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라이벌’ YS·DJ 대해부

정적으로 동지로… 애증의 30년 ‘처절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와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평생 경쟁자이며 협력자였고 파트너이자 라이벌이었다. 둘은 70년대부터 ‘상도동’과 ‘동교동’이라는 한국 정치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면서 정상에 오르기 위한 본격 경쟁을 전개했다. 양자간 경쟁은 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투쟁이자 민주화운동이기도 했다. 상대방이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했을 때, 그리고 한쪽이 어렵고 강한 적수를 만났을 때 둘은 뭉쳤다. 그러다 다시 갈라서서 대결을 벌였다. 90년대 들어 두 사람 모두 대권 꿈을 이룬 이들의 관계와 행보는 우리 시대가 만들어낸 일종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YS와 DJ는 적도 아니면서 동지도 아닌 더구나 적이면서도 동지인 듯한 애매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한동안 잠잠했던 YS와 DJ 사이에 폭풍 전야 같은 미묘한 난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YS는 지난 11월28일 성명과 29일 자신의 상도동 자택 응접실에서 가진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DJ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YS는 “김대중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제일 좋은 방법은 이북에 보내는 것이다. 이북이 노다지가 나오는 곳, 천국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이북에서 살도록 하는 게 최선이다. 김정일에게 5억달러 갖다 주고 구걸해 회담을 했지 않나. 그 뒤에 김대중, 노무현 둘이 14조원 갖다 주고 솔직히 우리가 얻은 게 뭐냐”라면서 “그런데 이북이 이제 와서 사람은 못 들어온다고 하고. 참 애들 말마따나 웃기는 얘기지”라며 핵폭탄급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적도 동지도 아닌 미묘한 관계

동교동측은 이같은 YS의 거침없는 공세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DJ가 항상 해오던 무반응 대응이다.
한편 12월 들어 대북 정책에 대한 YS, DJ 두 전직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해 국민들은 DJ의 발언에 더 공감한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대북정책에 관한 두 전직 대통령의 ‘정치 훈수’에 대한 의견을 조사한 결과, 최근 경색된 남북관계를 비판한 DJ의 발언에 공감한다는 의견이 43.7%, 반대 입장을 나타낸 YS의 발언을 지지하는 의견은 16.3% 적은 27.4%로 조사됐다. 두 전직 대통령의 정치발언이 여·야간 반격과 옹호로 이어지면서 지지정당간 입장차도 확연히 드러났다. 민주당(90%〉4.8%) 지지층을 비롯해 민주노동당(53.6%〉20.2%), 자유선진당(43.6%〉17.4%) 지지층은 DJ의 발언에 공감을 표시한데 반해, 한나라당 지지층은 절반이 넘는 54.2%가 YS를 지지해 DJ(13.9%)에 공감한다는 의견을 훨씬 상회했다.

YS(아호 거산)는 1927년 12월20일 경남 거제 외포리에서 출생했다. DJ(아호 후광) 역시 1925년 12월3일 전남 신안군 하의도 후광리에서 출생했다. 두 사람 모두 섬 지역 출신이란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은 또 창랑(아호) 장택상 씨의 문하생이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YS는 12대 총리를 역임한 창랑이 경북 칠곡에서 2대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운동을 지원한 것이 인연이 돼 장 의원의 비서관이 되었다.

DJ는 창랑이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 이후 국민주권옹호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할 때 선전위원으로 활약했다. 당시 자유당의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하던 민주당은 내부적으로 신파와 구파로 세력이 나눠져 있었는데 YS는 구파, DJ는 신파쪽에 가담함으로써 서로 다른 선택을 했다.

1948년 간선으로 선출된 이승만 대통령 체제는 50년 6·25전쟁을 치른 후에도 계속돼 3선을 2년 앞둔 1954년 이 대통령이 직접 연임제한을 철폐하는 4사5입 개헌을 강행하고 1958년 12월에는 무술경관을 동원하여 야당의원을 감금한 가운데 새로운 국가보안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등 60년 초반까지 자유당 중심의 독재체제가 계속되었다.

