특별검사법(채 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여사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특별검사법(김건희 여사 특검법)’ 등을 예고했다. 국민의힘서도 채 상병 특검법 수용과 관련해 의견이 갈리는 만큼 국회 통과 가능성이 제기된다. 윤 대통령은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한 차례 거부권을 행사한 상태다. 192석을 확보한 범야권은 21대 국회서 채 상병 특검법이 좌절된다고 해도 22대 국회서 재추진한다는 뜻을 보이고 있다. 고민정 최고위원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채 상병의 죽음 앞에 정치권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민주당서도 의지가 충분히 있고 국회서 당장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김건희 여사 특검법도 22대 국회 개원 전후로 다시 도마에 오를 전망이다. 12석을 확보한 조국혁신당은 아예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김건희 여사 특검법을 공언했다. 민주당과 개혁신당 등이 조국혁신당에 동의한다는 뜻을 보인 만큼 추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다. 국민의힘 내부서도 수용 여부에 대한 의견이 갈리고 있어 향후 상황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정기관 잡고 흔드나 범야권이 다수 의석을 무기로 특검 정국을 예고하면서 윤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압박 수위가 높아지는 모양새다. 법률수석을 새로 만들려는 의도가 ‘방어’로 읽히는 분위기도 윤 대통령이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심지어 총선이 마무리되면서 국민의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지배력 역시 작아진 상태라는 점도 법률수석 신설의 배경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레임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궁여지책이라는 말도 나온다. 신임 법률수석을 누가 맡게 될지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부터 하마평이 돌고 있다. 검찰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