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주부가 마약성분이 들어 있는 다이어트 약 1만여 정을 팔다 적발됐다. 이 주부는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된 약을 살 빠지는 약으로 둔갑시켜 인터넷을 통해 팔아 수천만원의 부당이익을 취했다. 범행에는 의사와 약사도 합세했다. 약을 사는 데 필요한 처방전을 허위로 발급해 주고 불법으로 수십명에게 약을 팔아온 것. 중독성과 각종 질병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천만한 마약이 버젓이 인터넷공간에서 팔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허술한 의약품관리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허위처방전 받아 마약성분 든 약품 인터넷 통해 팔아
의사, 약사까지 합세 여성들 수십명에게 1만정 유통
평소 체중감량에 관심이 많던 A씨는 다이어트 카페를 검색하다 눈에 띄는 광고 하나를 발견했다. ‘살 빼는데 효과 확실한 아디, 푸링 팝니다’라는 광고였다.
식욕억제제 등 다이어트약에도 풍부한 상식을 가지고 있던 그는 솔깃해졌다. 아디펙스, 푸링 등의 약이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란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데다 다른 약에 비해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A씨는 이에 약을 구매하고 싶다는 내용의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을 받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금만 하면 택배로 약을 보내준다는 내용이었다. 약값이 시중가격보다 비싼 편이었지만 그는 망설임 없이 입금을 했다. 처방전이 필요한 구하기 까다로운 약을 병원에 갈 필요 없이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큰 매력이었다.
A씨처럼 인터넷을 통해 위의 약을 구매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이 약들은 다이어트용이 아닌 항우울제로 장기간 복용할 경우 살이 빠진다는 소문이 돌면서 일부에서 비만치료제로 이용되고 있다. 문제는 처방전이 필요한 향정신성의약품인데다 마약성분까지 함유되어 UN 산하 마약감시기구인 INCB에서도 사용 자제를 경고한 위험한 약품이라는 것.
마약이 살 빼는 약 둔갑
이처럼 위험천만한 약을 처방전도 없이 인터넷을 통해 유통시킨 일당이 붙잡혔다. 약품판매를 주도한 사람은 뜻밖에도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리고 의사와 약사 등 처방전과 약품을 제공할 수 있는 이들도 가정주부와 손을 잡고 약을 유통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경기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는 지난 2일, 가정주부 서모(36)씨와 김모(43)씨 등 의사 3명, 고모(58)씨 등 약사 4명, 서씨로부터 비만치료제를 구입한 불법 구매자 33명 등 모두 41명을 마약류관리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입건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서씨는 지난해 10월 중순부터 최근까지 의사 김씨 등으로부터 향정신성 의약품이 함유된 비만치료제 처방전을 발급받아 약국에서 1만3000정을 매입한 뒤 인터넷을 통해 판매해 5200만원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약품들이 다이어트에 효과적이란 소문이 돌면서 약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던 서씨는 의사와 약사 등을 이용해 약을 구한 뒤 비싼 값에 약을 팔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후 그는 친인척과 계모임 동료 등 15명의 주민등록번호를 포함한 개인정보를 이용해 처방전을 발급받았다.
처방전을 발급해준 것은 의사 김씨로 매출을 올리기 위해 환자와 대면하지도 않고 허위로 300여장의 처방전을 서씨에게 건넸다.
일반 처방전의 경우 의료보험이 적용돼 1건당 2500~ 3500원을 받고 처방전을 발급하고 있지만 향정신성의약품 처방전은 1건당 2만~3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어 꽤 쏠쏠한 돈벌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 약사 고씨 등은 단골인 그에게 처방전도 없이 120정의 비만치료제를 조제해 준 것으로 밝혀졌다.
이런 식으로 확보한 향정신성의약품은 인터넷을 통해 팔려나갔다. 서씨는 젊은 여성들이 자주 오는 다이어트 커뮤니티 등에 ‘살 빼는 약 팝니다’라는 내용의 광고 글과 휴대폰번호를 올렸다.
이 번호로 연락을 한 이들에게 그는 돈을 입금 받은 뒤 택배로 약품을 보내주는 방식으로 약을 유통한 것으로 드러났다. 약값은 30정에 8~10만원으로 원래 약값인 2만5000원~3만원보다 2~3배 비싼 가격에 판매를 했다.
서씨를 통해 약을 구입한 33명은 대부분 여성이었고 간호사 6명과 여대생 8명, 여고생 2명도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국제택배를 이용해 중국과 미국, 호주 등에 있는 유학생들에게까지 약을 판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씨는 이런 식으로 번 돈 대부분을 생활비와 초등학생 자녀의 교육비로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처럼 인터넷을 통해 마약류 의약품이 불법으로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의약품관리를 보다 철저히 해야 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미성년자까지 아무런 제약 없이 마약성분의 약을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이에 따라 경찰은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대상으로 불법 마약류 거래 등에 대한 수사를 확대하기로 했다.
너무 쉬운 처방전 발급
이번 사건으로 불거진 또 한 가지 문제점은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된 식욕억제제 등의 다이어트약품들을 처방받고 구하는 것이 너무 수월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일부 병원에서는 향정신성 다이어트약품을 처방받는 데 별다른 절차가 필요하지 않다. 다이어트 약을 처방받으려는 사람이 약이 필요할 정도로 비만인지를 알아보는 최소한의 검사조차 생략한 채 형식적인 말 몇 마디로 처방전을 발급해 주는 병원이 부지기수라는 것.
최근 모 제약회사의 식욕억제제를 사기 위해 처방전을 발급받으러 간 이모(28·여)씨도 너무 간단한 처방전 발급절차에 놀랐다고 한다.
이씨는 얼마 전 동네에 있는 한 내과에 가 간호사에게 조심스레 “OOO 처방전 발급받으러 왔다”는 말을 건넸다. 합법적으로 판매하는 약이지만 향정신성의약품이라 왠지 쉽게 처방해주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나 이씨의 생각은 빗나갔다. 의사는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죠?”, “지금 복용하고 있는 약 있습니까?” 등 형식적인 질문 몇 가지를 건네고 약의 부작용에 대한 짤막한 설명을 한 뒤 진료를 끝냈다. 그리고 이씨는 1만5000원을 주고 처방전을 받아 나와 근처 약국에서 약을 샀다. 처방전을 구하고 약을 사는 데 걸린 시간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씨는 “약을 편하게 구한 것은 불만이 없지만 환자가 비만치료제 처방전을 구하러 왔으면 최소한 몸무게 정도는 재봐야 되는 것 아니냐”며 “더군다나 부작용이 있을 수 있는 향정신성의약품인데 별다른 검사도 없이 아무에게나 처방해 주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고 꼬집었다.
건강관리협회 한 관계자는 “이같은 사건은 다이어트 공화국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각종 병폐의 표본”이라고 지적하면서 “살을 빼려다 건강까지 잃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