1960년 3월15일 부정선거를 강행하자 3월15일 마산 시민들이 부정 선거에 반대하는 시위를 시작했고 4월19일에는 서울과 전국에서 학생과 시민이 몸을 아끼지 않고 육탄시위를 벌였다. 결국 이 대통령은 자의로 물러났으며 1960년 7월29일 총선거를 통해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또 DJ와 YS는 함께 쓰러지고 함께 일어서는 함수관계였다. 일찍이 두 김씨는 나라의 운명을 판가름할 역사적 인물로 존재해 왔다.

 YS·DJ 모두 70년대 이후 민주주의의 쌍맥으로 큰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이같은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사람이 없다. 두 사람은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돌풍을 주도해 선거가 끝난 후 국민 모두가 뜻밖의 결과에 깜짝 놀랐다. 125석으로 과반수에 못 미친 집권 민정당,70석을 확보해 제1야당으로 급부상한 평민당, 득표율에서 앞서고도 59석에 그쳐 제2야당이 된 민주당, 35석으로 캐스팅보트를 쥔 공화당 등 4당4색의 새로운 정국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3김씨의 원내진출로 새로운 1노3김 시대를 여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공통점 지닌 DJ-YS... 섬 출생, 장택상 문하생


이같은 4파전은 1987년 12월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예상 밖의 선거 결과로 야권은 YS·DJ를 중심으로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으로 각개약진하면서 88년 출범한 노태우 정권의 실정을 맹공할 수 있었다.
반면, YS·DJ 두 사람의 숙명적인 라이벌 관계는 1970년 9월29일 신민당 대통령후보 선출 때 본격화되었다.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등장한 YS, DJ, 이철승 씨와 유진산 총재가 경쟁한 이 대회는 물고 물리는 접전이었다. 이들 40대는 유 총재의 출마를 저지하기 위해서 일단 공동보조를 취했다. 40대 기수론에 대해 ‘구상유취’, ‘정치적 미성년자’라는 표현을 동원하며 맞선 유 총재를 비롯한 양일동, 정성태 등 당내 노장세력에 대항해 ‘단일화 모색’이라는 전략으로 대응한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 밀린 유 총재는 전당대회를 이틀 앞둔 9월25일 자신의 불출마를 전제로 40대 단일후보 지명권을 요구했고 이 불의의 기습제안에 대해 출마 후보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YS와 이철승 후보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DJ는 이를 거부한 것이다. 유 총재가 YS를 당의 공식후보로 추천하자 다시 한 번 반전됐다. 1차 투표에 참여한 이철승 지지자들이 유 총재의 선택에 불만을 품고 대규모로 무효표를 던진 것이다. 결국 1차 투표는 재적 대의원 885명 가운데 YS 421표, DJ 382표, 무효 82표로 과반수 득표자 없이 끝났다. 그리고 2차 투표를 앞두고 DJ와 이철승 후보는 11월 전당대회에서 ‘반진산 연합지도체제’를 형성해 유 총재의 당권에 공동 도전하기로 전격 합의했다.

결국 이철승 후보의 지지를 등에 업은 DJ는 458표를 얻어 410표를 얻은 YS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일궈냈다. 이날은 그후로 수십 년을 지속하게 된 양김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요란한 경적을 울린 날이자 정치신인에 지나지 않았던 DJ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정계의 신데렐라로 등극한 날로 기록되는 날이 되었다.

양김 협력 재개... DJ, YS 당권경쟁 지원

양김은 1979년 신민당의 당권 경쟁에서 협력관계를 이루었다. 새로운 당총재 선출을 위한 당권 경쟁구도는 중도통합론을 내세운 이철승 총재와 선명 노선을 지향한 YS 간의 대결 구도였다. 당시 정당 밖에서 반체제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DJ는 YS 지지를 선언함으로서 YS의 강력한 원군 역할을 했다.

역사적인 합종연횡은 1979년 5월30일 총재 선출을 위한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뤄졌다. 중도통합론을 내세워 유신정권과 협력노선을 취했던 이철승 씨와 대결노선을 견지한 YS가 맞붙은 이 대회에는 신도환, 김재광, 박영록, 이기택, 조윤형 등 모두 7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그러나 전당대회를 하루 앞둔 29일 김재광, 박영록, 조윤형 등 세 후보가 YS에 대한 지지선언과 함께 전격 사퇴한다. DJ가 이들에게 후보사퇴와 YS 지지를 호소한 결과였다. 1차 투표에서는 이철승 292표, 김영삼 267표로 이씨가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과반수에 미달된 상황이었다.

결국 2차 투표를 앞둔 2시간 5분 동안 양 진영은 막후에서 숨막히는 합종연횡을 시도했다. YS는 1차에서 92표를 얻은 이기택 씨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씨쪽 또한 87표를 얻은 신도환 씨의 지지를 얻어냈다. 투표결과 과반수인 376표보다 2표 많은 378표를 얻은 YS가 이씨를 11표차로 따돌리고 2년6개월 만에 제1야당 총재 복귀라는 쾌거를 이루었다. 80년 봄은 3김시대의 개막이 본격화되는 시기였다. 제5공화국 시대가 개막되면서 YS·DJ의 협력관계가 복원 유지되는 동반자 관계가 되었다. 

대권꿈 성취 최고의 금자탑 실현…이후 영원한 맞수 상대로 남기도
70년대부터 동지관계 싹 키워…신민당 대선후보 선출 기점 라이벌


YS·DJ 그들 자신이 서로 하나 즉 ‘둘=하나’라는 등식을 유지했다면 동반자 전선에는 이상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의 관계는 민주화 방법론에서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다. 제기된 문제는 YS·DJ ‘역할분담’이다.

80년 봄 DJ는 유신시대 당시 망명, 납치 감금, 사형 선고, 옥중 생활, 정치규제 등 재야의 상징이었다.
 
반면 YS는 신민당 총재로 재임 중이었던 유신정권 말기, 1979년 8월9일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2명이 마포 신민당사에서 농성에 돌입하자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민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 우리가 여러분을 지킨다. 걱정말라”고 안심시켰다. 9일과 10일 이틀 동안 총재 자신과 소속 의원들이 당사 주변 순찰활동과 더불어 정보과, 보안과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발길질을 하고 따귀를 올려붙이는 등 체벌을 가했다.

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 결정이 났고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이를 재가했다. 11일 새벽 경찰이 신민당에 최후통첩을 전달했고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이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당직자에게 요구했지만 YS는 “건방지다”며 전화를 받지 않고 오히려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장을 만나자 “너희들이 저 여공을 다 죽이려 하냐”고 뺨을 올려붙였다.

곧이어 2천여 명의 경찰이 밀고 들어오고 신민당 의원, 당직자 할 것 없이 폭력이 수반된 진압 작전이 이뤄졌고 23분만에 진압이 완료돼 YH여성 노동자들은 모두 연행됐다. 이 과정에 노동자 김경숙씨가 사망하는 비극적 상황이 벌어졌고 총재였던 YS는 경찰에 끌려나와 상도동 집으로 이송되었다.


1978년부터 DJ를 가택연금했던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기화로 YS마저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은 듯, 그해 9월 8일 YS에 대한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결정을 내리고, 공화당과 유신정우회가 지배하고 있던 국회는 10월4일 ‘국회의원으로서 본분을 일탈하여 반국가적인 언동을 함으로써 국회의 위신과 국회의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며 YS에 대해 국회의원직을 제명했다.

YS가 의원직에서 제명된 지 9일 후인 10월13일 신민당 의원 66명 전원은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어 10월15일 부산대학에서 민주선언문이 배포되고, 10월16일 학생들과 시민들이 합세해 대규모 독재타도, 반정부시위가 시작됐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쳤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대됐다. 부마민주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부마항쟁에 대한 강경진압 여부를 두고 김재규 중정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의 알력은 극심해졌고 결국 10.26 사태가 발생하면서 유신정권은 종지부를 찍었다. 결국 YS는 민주화 쟁취에 기여한 투쟁인사로 자리매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YS는 92년 치러진 14대 대선에서 997만7332표를 얻어 경쟁자였던 DJ를 193만6048표 차로 누르고 문민정부 시대를 개막했다. 1993년 3월 YS는 취임과 함께 ‘신경제 100일 계획’을 발표했다. 새 정부의 경제 개혁 작업의 성패가 첫 100일 안에 결정된다는 판단 아래 각종 경기 활성화 대책을 제시했다.

YS의 문민정부는 경기 활성화, 중소기업 구조개선, 기술개발 촉진, 기업활동 자율성 제고, 기본 생필품 가격 안정, 공직자 의식 개혁 등 7대 과제를 목표로 선정했다. 얼어붙은 경기를 녹이겠다며 1순위로 경기 활성화를 놓은 만큼 세부 정책도 경기 부양에 모든 초점이 맞춰졌다.

금리 인하, 금융 규제 대폭 완화, 재정 지출 대폭 확대, 기업투자 증대 차원의 각종 인?허가 등 진입 규제 완화, 공장 입지기준 완화 및 설립 절차 간소화, 물가 안정 위한 30개 기본 생활필수품 선정과 이에 대한 정부의 가격 특별관리, 정부가 운영하는 공공요금을 연말까지 동결하는 내용 등을 정부 초기 정책으로 시행했다. YS는 대통령 취임 후 군부독재에 대한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로 (군내 사조직이던)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그는 훗날 (자신이) 하나회를 없애지 않았다면 DJ나 노무현이 절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고 물리는 대권경쟁 서로 주고받기도


YS는 “1993년 취임할 때부터 군사문화 청산에 혼신의 힘을 다해 그때까지도 군대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좌지우지하던 하나회를 숙청했다. 하나회는 쿠데타 방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YS는 하나회 숙청을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민주주의를 가져올 수 있게 한 자신의 가장 큰 업적으로 꼽으면서 군사독재 정권과 맞서 싸워 민주주의를 가져온 사람으로서 걸어온 길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젊은 시절 해운회사와 신문사를 운영하기도 했던 DJ는 61년 5월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소망하던 국회의원이 됐으나 사흘 뒤 일어난 5.16쿠데타로 인해 의정단상에 서보지도 못하고 중도 하차하는 비운을 겪었다.

권토중래하던 DJ는 6, 7대 때 목포에서 연이어 국회의원에 당선됨으로써 본격적인 정치행보를 전개할 수 있었다. DJ는 70년 9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YS, 이철승 등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당권에 도전했다.

1차 투표에서 유진산 당수의 후원을 받은 YS에게 뒤진 DJ는 2차 투표에서 이철승의 도움으로 막판 역전극을 거두고 대권도전의 기반을 다졌지만 박정희 후보를 맞아 선전에도 불구하고 94만여 표 차이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박 전 대통령의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가 된 DJ는 박 전 대통령의 견제를 받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1971년에는 총선 유세 도중 의문의 차량추돌로 중상을 입는 사고를 당했다. 일본에 체류중이던 1973년 8월에는 유신선포를 감행한 박정희체제에 대한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중앙정보부요원들에 납치돼 현해탄에 수장될 뻔한 아찔한 절대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겨우 살아서 국내로 들어온 DJ는 살벌했던 유신정권체제 하에서 각종 민주화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했으며 그 대가로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도래한 ‘서울의 봄’을 맞아 1980년 2월부터 정치활동을 재개한 DJ는 그러나 5.17 비상계엄의 확대로 인해 정치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신군사정권으로부터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1982년 12월 국내외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출국한 DJ는 1985년 2월 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 YS와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이 되면서 총선에서 기적같은 `여소야대’ 정국을 이끌어 낸다. DJ는 1987년 6.29선언으로 사면복권됐으며 1987년 대선에 평민당 후보로, 그리고 92년 대선에는 민주당 후보로 연거푸 대권도전에 나섰다.

DJ는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YS에 이어 3위, 92년 대선에서는 다시 YS에 밀려 2위에 그치자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머무르기도 했다. 그리고 1995년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고 네 번째 대권에 도전하기 위한 준비에 공을 들였다.

1997년 10월27일 당시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전격 회동해 야당 단일후보협상을 타결한데 이어 박태준 의원과 ‘DJT연대’를 달성, 취약지였던 충청과 대구, 경북권의 반DJ정서를 차단하거나 희석하는 성과를 거둬 대권고지에 한 발 더 다가갔다.

1997년 12월18일 치러진 제15대 대통령선거는 DJ의 4번에 걸친 대권도전 꿈이 마침내 실현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총1032만6275(득표율 32.0%)표를 획득해 맞상대인 이회창 후보를 39만557표차로 꺾고 대통령의 꿈을 실현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DJ는 YS로부터 정권을 승계하고 1998년부터 2002년까지 국민의 정부 시대를 열었다.

애증으로 점철된 YS·DJ 양김씨의 30여년 숙명의 정치비사는 이렇게 서서히 막을 내리려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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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0 이후···4인 파워게임> 화려한 부활 조국

[4·10 이후···4인 파워게임] 화려한 부활 조국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이 두 자리 의석수를 확보하면서 원내 3당으로 자리 잡았다. 조국 대표는 비례순번 2번으로 단숨에 여의도행 티켓을 따냈다. 문재인정부 초대 민정수석비서관과 66대 법무부 장관 등 굵직한 이력을 지녔지만 초선인 만큼 처음부터 입지를 다져야 한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조 대표의 생존 전략은 무엇일까?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과반을 넘기면서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졌다. 지난 10일, 민주당의 압승에 가까운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서 상황을 지켜보던 조국당 지지자들도 감탄사를 내뱉었다. 조국당이 기대하던 ‘10석+알파(α)’가 확실해졌다. 주먹을 쥔 지지자들은 연신 “조국”을 외쳤다. 총선 뒤흔든 조국혁신당 조 대표는 이날 총선 출구조사 결과에 대해 “국민이 승리했다”고 소리 높였다. 그는 “국민께서 윤석열정권 심판이라는 뜻을 분명하게 밝히셨다”며 “윤석열 검찰 독재 정권의 퇴행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국민 여러분이 이번 총선 승리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밝혔다. 이어 “윤 대통령은 이번 총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라. 그리고 그간 수많은 실정과 비리에 대해 국민께 사과하라”며 “이를 바로잡을 대책을 국민께 보고하라”며 “총선은 끝났지만 조국당이 만들 우리 정치의 변화는 이제 시작이다. 개원 즉시 ‘한동훈 특검법’을 발의하겠다”고 강조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비례대표 개표 현황에 따르면, 조국당은 12석으로 집계됐다. 국민의힘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가 18석으로 가장 많은 당선자를 배출했다. 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이하 민주연합)이 14석을 얻었으며 개혁신당과 진보당은 각각 1석을 얻는 데 그쳤다. 조국당은 24.2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신생정당이 20%가 넘는 지지율을 거두자 정치권에서는 이례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로써 조국당 비례대표 12번까지는 무난히 당선권에 들었다. 차례대로 ▲박은정 ▲조국 ▲이해민 ▲신장식 ▲김선민 ▲김준형 ▲김재원 ▲황운하 ▲정춘생 ▲차규근 ▲강경숙 ▲서왕진 등의 후보가 국회에 입성하게 됐다. 한때 여권서 “조국이 나오면 땡큐”인 ‘조나땡’이란 말까지 나왔지만 이를 상쇄시킬 정도로 조국당의 돌풍은 거셌다. 조 대표가 부산 민주공원서 신당 창당 선언문을 낭독했을 때만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한 이들은 극히 드물었다. 기세 좋게 제3지대로서의 존재감을 키워가던 개혁신당과 새로운미래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조국 열풍’ 또한 금세 식을 것이란 분석이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조 대표는 지난 2월8일 자녀들의 입시 비리 및 청와대의 감찰무마 혐의 등으로 항소심서도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마찬가지로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힐 것이란 해석에 무게가 실렸다. 총선 한 달 앞두고 등장한 루키 정당 민주당과 정권 심판론 쌍끌이 전략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조국당은 이번 총선서 가장 큰 변수로 자리 잡았다. 총선이 가까워질수록 정권 심판론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종섭 전 주호주대사 사건과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의 ‘회칼 테러’ 논란이 연이어 터지면서 이는 조국당의 동력으로 이어졌다. 조국당의 슬로건은 윤 대통령의 탄핵을 암시하는 “3년은 너무 길다”였다. 거대 야당인 민주당은 중도층 여론을 의식해 탄핵에는 조심스러운 입장일 수밖에 없다. 결국 ‘윤정부 무력화’를 거침없이 외치는 조국당에 심판을 벼르던 강성 유권자들이 동참한 것이다. 민주당을 지지하지만 다소 약한 목소리에 갈증을 느끼던 지지층의 표를 흡수한 셈이다. 22대 총선을 통해 조 대표는 완벽한 정치적 부활에 성공했다. 하지만 1·2심 모두 실형이 나온 만큼 조 대표가 22대 국회를 완주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의 대표이자 간판인 조 대표가 대법원 판결을 통해 의원직을 상실한다면 사실상 조국당은 존폐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조 대표가 집어든 여의도 생존 전략은 ‘검찰 탄압 프레임’을 굳히는 것이다. 자신을 여의도로 이끈 ‘검찰 탄압’이라는 명분을 긴 호흡으로 유지하면서 원포인트 전략으로 내세우겠다는 설명이다. 이는 조 대표가 출소 후 여의도로 돌아오기 위한 명분으로도 내세울 수 있다. 국회에 입성한 조 대표는 그동안 강조해온 한동훈 특검법을 띄우는 데 주력할 전망이다. 그동안 조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원내에 진입하면 한동훈 특별법을 1호 법안으로 발의하겠다”고 강조해 왔다. 한동훈 특검법은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 징계 관련 의혹 ▲검찰 고발사주 의혹 ▲논문 대필 등 자녀 입시 비리 의혹 등을 수사 대상으로 삼는 걸 골자로 한다. 이 밖에도 조 대표는 ‘윤석열정권 관권선거운동 의혹 국정조사’를 실시하거나 ‘검찰의 민간인 불법 사찰 의혹 국정조사’를 추진해 윤 대통령을 국회에 출석시키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12석 확보 완벽한 성공 당선권에 진입하자 조 대표는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지난 11일 조국당은 총선 당선자들과 함께 첫 공식 일정으로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을 찾았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에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김건희를 수사하라”고 외쳤다. 조 대표는 “이번 총선서 확인된 ‘윤석열 검찰 독재 정권 심판’이라는 거대한 민심을 있는 그대로 검찰에 전하려 한다”며 “검찰은 즉각 윤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를 소환해 조사하라”고 말했다. 조 대표는 김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도 거론했다. 그는 “검찰은 ‘몰카 공작’이라는 대통령실의 해명에 설득력이 있다고 보느냐”며 “몰카 공작이라면 관련자들을 소환해 조사하고 처벌하라. 그것과 별개로 김 여사도 당장 소환하라”고 주장했다. 끝으로 조 대표는 “조국당은 검찰이 국민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22대 국회 개원 즉시 ‘김 여사 종합 특검법’을 민주당과 협의해 신속하게 추진할 것”이라며 “검찰이 수사에 나서지 않는다면 김 여사는 특검의 소환조사를 받게 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조국당이 검찰만 정조준하는 이유는 조 대표가 ‘정치적 죽임’을 당했다는 여론 때문이다. 따라서 조 대표를 향한 동정론도 조국당이 꺼내들 수 있는 카드 중 하나로 여겨진다. 검찰에게 탄압받았다는 이미지를 가진 조 대표가 법정에 모습을 드러낼수록 오히려 지지자의 결집력이 높아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지난 몇 년 동안 조 대표 본인은 물론 그의 가족까지 수사 대상에 올랐다. 이를 시작으로 조 대표와 그의 일가족이 잘못한 부분은 있지만 죄명에 비해 과도하게 탄압받았다는 동정론이 형성됐다. 동정론은 조국당 지지자를 결집시키는 강한 무기다. 오래전부터 조 대표를 지지해 왔다는 A씨는 기자회견 현장에서 <일요시사> 취재진과의 만나 “조 대표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짠하다”고 말했다. 함께 온 B씨도 “온 가족이 풍비박산이 나지 않았나. 힘든 일이 많았을 텐데 역경을 딛고 나선 것을 보면 마음이 이쪽(조국당)으로 간다”고 말했다. 이 VS 조 동상이몽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미 이 대표의 재판에 익숙해져 있기 떄문에 조 대표의 범죄 혐의가 비교적 희석됐다는 평도 나온다. 조국당이 총선 직전까지 지지율을 견인하자 여권에서는 급하게 견제에 나섰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은 총선 기간 동안 조 대표를 ‘범죄자’로 규정하며 “범죄자들에게 미래를, 아이의 미래를 맡길 수 없지 않냐”고 강조했다. 이에 조 대표는 “‘한동훈 특검법’에 동의부터 하라”며 맞불을 놨다. 조국당은 한동훈 특검법에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동의할 것이란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중도층을 포섭해야 하는 입장이다. 또한 차기 대권주자로 부상한 조 대표의 존재가 부담스럽기도 하다. 정치권에서는 여의도 신입인 조 대표와 이재명 대표를 동일선상서 바라보는 모양새다. 총선 다음 날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이번 선거를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던 (윤석열)대통령에게 보낸 마지막 경고”라고 평가하면서 “(윤석열 대통령은)하루빨리 이재명·조국 대표를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제1야당 대표인 이 대표뿐만이 아니라 조 대표까지 함께 언급된 만큼 조 대표의 몸값이 크게 뛰었다고 해석했다. 조 대표는 대권주자로서의 가능성은 닫아뒀지만 민주당에서는 견제하는 분위기가 이어진다. 이 같은 흐름을 두고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SBS 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현해 “야권의 분열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표는 “이재명 대표와 조국 대표의 속도 차이가 있을 것”이라며 “(야권이) 윤정부에 대한 심판론을 갖고 거대 의석을 이뤘지만 조 대표와 이재명 대표의 시간표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녀 입시 비리’ 사법 리스크 여전 대법 판결 정치생명 마침표될 수도 현재 조 대표는 대법원 판결만 남은 만큼 모든 일정을 빠르게 해치워야 한다. 총선을 한 달 앞두고 정치판에 뛰어든 것 역시 궤를 같이한다. 대법원과 견줄 만큼 몸집을 키우거나 진보 진영서 대권을 잡아 스스로의 힘으로 사면해야 한다는 게 이준석 대표의 시나리오다. 반면 이재명 대표는 급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이준석 대표는 “이재명 대표는 많은 의석을 가진 정당의 대표기 때문에 서서히 조여 들어가려고 할 것”이라며 “그 속도 차이가 역설적으로 두 세력의 분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분석을 내놨다. 현재 조 대표의 생존 전략은 조국당의 원동력을 유지하거나 추후 여의도 복귀를 위한 명분을 쌓는 데 그칠 뿐이다. 조국당의 정치 공간을 넓히고 다른 당과 손을 잡기 위해 매력적인 묘수를 꾀어내는 게 조 대표의 숙제로 남아 있다. 조국당 의석은 12석으로 교섭단체를 충족시키는 20석을 채우기 위해서는 8석이 더 필요하다. 1석씩 얻은 새로운 미래와 진보당, 혹은 소수 야당과 손을 잡고 공동 교섭단체를 꾸리는 것도 방법 중 하나로 제시된다. 이제까지 민주당과 조국당 모두 합당 가능성에 선을 그어왔다. 조국당이 내세운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 슬로건에 민주당은 ‘몰빵론’을 내세우기도 했다. 민주당이 과반석을 얻은 지금으로서는 조국당이 거대야당에 협력하는 관계를 유지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하지만 의외의 성적을 거둔 조국당이 22대 총선의 캐스팅보트 역할을 쥐면서 꼬리가 몸통을 흔들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민주당·민주연합·조국당 등 범야권이 힘을 합치면 의석수가 국회의원 전체의 5분의 3인 180을 넘기게 된다. 이 경우 신속처리안건인 패스트트랙 지정을 통해 법안을 강행할 수 있다. 아울러 패스트트랙에 저항할 수 있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도 강제 종료시킬 수 있다. 혼자일 때 더 강하다 전직 청와대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조국 대표가 민주당과 합칠 가능성은 매우 적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추후 민주당서 탈당할 의원이나 제3지대 의원이 합류한다면 원내교섭단체인 20석이 충분한 만큼 조 대표가 숙이고 들어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전적으로 조 대표의 판단에 달렸지만 민주당과 손을 잡으면 지금과 같은 선명성이 묻히고 특유의 아이덴티티를 잃게 된다”며 “조 대표는 이번 총선의 캐스팅보트다. 살아남는 방법은 지금과 같은 목소리를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다급해진 대법원? 대법원이 업무방해·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를 받는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상고심 사건의 재판부를 결정했다. <뉴스1>에 따르면 주심은 엄상필 대법관으로 2021년 조 대표의 배우자 정경심 전 동양대 교수의 항소심서 징역 4년을 선고한 이력이 있다. 현재 대법원은 엄 대법관이 상고심 재판을 맡더라도 형사소송법상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이번 조 대표 사건의 하급심 판결에 엄 대법관이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다만 엄 대법관에게 유죄의 심증이 있으므로 조 대표 측은 재판부를 교체해달라는 기피 신청을 낼 수는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